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게 대체 무슨……?”
내 질문을 무시한 채 고모님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런 상태라면 내가 황위를 물려받게 생겼네. 혹여 그렇게 된다면 네가 성년이 되었을 때 이 상황을 모두 정리해 안전하게 황위를 넘겨주마. 이리 상황이 찝찝해서야, 원…….”
내 지난 생과 아르가 이야기해 준 그의 지난 생까지 전부 통틀어도 처음 듣는 말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왜요? 왜 제게 그렇게 빨리 양위하시려고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서 나왔다. 그래도 고모님은 여전히 여느 때와 같은 모습, 같은 목소리였다.
“내가 황제가 되면 어마마마는 태후로서 여전히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돼. 내가 황제가 되어 설령 국서를 들인다 해도, 자식 없던 역대 황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내 남편이 될 사내의 운명 또한 뻔하지. 이건 먼 황족 방계에서 양자를 들이는 것과 조금 다른 문제야.”
그녀는 평소보다 조금 더 서늘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그건 정말 조금뿐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
“원래 아바마마는 네가 성년이 되면 곧바로 크로이젠 공자와 혼인시키고 너를 황제로 만들어 키옌을 뒷방 늙은이로 만들어 버릴 생각이셨다. 그리고 상황으로 물러나서 골치 아픈 정사를 내려놓고 태황태후와 여행을 다닌다는 핑계로 키옌을 끌고 황궁에서 나가 여러 지역 행궁을 순방하실 작정이셨어.”
“아……!”
“그리된다면 키옌은 황궁에 붙어 있을 새가 없어질 거고, 볼테르도 더는 황자가 아닌 황숙이 되어 버리니 황궁에서 살 명분이 사라질 테지. 이복 황숙이라는 자가 황제 조카 옆에 빌붙어 사는 꼴이 더 우스울 거다.”
그때, 오래전 내가 세 살 무렵 할바마마가 나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하셨던 말씀들이 머릿속에서 띄엄띄엄 스쳐 지나갔다.
“어쨌든 내 기준에선 멜리가 적통이야.”
“키옌을 제국의 태후로 만들 수 없다. 내 결정은 멜리야. 이건 안 변해.”
“멜리, 우리 멜리! 이 할애비가 황제로 만들어 줄 거야.”
“그리고 그렇게 한다면 그동안 키옌이 기존에 해오던 황궁의 안살림을 국서가 될 로이드가 손쉽게 장악해 버릴 수 있을 테니까.”
***
‘황제가 될 준비를 해라.’
그 한마디 속에는 수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그날 보았던 고모님의 눈빛. 몹시도 사무적인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마론 백작.
그랬다. 고모님은 정말로 내가 성년이 되는 날 내게 양위할 생각이셨다.
‘이유가 대체 뭐지?’
오래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그 어떤 정보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지난 삶에서 고모님은 내게 모든 것을 철저하게 숨겼다. 게다가 고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나는 곧바로 냉궁에 유배되었고 주위에는 내 눈과 귀가 되어 줄 그 누구도 남지 않았다.
숙부의 기사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삼엄하게 감시하고 있는 냉궁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고, 숙부가 허락한 사람 이외에는 누구도 나를 찾아올 수 없도록 철저하게 고립되었다.
심지어 숙청당하지 않고 유일하게 남아 있던 호위기사 아르마저 냉궁에 드나들 때마다 제복이 모두 벗겨진 채 혹여 외부에서 밀서를 들여오지는 않았는지 소지품을 검사당하는 수치를 매일같이 겪었다.
그러니 나는 단편으로 조각난 과거의 기억과 지금 가지고 있는 정보만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챙길 수 있는 것들, 상대가 잃게 될 것들도 최대한 많이 정확하게 짐작해야 한다.
머리가 아팠다.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되겠다. 바람을 좀 쐬어야겠어.’
찬바람을 맞으면 정신이 좀 들 것 같았다.
나는 내 침실 옆의 드레스룸으로 넘어갔다. 입구에 있는 마력 램프를 점등하자 푸른 빛이 은은하게 방을 비추었다. 나는 겨울 옷장을 열어 짙은 밤색의 두껍고 긴 모피 망토를 꺼내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거울 뒤의 비밀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
황제가 쓰러졌다고 해도 에오넬은 쉴 수 없었다. 황태녀인 그녀는 황제 대행 업무를 계속해야 하므로.
주변의 소왕국들과 야만족들이 황제가 쓰러졌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행동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안팎으로 입을 단속하는 것에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대륙의 80%를 독식하고 있는 제국에 불만을 품은 주변 국가들과 부족들은 너무도 많았다. 경계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이 와중에 드디어 극비 문서의 봉인이 풀린 전 황태자 부부의 타살 정황에 관한 서류. 그것을 둘러싼 근거 확실한 소문들은 너무나 명백하게 황태녀 에오넬을 범인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아바마마가 그 문서를 봉했던 이유가 이거였어.’
황태자 부부의 마차 사고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모든 귀족의 어마어마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사건에 관한 모든 문서를 1급 기밀 서류로 분류하여 일정 기간 내용을 봉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당시에는 에오넬도 그런 황제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문서를 확인한 이후로 그녀는 그때 황제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깨달았다.
“하아-.”
에오넬이 길게 한숨을 쉬자 곁에 있던 시녀가 얼른 시원한 얼음물을 내밀었다.
“전하. 이 일은 이제 내일 하셔도 됩니다. 잠깐 쉬세요.”
“자네야말로 내일부터 마론 백작에게서 비서실의 일을 인수·인계받기로 하지 않았나? 돌아가서 쉬도록 해. 난 이것만 하고 잘 테니.”
