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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75화 (75/148)

75화

8. 성군과 폭군 사이

황제의 집무실, 레이하임은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고 서둘러 황제를 알현했다. 정기적인 보고가 있는 날짜는 내일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황제는 인사도 받지 않고 말했다.

“내가 왜 불렀을 것 같냐?”

레이하임은 문을 닫다 말고 황제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발끝으로 슬쩍 남은 방문을 밀어 닫았다.

“폐하를 뵙습…….”

“인사는 됐고. 내가 왜 불렀겠냐고.”

심사가 잔뜩 뒤틀린 말투였다. 레이하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왜 불렀는지는 알 것 같다.

그가 잠시 뜸을 들이자 황제가 먼저 물었다.

“왜 조사했냐?”

“무얼 말입니까?”

생각할 틈도 없이 거의 반사적으로 시치미를 떼고 말았다. 그래도 그렇게 시치미 뗀 결과가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어차피 황제는 사소한 것에도 쉽게 기분 상하곤 했으니 이런 게 특별한 일도 아니다.

“좋다. 네가 대답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니 내가 묻지. 라파트니 대공 말이다. 누구 명령이냐?”

이미 그가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까지 눈치채고 있다니, 황태손의 명령이라는 것도 설마 알고 계신 걸까?

레이하임도 사실 궁금했다. 황태손 뒤에 누가 있는 것인지. 황태손을 이용해 자신에게 이런 조사를 시킨 사람이 누군지.

황태손은 이런 일을 직접 판단하고 누군가를 움직이기에 아직 한참 어리다. 이제 고작 만 10세를 넘기기 직전일 뿐이다.

‘뒤에 에오넬 황태녀 전하께서 계시다면 가능한 일이지.’

황태손의 뒤에 누가 있든 상관없다. 어차피 조사해도 황태손에게 모든 것을 알려 줄 생각은 아니었다.

‘역시 배후로 가장 유력한 건 크로이젠 공작가려나?’

에오넬 황태녀라면 굳이 황태손을 통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레이하임은 명백하게 헛다리를 짚고 있었다.

레이하임이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자 황제가 언성을 조금 높였다.

“생각하지 말고 묻는 즉시 대답해. 내가 지금 심히 짜증이 났으니.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한 모양이지? 나는 늘 말하지만, 너희들 중 아무도 완벽하게는 안 믿어. 개인마다 정도는 조금씩 달라도 늘 약간의 가능성은 열어 두고 있거든. 너는 네놈 부하들을 전부 믿나?”

섀도 나이트 중 누군가가 그의 행보를 보고한 모양이다. 황제가 그들 서로를 감시하도록 했다는 건 알고 있다. 레이하임도 단장이 되기 전에는 늘 서너 명 정도 맡아서 감시하고 있었으니까. 지금은 단장 업무로도 바빠서 그런 일은 빠져 있지만.

바꾸어 말하면 그들 중 한 사람당 적어도 감시자가 세 명은 붙어 있다는 소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어설프게 황제를 속여 봤자 쥐도 새도 모르게 부하들에게 암살당하기 딱 좋다.

“라파트니 대공이 황궁 안에서 여인을 만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누구인지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한테 보고도 없이?”

“저의 괜한 기우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치 않은 일이라면 폐하께 보고드리는 것이 오히려 폐가 될 것이라 여겼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깔끔하게 자신의 불충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런 말을 대체 어디서 누구에게 들었느냐 되묻지 않으시는 것을 보니 폐하께서는 이미 배후가 누군지도 아시는 건가?’

아니면 다른 섀도 나이트를 통해서 따로 조사해 볼지도 모른다. 그가 황제 몰래 행동한 이상 황제는 이번 일에서만큼은 그를 완벽하게 신뢰할 수 없을 테니까.

황제는 레이하임을 움직이게 한 배후를 묻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그래서 네가 내린 결론은 무엇이냐?”

레이하임은 황제의 옆에 선 마론 백작을 힐끗했다. 그런 그의 시선을 눈치챈 황제가 어깨를 으쓱했다.

“황족을 모독하는 일이라도 모른 척해 주겠다.”

옆에 있던 마론 백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거나 ‘황족 모독’을 운운하는 황제의 언사 때문에 놀랐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미 알고 있는 일에 대해서 ‘설마?’ 하는 것에 더 가까운 표정이었다.

그래서 레이하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하시는 바가 맞습니다. 그것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찾은 물증이 있나?”

“제게 없습니다.”

황제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호오, 네게는 없다? 그렇담 다른 이에게는 물증이 있다는 게로구나. 누구에게 있지?”

레이하임은 머리를 굴렸다.

그 물증을 황제는 어쩌려고 하는 걸까. 확보해서 조사하고 터뜨리려는 걸까, 아니면 증거를 없애고 묻으려는 걸까?

확실한 건 황태손 쪽은 증거를 확보해 황후를 골로 보낼 작정이라는 거다.

그런데 황제는 대체 누구 편이지?

