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공작가의 정원이 보였다. 눈이 소복한 정원에서는 하인들이 부지런히 눈을 치워 길을 내고 있었다.
오늘은 로이드와 정기적으로 보여 주기식 만남이 있는 날이었다. 겸사겸사 엘비어스도 만났다. 사실은 로이드보다도 엘비어스를 만나러 온 목적이 더 컸다.
이렇게 공작가를 찾아올 일이 있을 때마다 로이드는 여러모로 좋은 명분이 되어 주었다.
“어쨌든 이번에는 몰딘을 감싸 주는 귀족들이 없으니 그동안 억울했던 사람들의 한을 풀어 줄 기회도 되겠군요.”
내 머릿속에 아주 잠깐 순하게 변했었던 육식 토끼 기사님의 붉은 눈이 떠올랐다.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나가고 나는 엘비어스의 목소리에 다시 집중했다.
“아직은 귀족 사칭 사건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수사권이 황도 치안대가 아닌 기사단으로 넘어왔으니 남작도 언제 들킬지 몰라 속이 타들어 갈 겁니다.”
엘비어스가 장난스레 웃었다. 나도 피식 웃으며 말했다.
“파티장에서 내가 뺨을 맞을 뻔했다고 공개적으로 말했으니 사칭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고 말을 할 수가 없겠지요. 실제로 제가 닦달해 대는 바람에 제 수행원이 저 대신 맞은 장면을 보았다고 파티장에서 증언한 귀족도 몇몇 있었고요.”
애초에 우리는 그가 빼도 박도 못하게 모든 퇴로를 싹 차단해 버렸다.
“그렇다고 숨기자니 들통이 났다간 괘씸죄가 추가되겠지요. 도울 자도 없고 돕는 자가 있다 쳐도 눈에 띄게 도울 수가 없으니 아마 들키는 건 시간문제일 겁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죠. 지금쯤 뒤로 재산을 처분하고 도망치려 하고 있을 겁니다.”
“마침 그의 영지가 국경이고 곧 겨울이라 슬슬 야만족의 침략이 시작될 텐데 그렇담 영주가 반드시 영지로 가야 해요. 영지를 지키러 간다는 핑계로 몰래 도망치기 딱 좋겠어요.”
그가 도망친다면 긴 시간을 허비할 것 없이 바로 영지와 작위를 몰수해 버릴 수 있다. 그다음에 타국에 남작의 수배령을 내리면 된다. 물론 그런다고 잡지는 못하겠지만 평생 도망치며 살게 하는 정도는 가능하다.
뭐, 그를 잡아서 처벌하든 말든 나하고는 이제 아무렴 상관없다. 나는 그의 속 빈 강정 같은 영지만 빼앗아 숙부에게 떠넘겨 버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밀렌도 찾고 싶다던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급하게 재산 처분 하고 도망가는 놈이 노예들까지 다 끌고 도망칠 수는 없을 것 같으니 잘하면 찾을 수 있을 것도 같다.
“잘 해결되고 있는 것 같네요.”
나는 컵에 남은 우유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 입에 넣고는 컵을 내려놓았다. 우리의 대화는 이렇게 마무리되는 듯 긴 정적이 이어졌다.
‘그나저나 레이하임에게 맡긴 일은 잘되어 가고 있으려나?’
황후의 생일파티가 끝나고 대공이 라파트니 공국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레이하임은 아무런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그날 파티가 끝나고 밀렌에게 궁까지 호위해 달라고 했을 때, 그에게 내 방으로 몰래 와달라고 하여 증거물을 보여 주었다. 그는 마리와 대화하며 남겼던 기록과 옷소매를 보고 레이하임에게 말해 주겠다고 했다.
‘그때가 언젠데…….’
거의 두 달이나 지났다. 그런데도 여태 이렇더라 저렇더라 말도 없다. 하다못해 아무런 정보도 조사해 내지 못했다면 아직 수상한 구석을 못 찾았다는 말이라도 전해야 하지 않나?
이미 대공은 황후의 생일파티가 끝나고 공국으로 돌아갔다가 신년회 때 다시 사절단을 이끌고 방문하겠다고 예고했다.
황후의 생일파티 이후, 할바마마께서는 기력이 허하다며 키옌과 함께 온천 행궁으로 여행을 떠나셨다.
“폐하께서는 어떠시답니까?”
엘비어스가 물었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늘 똑같죠. 정정하시잖아요.”
할바마마는 요맘때 즈음이면 몸이 으슬으슬하다는 둥 기력이 달린다는 둥 갖은 이유를 대며 온천 여행을 떠나셨다. 옛날에는 그곳에서 아예 정무를 보시더니 이제는 죄다 황태녀인 고모님께 맡겨 버리고는 황후와 함께 오붓한 데이트를 즐겼다.
“아마 폐하께서는 1년에 한 철, 황후를 황궁에서 떨어뜨려 놓으려는 생각이실 겁니다. 황태녀 전하께서 폐하를 대신해 국무를 보신다면 전하의 입지를 다지는 데에도 도움이 될 거고요.”
“그럼 월말에는 돌아오시겠네요.”
신년회 전에는 돌아오실 거다.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 응접실 문을 급하게 두드렸다.
똑똑똑.
“작은 주인어른! 황궁에서 시녀님이 오셨습니다.”
크로이젠 공작가의 하인 목소리였다. 그런데 황궁에서 웬 시녀? 보나 마나 내 시녀인 것 같긴 한데.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얼굴이 하얗게 질린 벨이었다.