“반드시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좀 쉬세요.”
“아니, 이미 그날 오라버니에게 ‘그 편지’를 전하러 간 하인의 행방도 찾지 못했어. 유일한 생존자인 마부는 여전히 의사소통할 수 없는 상태고. 여태 그런 상태인데 이제 와 들쑤신다고 진실이 밝혀질 리 없지. 내가 유력한 용의자가 된 이상 내 손으로 사건의 진상을 규명한다는 것도 밖에서 보기에 퍽 우습지 않겠어?”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차라리 얼른 멜리에게 양위하고 멜리가 제 손으로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도록 해야 해. 그 사건에 본격적으로 손을 댈 명분을 가진 건 용의자인 내가 아니라 멜리야. 심지어 나나 할바마마보다 훨씬 깊게 파고든다고 해도 그걸 아무도 말릴 수도 없지.”
에오넬은 눈을 감고 이어 말했다.
“아무것도 모를 때 죽은 제 부모의 의문사를 황제가 파고들겠다는데 말린다면 공범 아니냐고 찍혀서 3대가 멸하기 딱 좋으니까. 그러니 난 어떻게든 그 전까지만 버틸 거야.”
“그러다 그 전에 전하께서 진범으로 몰리시면요?”
“그에 대해선 더 말하지 마. 어쨌든 그 전까지 내가 할 일은 오라버니의 죽음에 관련된 사건을 들쑤시는 게 아니야. 훗날 멜리에게 방해가 될 모든 것을 정리하는 것이지. 황후가 나와 마찬가지로 오라버니의 사건에 한눈팔지 못하도록, 쉴 새 없이 그 수족들을 쳐내야 해.”
실제로 이때까지 쓰러진 황제가 해왔던 일이었다. 에오넬은 서둘러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몰딘 남작의 영지 몰수 절차가 끝나거든 볼테르에게 그곳을 주겠어. 아바마마가 깨어나셔서 늦둥이 아들이라고 좋은 땅 쥐여 주기 전에.”
***
이제 지하 통로는 거의 다 외웠다. 눈을 감고도 다닐 정도였다. 모든 벽이 다 똑같아서 미로처럼 생겼다고 생각했었으나 여러 번 다니다 보니 조금씩 달랐다. 이젠 그곳에서 설령 길을 잃는다고 해도 문제가 없다.
이 미로 안에는 수없이 많은 출입구가 있었는데 나의 이번 목적지는 서월궁이다. 서월궁 쪽의 출입문은 옛날 내 방에 딸린 개인 욕실이었다. 그곳 벽에는 제국의 용 문양이 양각된 거대한 장식벽이 있는데 그 거대한 조각품에서 용 비늘로 위장한 문이 있었다.
나는 그곳을 통해 서월궁으로 나와 궁 안을 한참 걸었다. 서늘한 밤공기가 적막한 궁의 곳곳을 휘감았다.
이윽고 후원으로 나오자 아까보다 더욱 차가워진 공기가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공기 속에 희미하게 풀냄새와 흙냄새가 섞여 있다.
아무도 없는 궁에 오가는 사람은 없었다. 굳게 닫힌 궁의 대문 밖이나 담벼락 밑 정도만 근위 기사들, 위병들 몇몇이 지키고 있겠지.
나는 고개를 들어 이파리가 모두 떨어진 단풍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겨울바람을 맞아 앙상한 나뭇가지가 바람을 타고 흔들렸다.
주변을 둘러보자 소복하게 쌓인 하얀 눈, 얼어붙은 호수를 거울삼아 그 위에 들어앉은 달빛과 별빛이 하얗게 빛났다.
그 모든 것이 운치 있다.
“이렇게 보니 솔직히 라벤더궁보다 예쁜 것 같기도 하고.”
퍽 쌀쌀한 바람마저 정신을 번쩍 들게 해주는 것 같아 좋았다.
그렇게 호수 둘레를 따라서 천천히 걷다 보니 멀리서 누군가가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지금은 상당히 늦은 시간이다. 누가 들어올 시간도 아닐뿐더러 이곳은 주인도, 관리하는 궁인들도 없이 비어 있는 궁이다.
무엇보다 아무도 없는 궁이라 하더라도 바깥 경비는 삼엄하다. 나처럼 비밀통로를 통하지 않고서야 내부로 들어올 방법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나는 서둘러 커다란 단풍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누구지?’
대체 뭐 하러 들어온 누구인지 보려고 고개만 슬그머니 옆으로 뺐는데 그새 시야에서 사라졌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라벤더궁으로 돌아가야 할까?’
아니, 나처럼 산책하러 몰래 숨어든 궁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평범한 궁인이 비어 있는 궁이라도 경비를 피해서 몰래 들어오는 것이 가능한가?’
정답은 ‘아니다.’였다.
일단 뭐가 됐든 황급히 자리를 뜨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삭!
바닥에 마른 낙엽 부서지는 소리가 종아리를 타고 올라왔다. 조금 전까지는 있는 줄도 몰랐을 정도로 존재감이 미약했던 것들이었다.
물론 아까 산책을 할 때도 이런 소리는 계속 났을 거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발을 움직일 때마다 부스럭부스럭 소리가 궁 벽을 타고 메아리치는 것처럼 요란하게만 느껴졌다.
‘차라리 달려서 궁 안으로 들어가 비밀통로로 빠질까?’
‘여의치 않으면 그냥 출입문까지 달려가 근위 기사에게 도움을 청할까?’
막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탁!
어깨 위로 무언가가 덜컥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