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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73화 (73/148)

73화

“엔델포프에서 돌아오는 길에 황태손 저하를 습격했던 자가 체리에 후작 저택에 있었습니다.”

마론 백작이 숨을 흡 들이켰다.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평정심을 찾은 백작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뒤를 돌아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었다.

잠시 후, 적당히 시간이 흐르자 옥좌 위에 앉아 있던 황제가 먼저 백작을 불렀다.

“어떻게 되었다더냐?”

백작이 차분히 설명하는 동안 황제의 표정은 차분하기만 했다. 이따금 키옌 황후가 그들을 힐끔거렸으나 황제의 표정에는 그 어떠한 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아멜리아의 이야기를 했을 때, 무릎 위에서 두 손을 아무도 모르게 꽉 쥐었을 뿐이었다.

“멜리가 다녀온 곳이 엔델포프라는 것을 안 순간, 리만 그자에 대해 꼬리를 밟혔다는 사실도 깨달았을 거다. 그렇다면 그쪽 동네는 더 캐보아야 의미가 없겠군.”

“급합니다, 폐하. 역병이 당장 내년이라고 떠들었다 하니……. 평범한 사이비 종교가 아니라 후작가가 뒤를 봐주고 있는 곳이고, 그들이 수년이나 공들인 일이니 반드시 내년에 무슨 짓을 하긴 할 겁니다.”

“가져온 자료를 정보부에 넘겨 암호를 해독하고 연구하도록 해. 놈들이 역병을 퍼뜨리는 걸 막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막지 못한다면 치료제라도 풀어야지. 치료제의 대량 생산 방법을 연구하고 생산 시설과 유통망을 구축할 수 있는 기반부터 마련해.”

***

내가 몰딘 남작에게 사칭범을 꼭 잡아 주겠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을 때, 그자의 표정을 아르가 봤어야 했다.

‘아쉽다!’

후련한 표정으로 파티장 한가운데로 향하는 나를 엘비어스가 뒤따라왔다.

“지금까지 봐온 표정 중에 가장 즐거워 보이시는군요.”

“황후 마마는 표정 변화가 없어서 영 재미가 없었거든요.”

나는 슬쩍 할바마마 옆에 앉은 황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파티장을 돌아다니며 즐겁게 노는 볼테르도 한번 쳐다보았다.

“숙부는…… 그냥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고.”

“아홉 살짜리에게 그런 소릴 듣는 황자 전하도 참…….”

엘비어스가 혀를 쯧쯧 찼다.

“그럼 전 배고프니 뭐 좀 먹고 올게요.”

나는 한쪽 테이블에 길게 차려진 디저트 뷔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까는 그렇게 찾아 헤매도 발견하지 못했던 인물을 만났다. 붉은 눈을 빛내며 포크로 조각 케이크를 퍼먹고 있는 육식 토끼였다.

“밀렌 경?”

“엇? 황손녀님이네요?”

“아르는?”

“저기요.”

밀렌이 케이크를 집어 먹던 포크로 커튼이 쳐진 테라스를 가리켰다. 그 장면을 지켜본 레이하임이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멀리서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난 모르겠다.

“그럼, 조금만 혼나길 바랄게.”

“네?”

“그 포크 말이야. 단장님이 오고 있는 것 같은데?”

잠시 맹한 표정을 짓던 밀렌은 자신의 포크가 향한 방향을 발견하곤 황급히 입속에 케이크를 쓸어 넣고는 접시와 포크를 내려놓았다.

황급히 도망치려는 밀렌의 어깨에 레이하임이 손을 턱 올렸다. 나는 못 본 척 조용히 뒤돌아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레이하임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지금 목구멍으로 케이크가 넘어가나? 포크로 사람을 가리키는 매너는 누가 가르쳤지? 그 정도 매너도 외우지 못할 거면 파티장 경호 임무는 빠져.”

나는 마음속으로 밀렌의 명복을 빌어 주며 아까 밀렌이 포크로 가리킨 테라스를 향해 걸었다. 하늘하늘 바람에 날리는 커튼 앞에 섰다. 안에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차르륵!

커튼을 걷자 아무도 없는 휑한 공간이 펼쳐졌다.

“아…….”

서늘한 가을바람이 어깨를 스쳤다. 밖에 보이는 정원은 드문드문 푸른 가로등이 옅게 비추어 어두웠고 그 빛들 사이로 나뭇가지들만 살랑살랑 흔들렸고 밤바람을 쐬며 산책하는 사람들도 이따금 보였다.

그때 멀리 서쪽 문으로 나가는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어?”

나는 서둘러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홀을 가로질러 파티장 출입구로 나가게 되면 그대로 놓쳐 버릴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조급한 마음이 들어 드레스를 주섬주섬 걷어 올리고 허리보다 조금 높은 테라스 난간에 올라탔다.

“읏차!”

난간 위에서 버둥거리다가 풀밭으로 떨어지면서 드레스가 더러워졌다. 대충 손으로 흙을 털어 내고 황궁 서문 쪽으로 달렸다. 황궁 문의 근위 기사들이 달려오는 나를 향해 경례했다.