“어?”
황궁에 있어야 할 벨이 무슨 일이지? 게다가 나는 곧 일어나 황궁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저하…….”
희게 질린 얼굴과 반대로 흰자위가 살짝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를 삼키며 말했다.
“폐하께서! 폐하께서, 행궁에서 온천욕을 하시다 나오시면서 어지럼증을 호소하셨는데…….”
불길함이 엄했다. 훌쩍이던 벨이 엉엉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쓰러지셨대요. 3일 전부터…… 깨어나지를 못하신다고 합니다. 어떡해요, 저하!”
***
황제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황도에 퍼졌다. 쓰러져서 혼수상태라는 소문은 아닌 것으로 보아 아마 할바마마의 측근이든 고모님이든 재빠르게 손을 쓴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한 가지 소문이 더 돌기 시작했다.
‘이스카 황태자와 레이첼 황태자비의 마차 사고는 사실 사고가 아니었다. 배후에는 에오넬이 있다.’
급하게 환궁하는 마차 안에서 벨이 눈물을 꾹꾹 삼키며 할바마마의 소식과 황도에 퍼지는 소문에 대해 전했다.
“바로 고모님께 가자.”
라벤더궁으로 향하던 말머리를 수정궁으로 돌렸다.
내가 고모님의 집무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마론 백작이 와서 고모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고모!”
“멜리!”
과거의 나는 고모를 믿지 못했다. 물론 처음부터 믿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믿었으나 주변의 상황에 휩쓸리며 어느새 나도 모르게 고모님을 의심하고 말았다.
심장이 아렸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숙부예요.”
내 입이 떨어지기 무섭게 벨이 황급히 내 입을 틀어막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하, 쉿!”
그러자 고모님께서 벨을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말하게 내버려 두어라. 괜찮다.”
벨이 우물쭈물 내 입을 막았던 손을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고모님을 음해하는 모자의 간사한 혓바닥을 뽑아 버리고 싶었다.
“숙부예요.”
또다시 간신히 힘을 짜냈다. 그러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이번에는 고모를 믿어요.’
그런 뒷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고모님이 차분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에게 장거리 특수 마차를 선물한 건 나야. 그 마차의 바퀴가 고장 나는 바람에 두 분이 협곡에 고립되었던 거고.”
그러면서 담담하게 사실을 읊었다. 자신의 입으로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
“후에 누군가 손을 댔을 수도 있잖아요!”
“아무도 없었어. 일단은.”
이 와중에 고모님은 몹시 차분했다. 이런 냉혈동물 같은 모습 때문에 내가 등을 돌렸었다는 걸, 믿어 주지 못했다는 걸, 그때의 고모님은 아셨을까?
그때도 지금도 그녀는 자신이 진범이 아니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역으로 몰아가지도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앞으로 할 수 있는 수를 생각해 내고 조용히 진행했다.
내게 그 모든 것을 철저하게 숨겼던 이유가 나를 기만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걸, 사실은 내 손에는 그 어떤 피도 묻히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었다.
“멜리야, 이 숙부를 믿어라. 형님을 죽인 건 에오넬 황제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네 눈과 귀를 가리고 지금 이 황궁 안에서 부는 모든 피바람을 숨겼겠느냐? 이대로 가다간 이 숙부와 함께 너도 죽는단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그때 변수가 되어 고모님을 죽인 건 나였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믿을게요. 그러니까 이렇게 내게 모든 걸 숨기지 말아 줘요.’
그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믿고 털어놓아달라고 하기엔 내가 아직 어리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그 답답함이 가슴을 찢고 튀어 나갈 것만 같아서, 나는 차마 아무도 말하지 못했던 것을 기어이 입 밖으로 끄집어내고 말았다.
“설령 타살이라고 해도 아바마마를 살해할 이유는 고모보다 숙부가 더 많잖아요. 고모님 전에는 황태녀라는 사례도 없었어요! 그러니 숙부가 황태자 자리를 노리고 아바마마를 살해한 거야! 그런데 왜 다들 고모님이 죽였다고 말해요? 다들 눈뜬장님이야?”
“옥좌를 노리고 살해했다는 가정 외에 다른 것을 다 배제한다면 그렇게 되겠지만 세상에는 더 다양한 이유로 살인이 일어나기도 한단다. 모든 것을 단순하게 바라보면 편하겠지만 사람이란 나이를 먹을수록 복잡하게 변하기도 하고. 그래서 어른이 되면 때때로 단순하게 생각해도 되는 문제도 스스로 더 꼬아 버리곤 하지.”
고모님은 지금도 일부러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하도록 길고 어렵게 말하고 있다. 묘하게 벽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나와는 다르게 여전히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뭐라고 변명이라도 좀 해봐요, 고모!”
내가 테이블 끝을 두 손으로 세게 쥐며 벌떡 일어서자 마론 백작이 나를 말렸다.
“진정하십시오, 저하. 저하께서 이리 소리치셔도 변하는 건 없습니다. 냉정해지셔야 합니다.”
고모님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한 채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멜리, 곧 황제가 될 준비를 하렴.”
“네?”
내가 이건 무슨 소린가 싶어 멍해 있는 사이 고모는 벨을 내보냈다. 방에는 나와 고모님, 그리고 마론 백작뿐이다.
“아바마마께서는 정확히 네가 성년이 되는 날, 그러니까 네 열여덟 번째 생일날 네게 황위를 물려주실 생각이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