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할 말 없으면 나가 보라며 손을 휘휘 내두르는 황제를 향해 아르는 허리를 숙였다.
“폐하께 감히 청이 있습니다.”
“뭔 청?”
“밀렌과 함께 가겠습니다.”
이번에는 황제의 미간이 조금 심각하게 찌푸려졌다.
“넌 왜?”
“폐하, 너무하세요! 내가 할 말 있다고 하면 한 마디도 못 하게 하시면서 쟤가 말하는 건 들어라도 보시네!”
밀렌이 투덜거렸다. 아르는 황제에게 찡찡대는 밀렌의 행태를 옆에서 들으며 시름이 깊어졌다. 이럴 때 보면 밀렌이 아멜리아 황태손 앞에서 하는 행동은 황제의 앞에서 하는 짓에 비하면 매우 예의 바른 편이었다.
그런 밀렌을 무시하고 아르는 들어나 보자는 황제의 앞에 이야기를 꺼냈다.
“체리에 후작저에 다녀왔습니다. 후작가에서 저번에 가면무도회 파티를 하기에 언젠가 필요할 듯하여서…….”
“그래서 어디까지 알아 왔는데?”
“그때 지하 2층까지 사전 답사 하고 왔습니다. 함께 보내 주십시오.”
“깊이도 들어갔다 왔네.”
아멜리아는 깊이 들어가지 말라고 했었으나 어느 쪽이든 걸리지만 않으면 그만 아닌가.
‘아시면 많이 속상해하시겠지.’
그렇게 밀렌과 아르는 같이 움직이게 되었고, 황제는 후작가가 비는 오늘을 날로 삼았다.
저택 내부까지 잠입한 둘은 곧바로 지하로 발소리를 죽이며 빠르게 움직였다. 지하 1층과 2층은 거의 한산했으나 지하 3층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사람의 흔적이 미세하게 있었다.
「걸리면 안 되는 뭔가가 확실히 있어.」
밀렌이 수어로 이야기했다.
「분위기만 가지고 확신하기는 이릅니다. 감으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난 감으로 판단하는 게 더 정확하던데? 그리고 나 이런 분위기 알아. 예전에 노예 창고에 있었을 때 이런 곳을 본 적이 있어.」
***
“나한테 충성 같은 거 받을 생각은 하지 마시죠.”
“그럴 거면 여긴 왜 들어왔냐?”
“난 우리 누나 찾아 주는 사람한테 충성할 거야.”
“아…….”
황제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러면서 관심 없다는 듯 코로 숨을 깊게 내뱉었다.
“뭐, 너 같은 거 하나 정도 충성 안 바쳐도 내게 충성하는 놈들은 많아. 스스로 알아서 잘 찾아보길 바라지.”
오래전 황제와 나누었던 대화였다.
밀렌은 노예 출신이었다.
어머니는 그가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 때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산더미 같은 빚을 졌다. 전부 노름판 빚이었다. 하우스를 운영하는 조직에서 하루가 멀다고 사람을 보내 독촉했다.
빚쟁이가 말했다.
“그럼 애들을 내놓든가.”
그렇게 남매는 아버지의 노름빚 때문에 노예로 팔렸다.
사실 제국에서 이런 방식의 노예는 불법이었으나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제국에서 노예라는 건 사형을 간신히 면한 중죄인이 받는 가장 가벼운 벌이었고, 세습되지 않았다. 노예의 자식은 노예가 아니라 평민으로 황립 보육원에서 자랐다.
노예는 어지간해선 거래할 수 없었고 거래하더라도 해당 노예의 거래 허가증을 발급받아 엔델포프의 노예 경매소를 통해서만 거래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남매는 불법 노예였다.
위와 같은 합법 노예는 주인이 죽일 수도 성적 착취 역시도 할 수 없었으며 오로지 노예가 가진 기술과 노동력만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합법적 경로로는 구매와 구매 이후의 관리도 까다롭다 보니 사실상 제국 출신의 합법 노예는 잘 거래되지 않았다.
대신에 노예 제도가 합법인 타국에서 들어온 노예가 더 많이 거래되었다.
그러나 타국 노예는 언어적인 문제 때문에 최근 들어서는 저런 식으로 어린아이를 받아다가 신분을 세탁했다. 노예 제도가 합법인 타국으로 밀수출한 다음 합법적인 수입 노예처럼 보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밀렌과 그의 누나가 그런 케이스였다. 둘은 3년을 넘게 불법 노예상을 따라다녔다.
「어쨌거나 불법적인 것을 숨기는 곳의 분위기가 꼭 이랬어.」
수어를 하는 밀렌의 눈동자는 사뭇 고요했다. 평소에는 대충 손 모양만 흩날리던 것과 달리 무게감 있는 손짓에 아르는 조용히 밀렌을 따르기로 했다.
그의 동물적인 감각은 때때로…… 아니, 수시로 잘 들어맞았으니까.
아르는 가만히 밀렌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붉은 눈동자가 가늘게 타올랐다. 형언할 수 없는 깊은 분노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심장을 찌르는 듯한 미약한 살기마저 느껴졌다.
아르는 그런 밀렌을 붙잡아 다급하게 말했다.