“저하를 뵙습니…… 어어? 저하!”

그들이 어버버 하는 순간 내가 문을 통과해 달려나갔고 한참을 달리다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을 때, 내가 그를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난 도대체 왜 여기까지 쫓아왔던 거지?’

파티장에 있을 줄 알고 찾아서 두리번거렸던 건 맞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파티장에 있으면 되었을 것을.

갑작스러운 허무함이 온몸을 집어삼켰다.

파티장으로 돌아가려는데 정면의 저 너머에 단풍나무가 보였다. 서월궁의 후원이었다.

“뭐 해요? 황손녀님?”

“으악! 깜짝이야!”

밀렌이 내 등을 콕콕 찌르고 있었다.

“난 황손녀님이 내 편인 줄 알고 있었는데 날 버렸어. 힝! 내가 목숨 걸고 체리에 후작 저택에도 다녀와 줬는데.”

“그게 목숨을 걸 일이었던가? 그까짓 거 시키려고 불렀느냐더니.”

“무슨 일 있었어요? 목소리가 왜 그래?”

“뭐가?”

“삐지신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반가운 것 같기도 하고…….”

글쎄, 갑자기 깨진 고요한 분위기가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씩 처지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질 듯하여 반갑기도 했다. 맞는 말이었다.

“예리한 육식 토끼 같으니.”

“엥? 토끼는 초식이에요, 황손녀님. 그런데 아르 찾으러 가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놓쳤어.”

“아하!”

밀렌이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찾는 거 도와 드릴까요? 황손녀님이 찾는 것보다 내가 찾는 게 훨씬 빠를 텐데. 물론 맨입으론 안 해줍니다.”

“원하는 게 뭔데?”

“오오? 황손녀님은 나랑 뭔가 잘 맞을 것 같아요. 황제 폐하는 그 맨입에 칼 쑤셔 넣기 전에 닥치고 충성을 맹세하라고 했거든요.”

“섀도 나이트가 내게 충성할 필요는 없어. 그대의 충정은 폐하께 바쳐.”

나는 귀찮다는 듯 그의 말을 흘려 넘겼다.

“전 황제한테도 충성 안 바쳐요. 목구멍에 칼이 들어와도 아무한테나 충성 같은 건 맹세 안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용케 살았구나.”

“아아, 그건 폐하가 나 아니어도 충성할 놈 많다고 필요 없다고 했거든요.”

어느새 나는 밀렌과 함께 서월궁을 향해 걷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아무나’에 속할 분인가? 그래도 내게는 아직 네가 필요하니 입은 다물어 주겠다.”

내가 피식 웃자 밀렌이 장난스럽게 그것참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바치지 않겠다는 그대의 충정은 누구에게 바치려고? ‘아무한테도’ 안 바치겠다는 게 아니라 ‘아무에게나’ 안 바치겠다는 이야기는 여지를 남기겠단 말로 들리는데?”

“아…… 그게 그렇게 해석되네.”

밀렌은 잠시 제 턱을 검지 손톱으로 긁적거렸다.

“그럼 몰딘 남작 말인데요.”

“그 변태는 왜?”

“역시 황손녀님의 적이었던 거죠? 황손녀님이 그런 변태 아저씨하고 한패가 아니라 다행이네요. 아까 워낙 즐겁게 대화하는 것 같았는데 제 착각이었나 봐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그 작자한테 원한이 좀 있거든요.”

그게 네 충성과 무슨 상관?

내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자 밀렌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 특유의 토끼 같은 눈빛을 반짝 빛냈다.

“그놈 죽이실 거면 제가 죽여도 돼요? 그런 다음에 사람 하나 찾아 주세요.”

“몰딘 남작을 죽이게 해주고 사람을 찾아 달라? 그럼 내게 충성을 바치겠단 소리냐?”

“내 충성도 목숨도 다 바칠게요.”

솨아아아-.

어디선가 불어닥친 바람에 실려 단풍잎이 날아왔다. 이윽고 서월궁의 달빛 호수가 보였다. 새카만 물에 달빛이 비쳐 일렁였다.

일순간, 야생 토끼처럼 늘 날이 서 있던 그의 눈빛이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누굴 찾아 주면 되지?”

“금발에 붉은 눈을 한 여자.”

금발에 붉은 눈. 어쩐지 익숙한 인상착의에 나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어디서 그런 인상착의를 보았는지 떠올랐다. 거울!

“……나?”

“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 그런데 황손녀님은 아니에요.”

그는 여전히 장난스러우면서 어딘지 모르게 공허한 분위기를 풍겼다. 문득 지난 늦여름, 물의 신전에서 밀렌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열두 살 때 도망 노예 신분 벗게 해준다는 말에 멋모르고 단장한테 사기당해서 끌려온 거라고요!”

“몰딘 남작의 노예냐?”

육식 토끼의 눈이 새빨갛게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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