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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78화 (78/148)

78화

“으아…… 읍!”

진짜 너무 놀라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뒤에서 입까지 틀어막혔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하. 접니다.”

아르였다.

순식간에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아 버렸다. 아직도 가슴이 심하게 쿵쾅거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주저앉은 내 머리 위로 등 뒤에 선 아르의 얼굴이 보였다.

“저하를 놀라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덕분에 정신 확 들었네.”

생각해 보니 지금은 지난 생에서처럼 황궁 안에서까지 암살을 의심할 필요가 전혀 없지 않은가. 지레 겁부터 먹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추운 날씨임에도 얼굴이 화끈해졌다.

“이 시간에 왜 나오셨습니까?”

“그냥. 싱숭생숭해서.”

“춥습니다.”

추우니 어서 라벤더궁으로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 말의 뜻을 못 알아들은 척 말했다.

“별로 춥지 않아. 너는 왜 나왔어?”

“그냥요.”

그냥이라니, 그답지 않은 말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어색한 적막이 흐를 것 같아서 뭐라 말해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음…… 할바마마가 살아 계셔서 많은 것이 달라졌어.”

“다행입니다. 제가 바꾸지 못했던……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어서.”

중간에 흐려지던 말끝이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

“그대가 무능하다는 말이 아니니 그리 신경 쓸 것도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나였지.”

그때는 무엇을 시도해도 내 뜻대로 되는 법이 없었고, 내가 스스로 판단했다고 여겼던 행동들까지 이미 적들이 짜놓은 각본대로였다. 한없이 그들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나기만 했다.

“그때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요. 모두가 저하께는 이 황궁 속 피바람이 부는 방향을 숨기기에 바빴습니다. 게다가 간신과 충신이 구별할 수도 없이 뒤섞여 혼돈의 도가니였고요.”

“아니, 내가 애써 무시했던 거야. 그때의 나는 어른들이 휘두르는 이 커다란 판이 마냥 두렵기만 했어. 그래서 숨었어. 조용히 숨만 죽이면 내 목숨 하나 정도는 부지할 수 있을 줄 알았거든.”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야기하며 걷다 보니 서월궁의 호수를 벌써 반의반이나 돌았다. 호수에 비친 그의 모습이 문득 너무도 어른 같았다.

“내 기억 속의 너는 그렇지 않았어.”

“저하의 기억 속에 있는 저는 지금과 같은 두 번째 생이었으니까요. 그런데도 전 미래를 바꾸지 못했잖습니까. 하지만 저하께서는 폐하를 살리셨습니다. 그때부터 이미 커다란 것이 바뀌었습니다. 너무 부담 갖지 마십시오.”

“고마워. 네게는 늘 위로만 받는구나.”

어떻게든 그의 마음에 보답하고 싶은데 이런 마음의 빚이 채 가시기도 전에 늘 그가 나를 먼저 위로했다.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네게 가장 값진 것을 주고 싶어서 항상 생각했던 건데…….”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정말? 내가 뭘 주려는 줄 알고?”

“무엇이 되었든 정말로…….”

나는 재빨리 아르의 앞에 서서 손을 뻗어 그의 입을 막았다. 아르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검푸른 눈동자에 조금의 욕심이라도 비칠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없었다. 평소처럼 강직했다.

“그대가 탐낼 만한 것이 생각이 났다.”

“저는 별로…….”

“역대 황제들에게만 전승되는 황실의 검술이 있단다. 그거 배우고 싶지 않으냐?”

그의 입 앞을 막았던 손바닥에 따뜻한 숨결이 닿았다. 커다랗게 뜨인 새카만 동공 속에 거울처럼 내가 비쳤다. 마치 한 마리 악마와 같은 모습으로 히죽 웃고 있었다.

그는 평소처럼 괜찮다는 말 대신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반문했다.

“……그게 가능합니까?”

‘그대가 원하는 것을 드디어 찾았다.’

***

라벤더궁의 1층, 서편에는 천장이 상당히 높은 한 층짜리 넓은 홀이 있다. 주로 파티장으로 쓰는 공간은 동편 홀과 중앙 홀이었기 때문에 서편 홀은 그동안 무도회 춤을 연습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이제 이곳은 내 개인 연무장이 될 것이다. 이미 고모님의 허락도 받아 냈다.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 원하는 대로 하렴.”

올해 내 궁에 배정된 예산 중 남아 있는 대부분이 이곳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치는 데에 투입되었다. 수많은 인부가 배치되었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연무장을 한 바퀴 돌자 때마침 내 검술 스승이 되어 줄 기사가 도착했다.

“저하, 글로렌스 경께서 도착했습니다.”

잔느와 함께 응접실로 들어온 글로렌스 경은 할바마마의 호위대장이다. 동시에 할바마마의 검술 예동이기도 했다.

그는 곧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풍채가 대단한 노익장이었다.

“저하를 뵙습니다. 제국에 영광을.”

반듯하게 경례하는 그에게 나 역시 제자로서 예를 갖추었다.

