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아! 그 변태 봤어요?”
“아…… 잊어버리고 계셨구나.”
나는 엘비어스의 목소리에서 미약한 살기를 느꼈다.
“하, 하, 하! 등은 좀 괜찮아요?
“안 괜찮습니다. 환자를 그렇게 부려 먹어 놓고. 잊어버리셨구나.”
엘비어스는 그렇게 뒤끝 있게 중얼거리며 목 스트레칭을 한 번 했다. 그러고는 옷깃과 소매를 빳빳하게 잡아당기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5분만 쉬다 나오십시오. 남작을 유인해 놓겠습니다.”
엘비어스가 나가고 리엘라는 내게 속닥속닥 말했다.
“몰딘 남작이 누군데요?”
나도 리엘라에게 속삭였다.
“그런 변태가 있어요. 이따가 직접 보세요.”
나는 엘비어스가 말한 5분이 지나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홀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엘비어스가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걸었고 리엘라는 멀찍이서 거리를 두고 로이드와 함께 뒤따라왔다.
나는 몰딘 남작이 나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등 뒤 방향에서 접근했다. 그리고 몰딘 남작과 엘비어스가 있는 곳까지 거리가 약 3m 남짓 남았을 무렵, 엘비어스가 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저하, 오셨습니까?”
그러자 몰딘 남작이 눈에 띄게 놀라며 뒤돌아 얼굴도 확인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저, 저하를 뵙습니다! 제국에 영광을!”
그는 자신 같은 하급 귀족이 황족에게 인사할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이 몹시 감격스러운 모양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몰딘 영지의 남작 작위를 가지고 있는 페레치아입니다.”
나는 남은 거리를 그대로 좁혀 몰딘 남작의 정수리가 자세히 보일 정도까지 가서 멈추었다. 그는 내 치마 끝단을 향한 시선을 서서히 위로 올렸다. 조금씩 눈치를 보며 고개를 드는 그의 머리 위에 나는 지나가듯 말을 뱉었다.
“우리 구면인 것 같은데?”
천천히 올라오던 변태 놈의 고개가 갑자기 홱 들렸다. 그리고 이내 그 입에서 멍청한 바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에…… 예?”
로즈벨리아 거리에서 횡포를 부리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 고작 말단 귀족 신분 하나에 천하를 쥔 것처럼 당당하던 얼굴이 또 신분 하나에 세상 비굴한 얼굴이 될 수도 있다니, 희극 같았다.
실소가 나왔다.
“난 그대가 기억나는데?”
몰딘 남작의 얼굴에 희미하게 그늘이 드리웠다.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이내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살며시 휘저었다.
“허허허! 저 같은 남작 나부랭이가 저하를 뵈었을 일이 어디에…….”
나는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왔다.
“그래서 나와 초면이다?”
“예. 그럼요. 그러합죠.”
몰딘 남작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귀부인이 그런 과장된 남작의 제스처에 흥미가 동한 것인지 우리의 대화하는 모양을 힐끔 곁눈질했다. 그녀가 칵테일을 마시는 척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고개를 돌리자 그녀와 대화를 나누던 귀부인들도 하나둘 우리를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황위 계승 서열 2위의 황태손과 말단 귀족이 무슨 접점이 있어 이리 길게 대화하는 것인지 몹시도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는 몰딘 남작을 향해 슬며시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로즈벨리아 거리에서 만난 적이 있지 않으냐?”
“모모모모,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 내가 그날 로즈벨리아에 볼일이 있어 조용히 외출했다가 시간이 애매해져 급하게 식사를 하고 환궁하던 길이었는데.”
우리를 힐끔거리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로즈벨리아에서 그날의 일을 목격한 귀족이 있는지 중간중간 아는 척하는 이야기가 섞여 웅성거렸다. 하긴, 그렇게 넓은 대로에서 그 소란을 피웠는데 본 적이 있는 사람이 기억을 못 하는 것도 이상할 거다.
“내 수행원이 그대 수행원의 팔을 못 쓰게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몰딘 남작이 땀을 뻘뻘 흘렸다.
“그으래? 내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네? 사과할까?”
사과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사과할까.
나는 다분히 놀리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남작은 그런 건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 것인지 땀만 뻘뻘 흘렸다.
“사과라니, 다다당치 아아않으십니다!”
그가 손사래를 쳤다.
나는 가장 가까이에서 속닥이는 귀부인에게 몸을 돌려 그녀 앞으로 걸어갔다.
“부인? 그날 부인도 그 자리에 계셨다고요? 그자가 자신을 몰딘 남작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난 그렇게 들었는데.”
그녀는 부채 뒤에서 당황한 눈빛으로 어색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음…….”
그렇게 뜸 들이는 모양은 마치 어느 줄에 설지, 그리고 어디까지 내 줄에 발을 걸치고 어느 만큼 안전장치를 놓아둘지 머리를 팽글팽글 굴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그녀가 결정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기억은 잘 나지는 않지만 몰딘 남작이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그녀는 적당히 한 발 빼면서 내게 붙었다.
남작에게 돈이 많아 봐야 남작가 재산이다. 그와 비즈니스적 관계로 사업이 걸려 있어 봐야 몇 건이지 전 재산이 걸린 건 아니다.
그러나 내 쪽에는 자신들의 작위와 그들이 귀족으로서 귀족답게 살도록 해주는 영지가 걸려 있다. 나는 미래의 황제였다.