황제가 에오넬이든 아멜리아든 둘 중 하나를 혹은 둘 모두를 황제로 만들 생각이라는 건 알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황제가 황후의 적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대답할 수가 없다. 그들 모자에 대한 황제의 생각은 늘 읽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황제가 에오넬과 볼테르를 향해서 배다른 남매끼리 사이좋게 지내라고 할 만큼 도덕적 이상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만약 그런 인물이었다면 진즉에 정적들에게 제거당했으리라.

어쨌거나 황제는 의자에 나른하게 기대어 허공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곧 그 상태 그대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충성을 바친 대상이 전부 제각각이라. 너는 어디에 충성했더라? 일단 나한테 한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보통의 기사들은 황제와 황실에 충성한다. 그러나 섀도 나이트의 경우는 제각각 달랐다. 밀렌처럼 아예 충성 맹세를 보류하는 경우도 있었고 아르처럼 전혀 엉뚱하게도 황제 앞에서 황태손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황제가 그들의 충성 맹세를 전부 믿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황제에게 충성하라 강요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다양한 방식으로 충성하게 하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섀도 나이트들 개개인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추측하기 편했다.

이건 임페리얼 섀도 나이트에게도 편안하고 황제에게도 훨씬 안전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레이하임은 황실의 적법한 직계 혈통에 충성을 맹세했다.

“폐하의 피에 했습니다.”

“아, 그랬지. 그래서 대답은?”

조금 전, 물증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아직은 저하께서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 마치 네 손에 곧 들어올 것처럼 말하는구나?”

정답이었다.

아멜리아 황태손은 레이하임에게 일전 밀렌을 통해서 정리한 증거를 넘기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다. 설령 그 정리한 증거라는 것이 물증이 아니라 증거 서류의 사본이나 증거품에 대한 기록이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황태손을 이용해 섀도 나이트의 단장을 움직일 정도의 배후가 누군지 확실치 않은 이상, 레이하임은 어떻게든 원본 서류나 증거품을 확보할 생각이었다.

황태손과 평화적으로 협상하여 얻어내든, 여의치 않으면 훔치든. 방법은 다양했다.

레이하임은 황제의 질문에 긍정하는 표시로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예.”

그런 그를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황제는 다시 물었다.

“확실하게 말해 봐. 내 손녀님의 줄을 탔다고 해서 내가 뭐라고 할 좀생이로 보이나?”

레이하임은 폐하는 좀생이가 맞지 않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것 같았으나 꾹 삼켰다.

“아닙니다.”

곧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레이하임 가까이 다가갔다.

“나는 말이야. 자네가 참 마음에 들어.”

그렇게 말하면서 다가온 황제는 곧 그에게 허리를 숙이라는 듯 손짓했다. 레이하임이 허리를 숙이자 황제는 그의 어깨 위에 조심스레 턱을 얹었다.

“자네 말이야…….”

그리고 아무도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

어느덧 가을을 지나 겨울, 12월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몰딘 남작에 대한 수사는 순풍을 탄 배처럼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시작은 귀족을 사칭한 누군가를 찾기 위한 수사였다. 그렇다 보니 황도의 치안 경비대가 아닌 황제 휘하의 기사단이 움직였다. 그리고 할바마마께서는 어쩐 이유 때문인지 그 수사를 황후의 입김이 아주 약하게 닿아 있는 제7기사단에 맡겼다.

“이유가 뭘까요?”

엘비어스에게 묻자 그가 답했다.

“몰딘 남작이 황후와 연이 닿아 의도적으로 저하를 해치려 한 것인지 단순한 우연인지 확인해 보려는 것이겠지요?”

“제 생각에는 그냥 우연인 것 같은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엘비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게 아주 만약에 필연이었다고 치자! 그래도 남작이라는 작위는 황위 다툼 한복판에 난입하기엔 너무 한미했다.

“만약 우연이 아니라 해도…… 아니, 저와 만난 일은 우연이지만 황후의 끄나풀의 끄나풀이라고 해도! 황후라면 신경도 쓰지 않을 거예요.”

“당연히 꼬리를 자르죠. 아마 자르는 척도 안 할 겁니다. 그냥 내버려 두겠지요. 알아서 잘리라고.”

“그런데 왜 할바마마는 굳이?”

“몰딘 남작과 체리에 후작 사이에 접점이 있다면, 제7기사단은 저들 스스로의 판단에 근거하여 몰딘 남작을 솜방망이 처벌로 정리하려 들 겁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아마 그런 정황을 포착할 기회를 노리는 걸 겁니다. 성공한다면 말단 귀족이라도 황후의 세력을 이루는 자들을 줄줄이 끌어낼 수 있을 거고요. 물론 바보가 아닌 이상 이미 다들 발을 빼버려서 효과는 미미하겠지만요.”

“아, 그렇구나.”

나는 우유를 빨대로 쪽 빨아 마시면서 창문 밖의 풍경을 한번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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