“제 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로렌스 경.”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저하께 ‘그 검술’을 전수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대로 황제들에게만 전수되는 검술을 황제도 황태자도 아닌 자가 배울 수 있는 딱 한 가지 경우가 바로 글로렌스와 같은 케이스였다.

역대 황제들이 모두 검술에 능한 것은 아니었고, 고모님처럼 아예 몸을 쓰는 일과는 담을 쌓은 황태자도 많았다.

만약 황제에게서 황태자에게로 전해지는 방식이었다면 이 검술은 진즉에 사장되었으리라.

그래서 황제나 황태자, 혹은 황태손이 이 검술을 배우고자 할 때는 반드시 함께 무예를 배울 예동을 들였다. 혹시라도 다음 대에서 이 검술의 맥이 끊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몇 대에 걸쳐 황제들이 무예에 관심이 없다면 그때는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어린 기사에게만 이 검술이 사사되었다. 이 검술의 맥을 유지하기 위한 ‘계승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가 만약 운이 좋다면 훗날 황태자나 황태손의 검술 스승이 될 수도 있었다.

“경께서 은퇴하시기 전에 가르침을 받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어이쿠, 영광입니다! 하하! 사실은 슬슬 이 검술을 계승할 어린 기사라도 찾을까 하여 황태녀 전하께 말씀이라도 올릴 참이었습니다. 저야말로 정말로 감격스럽습니다. 그럼 슬슬 무예를 함께 할 예동도 찾아 드리면 되겠습니까?”

글로렌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재빨리 준비된 말을 꺼냈다.

“이미 제가 내정한 이가 있습니다. 그를 가르쳤던 제14기사단의 견습 기사들의 교육 담당자와 기사단장이 추천서를 작성해 보낸다고 했으니 조만간 받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확인해 보고 판단해 주시면 됩니다.”

내 말속에서 묘한 어조를 느낀 건지 글로렌스 경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짙은 황색 눈동자가 마치 맹수의 것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제14기사단에서 가르치고 있는 게 아니라 ‘가르쳤었다’는 말입니까? 그럼 현재는 어느 기사단 소속입니까?”

글로렌스 경이 이럴 것 역시 예상했었다. 역대 황제들에게 전해지는 검술을 아무에게나 가르칠 수는 없을 테니 분명 내 무예 예동 역시 까다롭게 고를 것이 분명했다.

이럴 줄 알고 레이하임에게도 미리 물어봐 두었지.

“레이하임 경, 황제 폐하의 호위대장은 그대들의 존재를 알고 있나요?”

“글로렌스 경이요? 당연히 알지요. 그들이 양지에서 폐하를 호위한다면 우리는 음지에서 폐하를 호위하니까요. 따로 대화한 적은 없지만, 서로 늘 의식하고 있습니다.”

“경이 단장이니 한 명쯤은 규칙적으로 내게 보내 줄 수 있나요?”

“특정 시간에는 임무를 비워 달라는 말입니까? 가능은 합니다만…….”

“임페리얼.”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글로렌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러면서 나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섀도 나이트.”

/“섀도 나이트입니까?”

“저하께서 그들을 어떻게 아십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내가 얼버무리자 글로렌스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들의 존재를 아는 이상 깊이 캐물어서 신상에 좋을 것이 없다는 건 나보다 그가 더 잘 알고 있을 거다.

나는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럼 수업은 내 일과를 관리하는 시녀를 통해서 적당한 시간을 잡도록 하고…….”

그렇게 잠시간 글로렌스와 조금 더 세세한 내용을 이야기했다.

***

황제가 쓰러진 지 벌써 보름째, 도통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황제의 침실에서는 가느다란 그의 숨소리만 쌕쌕 울렸다. 기도에 가래가 낀 듯 탁한 숨소리였다.

그런 황제의 침소를 지키던 레이하임은 침대의 캐노피에 달린 민트색 레이스를 살며시 걷었다. 그러고는 황제의 용안을 내려다보았다.

“자네 말이야…….”

그때 황제가 건넸던 귓속말이 자꾸 귓가를 맴돌았다.

“내가 황후를 끌고 온천에 가 있을 테니 자네는 그 틈에 아멜리아가 시킨 걸 계속 조사하게. 그리고 모든 증거를 남겨 놔야 한다. 하나하나 밝혀 봤자 황후와 체리에 후작이 그때그때 묻어 버리기 쉬워. 그러니 정말 빼도 박도 못하도록 모든 증거를 모아서 에오넬에게 넘겨.”

“예, 폐하.”

“그리고 아멜리아가 자네에게 시킨 일은 어떻게 되었냐고 묻거든, 이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도록 잘 타일러 주게. 아직 어린애가 아니냐. 감히 어른들의 사정에 어린 황태손을 끌어들여 자네까지 움직이게 한 배후도 꼭 조사하고.”

“예, 폐하. 그리고 외람되오나 한 가지 여쭈어도 될는지요.”

“흐음?”

“이 사건은 사실입니까, 의심입니까? 소신의 질문이 무례한 줄은 압니다만 조사에 필요할 듯하여 감히 말씀 올립니다.”

그때 황제는 희미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젊은 시절에 너무 물렀었지……?”

많은 것을 담은 말, 그리고 곧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담은 한숨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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