저 멀리서 할바마마가 홀의 상석, 단상 위의 옥좌에 앉아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계셨다.
나는 그런 할바마마를 한번 의식적으로 쳐다본 후 놀란 듯 말했다.
“누군가 몰딘 남작을 사칭한 모양이네요. 감히 귀족을 사칭하고 황족의 몸에 손을 대려 하다니.”
멀리서 할바마마가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씰룩하는 것이 보였다. 로이드와 리엘라는 귓속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리엘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한편 몰딘 남작이 황급히 수습에 나섰다.
“아니, 괜찮습니다.”
“그자가 귀족을 사칭한 것이 괜찮다는 겁니까, 아니면 제 몸에 손을 대려 했다는 것이 괜찮다는 겁니까?”
나는 남작을 놀리듯 물었지만 남작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했다.
“그것이 아니라…….”
“저는 황족으로서 이 일을 그냥 넘길 수가 없습니다. 당장 할바마마께 아뢰어 사기꾼을 잡아들이겠어요. 그대들의 작위는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것이니 귀족을 사칭하는 것은 곧 황제를 능멸하는 것과 같은 일. 황실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몰딘 남작께서도 그대를 사칭한 사기꾼을 어서 잡아 명예를 회복하셔야겠지요?”
드디어 몇 달이나 벼르던 일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평소 같으면 그래도 드문드문 창문에 불이 들어와 있을 대저택 단지는 몹시 적막했다.
‘노블레스 타운’으로 불리는 귀족들의 저택 구역은 황도에서 가장 호화로운 동네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노블레스 타운 1번가’는 초고위 귀족들의 대저택 구역이었다.
담장과 담장 사이마다 커다란 마차 두 대가 너끈히 지나갈 만큼의 대로가 있었지만, 정작 길의 크기에 비해서 불빛은 희미했다.
어둠 속에서 유난히 붉은 두 눈만 반짝 빛났다.
체리에 후작 저택의 높은 담장 위에서 밀렌과 아르는 저택의 경비병이 한 차례 순찰을 돌고 떠나가길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푸른 램프가 흔들흔들, 그들이 딛고 올라선 담장 아래를 지나고 곧 멀리 사라졌다. 가까운 나뭇가지로 점프하며 밀렌이 물었다.
“그런데 넌 엔델포프에서 그걸 어떻게 발견했냐?”
“우연입니다.”
“알고 따라갔던 거 아니고? 그 남자 이름이 리만이라는 것도, 신흥 사이비 교주라는 것도,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이 아는 거 아니야?”
밀렌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아르는 인상을 찡그렸다. 아멜리아의 명령이 머릿속에서 골치 아프게 울렸다.
“혼자 가는 건 허락하지 않는다. 둘이 같이 다녀와!”
황제도 그렇고 황태손도 그렇고 아주 자기들 멋대로지.
‘난 혼자서 하는 게 더 편한데.’
아르는 밀렌의 옆으로 훌쩍 뛰어 넘어왔다.
“우연이라고 했습니다.”
목소리에 정색을 꾸역꾸역 눌러 담아 말했지만 밀렌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놀리듯 키득거렸다.
“그으래? 우연도 기가 막히네?”
더 대꾸해 봤자 짜증만 늘 것이 뻔했으므로 아르는 그냥 입을 다물고는 아래로 착지했다. 가느다란 바람 소리가 나무를 타고 내려와 바닥에 닿았다.
주인이 외출하고 고용인들만 남은 집은 몹시도 서늘했다. 평소라면 각이 꽉 잡혀 있을 경비병들의 분위기가 오늘은 느슨했다.
황후의 생일 파티는 꽤 괜찮은 기회였다. 이렇게 후작가가 한산할 일은 오늘 같은 날이 아니라면 없을 터였다.
“황후의 궁에 비밀리에 출입했던 그자가 엔델포프에서 사이비 교주 행세를 한다……? 후작 저택 안에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게 네 추측이고.”
“예.”
“그럼 다녀와. 어차피 그 집구석 한번 털어 보긴 해야 했으니. 게다가 민티아의 데뷔까지 겹쳐 잘되었지. 체리에의 모든 신경이 오늘 황후의 생일 파티로 쏠릴 터이니. 집을 털기에 꽤 좋은 날이 아니더냐?”
황제가 말했었다.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덧붙였지.
“밀렌, 다녀와라.”
“엥? 저 혼자요?”
밀렌은 혼자 다녀오라는 말에 황제에게 건방지게 반문했고 아르는 움찔 놀라다 침을 삼켰다.
“네게 파티 잠입 임무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느냐? 그날 황궁 파티장 경호를 하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가장 잘하는 도둑질이라도 하고 와야지.”
“아이, 폐하. 도둑질이라뇨? 첩보라고 해주시면 더 잘할 수 있는데. 헤헤!”
밀렌이 헤실헤실 눈웃음을 치자 황제가 칼같이 잘라 냈다.
“정보 도둑질.”
“칫! 일할 맛 더럽게 안 나게 하시네요. 존명.”
밀렌은 입을 삐죽 내밀면서 경례했다. 그럴 거면 ‘존명’을 왜 붙이는지 아르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저 선배는 존명이라는 뜻을 알고 붙이고 있는 걸까?
아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