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노예상을 따라갔다. 이름 모를 어느 작은 왕국으로 넘어갔고 거기서 노예의 문양이 오른쪽 눈썹 위에 새겨졌다. 그렇게 노예상은 제국에서 끌고 온 제국민을 노예로 세탁했다.
그리고 다시 제국으로 넘어왔을 때는 이미 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 아홉 살 아이는 열두 살이 되어 있었다.
달그락거리는 짐 마차 속, 빛 한 점 들지 않는 캄캄한 나무상자 속에서는 퀴퀴한 곰팡내가 났다.
그는 어둠 속을 더듬거리다 손끝에 잡힌 천을 살살 잡아당겼다.
“누나, 누나. 우리 어디로 가?”
“쉿.”
누나는 그의 입을 손바닥으로 살며시 막았다. 누군가 밖에서 상자를 걷어찼다.
“조용히 해! 하여간 애들은 시끄러워서 문제야.”
그들은 한참을 이동해 어느 화려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임시로 차려진 불법 노예 경매장이었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쪼그려 앉으면 딱 맞을 크기의 쇠창살로 된 상자 안에 갇혔다. 그건 다른 노예들도 마찬가지였다.
한참이 지나고 한눈에 보아도 좋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여럿 들어왔다. 그들은 노예들을 주르륵 둘러보며 가격을 흥정했다. 흥정에 성공하면 노예들은 그 자리에서 끌려 나가거나, 그들의 상자 위에 붉은 리본이 묶였다.
그때 그들 남매의 앞으로 보라색 옷을 입은 귀족 남성이 다가왔다.
“몰딘 남작님! 이 상품으로 하시겠습니까?”
밀렌은 몰딘 남작이라 불린 남자를 새빨간 눈으로 응시했다.
“건방진 눈이구나. 파내 버리고 싶게.”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옆에 서서 남작에게 아부를 떨던 남자가 밀렌이 쪼그려 앉은 상자를 발로 세게 걷어찼다.
“어딜 똑바로 보는 거야? 노예 주제에. 아이고, 남작님 기분이 상하신 건 저희가 사죄드리겠습니다. 저희 상품에 흠집을 내기는 힘든 점 양해 바랍니다.”
“나도 진짜로 파내라고 한 말은 아니니 신경 쓰지 말게. 그나저나…….”
몰딘 남작이 밀렌의 상자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의 누이가 들어 있는 상자였다. 그의 눈이 음흉하게 빛났다.
“이 노예의 상태를 좀 확인해 보고 싶은데 벗겨도 되나?”
“그러믄요, 그러믄요! 얘들아, 남작 나리께서 상품을 자세히 보고 싶으시단다!”
남자가 남작 앞에서 손을 싹싹 비비며 말했다.
노예 거래소 안의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의 누이가 상자에서 질질 끌려 나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누나!”
그렇게 그의 누이는 그날 몰딘 남작에게 팔려 갔다.
***
그로부터 한 달 뒤.
다음 노예 거래소가 열렸다. 지난 거래소에서 팔리지 못한 그는 저번보다 가격이 조금 더 낮게 책정되었다. 그리고 노예 창고에서 곧 전시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거래소 천막에서 걸어서 10분가량 떨어진 곳. 황제의 밀명을 받은 섀도 나이트 열 명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레이하임은 자신의 부하들을 향해 마지막 브리핑을 했다.
“제5기사단이 노예 거래소를 습격할 시간까지 앞으로 30분 남았다.”
“예.”
“우리의 임무는 기사단이 외부에서 불법 노예 거래소를 공식적으로 수사하기 전에 노예 창고를 급습해서 노예들을 풀어 주어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마주치는 범죄자들은 자비를 베풀지 않고 죽여도 좋다. 출발한다.”
휙!
열 개의 그림자가 날랜 몸짓으로 수풀 사이를 지나갔다. 미미한 바람 소리만 그 자리에 남았다.
***
타국에서 신분을 세탁당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3년 내외. 공포에 짓눌리고 무기력에 익숙해진 노예들은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레이하임은 마지막 쇠창살의 자물쇠를 부쉈다.
퍽!
자물쇠가 맥없이 떨어졌다.
“나와라, 꼬맹이.”
밀렌은 엉금엉금 기어 나와 개처럼 엎드린 자세 그대로 레이하임을 올려다보고는 말했다.
“다 죽였어?”
레이하임은 독기 가득한 붉은 눈동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레이하임이 말이 없자 밀렌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노예 창고를 지키던 가드가 노예들을 협박할 때 자주 사용하던 단도를 순식간에 집어 들고 밖으로 뛰었다.
“엇! 단장, 저 꼬맹이 위험…….”
“내가 갈 테니 너희는 철수해.”
레이하임은 슬슬 걸어서 밀렌이 달려나간 뒤를 밟았다.
그때 밖에서 황실의 기사들이 들이닥쳤다는 소리와 함께 천막이 심하게 요동쳤다. 천으로 된 벽에 사람이 날아와 움푹 휘더니 그 모양 그대로 아래로 미끄러졌다.
노예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황제 폐하의 명이다! 한 놈도 남기지 마라! 모조리 잡아!”
그 순간 노예들의 눈이 번득였다.
“와아아아아!”
섀도 나이트는 황급히 자리를 떴고 노예들은 모두 뛰쳐나와 기사들 앞에 그동안 자신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던 자들을 앞다투어 가져다 바쳤다.