「여긴 노예를 숨긴 곳이 아닙니다.」
「……알아. 여긴 노예가 아니라 역병을 숨기고 있는 거겠지.」
찰나의 머뭇거림과 함께 밀렌이 대답했다.
그때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명의 기척이었다. 교대하러 오는 모양이었다. 아르가 나설 새도 없이 밀렌이 먼저 둘을 한꺼번에 뒤에서 공격했다.
가느다란 암기가 목 뒤에 꽂혀 있다. 피가 튀고 소란이 일 것도 없이 깔끔한 처리였다.
곧 밀렌은 그들의 옷을 벗겨 자신의 옷 위에 덧입었다. 비교적 가느다란 체형 덕에 입고 있던 옷을 벗는 수고는 없었다. 여러 겹 껴입은 것이 불편하긴 했지만.
아르는 남은 한 명의 옷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옷이 너무 크네요.」
「그럼 넌 여기 있어라. 아가야.」
아르가 또래보다 발육이 빠른 편이지 결코 덩치가 좋은 건 아니었다.
‘역시 성인 남성으로 위장하는 건 무리였나 보네?’
밀렌은 혼자 가지 말고 둘이 같이 가라며 끝까지 우기던 아멜리아 황태손의 얼굴을 떠올렸다. 만약 아멜리아가 그렇게 우기지 않았다면, 그래서 자신이 따라오지 않았다면, 이 꼬맹이 혼자서 고전했을 것 같다.
밀렌은 아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입 모양으로만 키득거렸다. 그러고는 곧 방금 자신이 제거한 후작가의 경비병 중 한 명의 걸음걸이를 몇 번 연습하더니 그대로 흉내 냈다.
그가 복도 가운데로 나서며 휘적휘적 걸어 나가자 멀리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5분이나 늦었잖아. 어서 뛰라고!”
곧 복도를 가로지르는 발소리가 타박타박 울렸다.
탁탁탁!
서두르는 척 달리던 밀렌은 경비병 둘의 가까이 다가갔을 때 등 뒤에 감추었던 단검 두 개를 꺼내 양손에 쥐었다.
쐐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복도에 휘파람처럼 지나갔다. 어둡고 긴 통로는 아까보다 훨씬 더 적막했고, 훨씬 더 묵직한 비린내가 났다. 쇠 비린내인지 피비린내인지 기분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르는 밀렌이 깔끔하게 처리해 놓은 곳으로 다가갔다.
“아까도 느꼈지만…… 넷 모두 평범한 경비병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응. 우리 같은 암살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야.”
밀렌이 발끝으로 엎드려 있는 시체를 뒤집었다. 칼이 지나간 목에서 꿀렁꿀렁 피가 쏟아졌고 그때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 부위가 펄떡댔다.
아르는 가만히 시체의 얼굴을 확인하다 표정을 굳혔다.
“아는 얼굴이냐?”
“예. 엔델포프에서 돌아오는 길에 저하를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도주한 자들 가운데 한 명입니다.”
“외부의 암살자를 고용하지 않고 가문에서 키운 암살자들을 이용했다……? 한 명이 죽었으니 타격이 컸겠군. 아니, 방금 죽은 애들까지 합쳐서 다섯 명인가?”
밀렌이 대수롭지 않다는 어조로 말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르가 바깥을 살피는 동안 그는 빠르게 테이블 위에 있던 것들을 챙겼다. 종이를 뭉쳐 놓은 것, 작은 병 안에 든 액체들, 가리지 않고 가방에 쓸어 담아 그것을 등에 멨다.
“가자. 막내야.”
***
“아아, 역시 이런 옷은 불편해.”
밀렌이 몸에 딱 맞는 연미복 소맷부리를 만지작거리며 어깨를 뒤틀었다. 그러고는 귀빈 휴게실의 테라스를 휙 넘었다.
아르와 밀렌은 마치 처음부터 파티장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홀로 들어갔다. 황제에게 오늘 임무의 결과를 보고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황제에게 직접 가는 대신 마론 백작에게 향했다.
“각하.”
백작은 자신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귀족들을 의식하며 아르와 밀렌을 향해 친근한 척 다가갔다.
“오오, 너희들이구나. 오랜만이다! 그간 잘 지냈느냐?”
“네! 각하께서도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백작 앞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하는 아르의 귀에 대고 밀렌이 속삭였다.
“난 가끔 네가 진짜 열네 살짜리 행동을 할 때 더 무서워.”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하자꾸나.”
마론 백작은 둘을 끌고 사람들이 없는 구석으로 향했다.
“보고해라.”
“연구 일지와 레시피로 추정되는 노트를 다량 가져왔습니다.”
“추정? 확실하지 않다는 말이냐?”
“내용이 전부 암호로 되어 있습니다. 문자를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보고는 밀렌이 주로 했고 아르는 가만히 서 있는 쪽이었다.
“자료는 나중에 레이하임을 통해서 받겠다.”
막 등을 돌려 떠나려던 백작을 아르가 불렀다.
“각하. 드릴 말씀이 더 있습니다.”
마론 백작이 말해 보라는 듯 몸을 부드럽게 앞으로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