레이하임은 그런 혼란을 뒤로하고 밀렌이 들어간 어느 구석 자리 천막을 향해 유유히 걸었다. 그리고 밀렌은 레이하임이 뒤따라 오는 줄도 모른 채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불법 노예상의 두목은 그곳에서 금고를 열고 금화와 패물을 커다란 보따리에 쓸어 담고 있었다. 천막 문이 걷히는 소리에 그가 황급히 뒤돌아 소리쳤다.
“누, 누구냐!”
당황한 눈동자가 어린 소년이 들고 있는 단도로 향했다. 붉은 안광이 섬뜩하게 빛났다. 살기 가득한 눈동자를 마주한 두목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고, 고작 어린아이일 뿐이야.’
그러나 그 열두 살짜리에게서 풍겨 오는 흉흉한 살기가 숨통을 조여 왔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오, 오지 마! 돈, 돈 줄게! 이것 중에서…….”
그가 보따리에 쓸어 담던 패물들을 그대로 남기고 일어섰다.
“여기 나, 남은 거 다, 다 주마! 컥!”
밀렌은 순식간에 노예상 두목의 목에 올라탔다. 날카로운 칼이 그의 목덜미를 겨누었다.
“우리 누나 어디로 갔어?”
“겨겨겨겨, 경비병! 경비병!”
“누나 어디 있어?”
“모, 몰라! 네놈 누나가 어떤 년인지 내가 어떻게 알…….”
푹!
노예상 두목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목이 꿰뚫렸다.
천막 밖에서 가만히 그걸 지켜보던 레이하임은 허공을 향해 한숨을 짙게 내쉬었다.
“하아…….”
심장이 아렸다. 도대체 뭘 한 것도 없는데 괜스레 죄책감이 밀려들어 레이하임은 속이 답답했다.
그러나 레이하임은 그런 감정을 빠르고 능숙하게 갈무리하고는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이런, 중요한 증인 겸 죄인이 죽어 버렸네.”
그가 들어오자 소년은 잔뜩 경계했다. 토끼처럼 붉은 눈, 신비로운 백금색 머리카락이 몹시 매력적인 미소년이었다. 마치 설원 속에 사는 사나운 야생 토끼 같았다.
“나는 황제 직속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 레이하임이다. 너의 도망 노예 신분을 세탁해 주지. 그리 되면 네 누나를 찾을 수도 있을 거다. 따라오겠나?”
***
빠르게 보고를 마치고 정신없는 파티장을 빠져나온 아르는 서월궁의 후원으로 향했다. 지금은 주인이 사라진 궁은 관리하는 이가 없어 황량했다. 수년간 가지치기를 하지 않은 단풍나무들이 후원을 울창하게 뒤덮었다.
아르는 호수를 한 바퀴 돌아 일전의 그 꿈속, 아멜리아가 앉아 있던 자리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눈을 감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집중했다.
‘시원하다.’
보고만 하러 파티장에 들어가기 위해 잠깐 입었던 연미복이지만 셔츠 손목에는 아멜리아가 선물한 사파이어 커프스단추가 있다.
만지작만지작.
섬세하게 세공된 사파이어 알이 손가락 사이에서 도르르 굴렀다.
“황실 파티의 내부 경호를 섀도 나이트에서 한다는 말은 귀빈으로 위장한다는 뜻이냐?”
그렇게 물었던 황태손. 그리고 그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녀는 편백으로 만든 상자를 하나 건넸다.
“필요할 거다.”
안에는 사파이어 넥타이핀과 커프스단추가 들어 있었다. 딱히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안주머니에는 부적처럼 루비 단풍 머리핀이 들어 있다.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품에서 떨어뜨려 놓은 적은 없었다. 말 그대로 부적처럼 들고 다녔다.
‘차라리 이런 거, 주지나 마시지…….’
오른손 검지 끝, 왼쪽 가슴께에서 얇게 머리핀의 흔적이 만져진다.
눈을 감고 나무에 기대어 앉아 그때 꿈속에서 느꼈던 그 느낌을 더듬었다. 아주…… 잊히면 좋으련만, 한편으로는 잊고 싶지 않았다.
하늘에서 단풍잎이 떨어져 입술을 스쳤다.
그는 단풍잎을 떼어 내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꿈을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그때의 유혹이 선명해졌다.
“원하는 건 뭐든 다 줄게.”
‘정말, 아무것도 안 주셔도 됩니다.’ 아르는 일어나 섀도 나이트의 숙소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밀렌과 함께 후원에 도착한 아멜리아는 사방에 흩날리는 단풍잎과 달빛 비치는 새카맣고 깊은 호수를 차분하게 두 눈으로 훑었다. 주인 없는 궁의 후원은 삭막하기 이를 데 없다.
밀렌을 뒤로하고 그녀는 후원의 호숫가를 따라 달렸다.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한 바퀴를 달릴 때까지 밀렌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이윽고 밀렌의 앞으로 아멜리아가 다가왔다. 숨을 몰아쉬는 아멜리아를 가만히 쳐다보던 밀렌은 저 멀리 서월궁의 다른 쪽 문을 응시했다.
“어디 봐?”
“아뇨. 아무것도 안 봤어요.”
“이곳에는 없구나. 그냥 날 라벤더궁까지만 호위해 다오.”
그들이 떠난 후원에서 가을바람이 호수 위를 가만히 토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