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70화 (70/148)

70화

나는 가만히 로이드를 올려다보았다.

“한 곡 할까요? 별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우리는 혼담이 오가는 사이니까요. 이런 자리에서 크로이젠 공작가와 친분을 과시하는 건 저하께도, 공작가에도 꽤 의미 있는 일이죠. 그러니 우리의 사이가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는 여러 면에서 중요하답니다.”

“…….”

“저하께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나요? 가끔 저하께서는 몹시도 어른스러운 면이 있으셔서. 자꾸만 어려운 말을 하게 되네요.”

알아는 들었지만 전부 알아들은 척을 할 수 없다. 이따금 내가 사실은 아홉 살이라는 것이 자꾸만 떠올라 어떻게 처신할지 갈피를 잡기도 힘들었다.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 자존심이 상한 척 토라진 얼굴을 했다.

“……지나치게 어린애 취급 하지 말아요.”

“이런, 죄송합니다.”

로이드는 그런 나를 귀엽다는 듯 쳐다보더니 이제 막 시작된 부드러운 무곡에 맞추어 나를 홀 가운데로 이끌었다.

그렇게 나는 로이드와 한 번, 할바마마와 한 번, 그리고 엘비어스와도 한 번 춤을 추었다. 마지막으로 외사촌인 루디안 오라버니와 홀을 돌았을 때는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나저나 안 보이네.’

아르는 섀도 나이트에서 파티장 내부 경호를 맡았다고 했다. 이미 한참 전에 레이하임도 찾았고 아마 귀빈들 틈에 섞여 순찰하는 몇몇이 더 있을 텐데, 유독 아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밀렌도 없었다.

나는 물을 마시러 가는 척하며 레이하임 근처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레이하임 경? 오늘은 근무가 아닌가 보군요. 여기 계셨네요?”

“저하를 뵙습니다.”

“저번에 봤던 두 분은 오늘 근무 중인가요?”

“기사들의 근무 일정은 황궁 보안과 관련한 일입니다. 그런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알겠어요.”

적어도 어딘가에 일하러 나갔다는 사실은 잘 알았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레이하임이 막 물러나려던 찰나 나는 그를 다시 붙잡았다.

“잠시만…… 레이하임 경, 부탁이 있어요.”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마리가 이야기해 준 인상착의와 비슷한 남성을 한 번 힐끗 보며 물었다.

“저 사람을 아나요? 진하고 탁한 금발에 키 크고. 외무대신과 함께 있는 귀빈.”

“라파트니 대공국의 대공 전하 말입니까?”

저 사람이 라파트니 대공이라고?

지난 삶에서도 이번 삶에서도 대공에 대한 기억은 그다지 없다. 대공국의 사신이 방문하는 것은 여러 번 보았지만, 내 기억 속에서 대공이 직접 제국에 방문한 적은 없었다.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이때는 대공이 왔었구나…….’

오래전의 일인 데다 내게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던 일이라 기억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이런 일을 기억할 수 있을 만한 때가 되고 다시 대공이 제국에 방문했을 때, 난 냉궁에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그 당시에도 왔다는 말만 들었을 뿐.

대공을 쳐다보는 내 눈앞으로 레이하임이 손을 휘적휘적 흔들었다.

“저하? 그래서 제게 하실 말씀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대공을 뒷조사해 줄 수 있나요?”

레이하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귀족의 뒷조사라니 상식적으로 그런 일은 일반적인 기사에게 시킬 만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임페리얼 섀도 나이트는 엄밀히 따지면 황실의 기사단도 아니다. 황제의 개인 암살자 겸 첩보원 같은 존재였다.

레이하임은 잠시 신중하게 내게 할 말을 고르다가 모호하게 답했다.

“……무슨 뜻이신지 정확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대공이 만나는 여자를 뒷조사해 줘요. 대공이 제국에서 어느 귀부인과 만나고 있다고 하던데, 이십몇 년 전부터.”

레이하임과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의 표정이 말하는 바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황당함이었다. 대놓고 얼굴에 쓰인 그 말의 의미는 ‘아홉 살 맞아?’였다.

아주 잠깐의 고요함이 스치고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방금 저하께서 제게 무엇을 시키신 건지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제가, 아니 왜 하필 접니까?”

“알고 있어요. 그리고 전 그대가 이 일에 가장 적합하다 판단했는데. 제가 잘못 생각한 건가요?”

“부탁이라고 하셨지요? 제가 거절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레이하임이 에둘러 거절 의사를 밝혔다.

“내게 그대의 기사단에 명령할 권한이 없다는 걸 나도 알고 있으니, 경에게 명령할 권한이 있는 분을 움직이겠지요. 지금 거절하겠다면 자세한 건 그분께서 그대에게 명령할 때 듣도록 하세요.”

레이하임은 이 분야의 전문가다. 황족과 귀족과 이제는 타국에 더 가까운 대공국의 뒤를 캐내는 데에는 황제 직속의 첩보 암살단만큼 실력 있는 집단이 없다.

잠시 고민하던 레이하임은 내게 손을 내밀고 허리를 숙였다.

“한 곡 하시겠습니까, 저하.”

부드럽고 깔끔한 동작이었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으니 어색하게 서서 이야기하지 말고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대화를 나누자는 의미였다.

나는 그가 내민 손 위에 살포시 내 손바닥을 얹었다. 그가 일어서 나를 홀 가운데로 에스코트했다. 키 차이가 어마어마해서 내가 레이하임의 허리에 매달린 모양이 되어 버렸는데 그래도 가볍게 대화를 나누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래서 제 부탁은 들어줄 건가요?”

“가볍게 알아는 보겠습니다. 그런데 왜 처음부터 제게 명령하실 분을 움직이지 따로 제게 명령도 아닌 부탁을 하시는 겁니까? 그분을 곧바로 움직이기엔 힘든 이유라도 있던 겁니까?”

레이하임은 조금 돌려 말하는 듯하면서도 핵심적인 부분은 확실하게 물어 왔다.

나는 똑같이 돌려 이야기할까 고민하다 그냥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할바마마께서는 움직이지 않으실 것 같고…….”

레이하임은 그런 나의 화법이 의외인 듯 나와 맞잡은 손을 움찔했다.

하지만 내게는 확신이 있었다. 그가 할바마마께 오늘 일을 함부로 고하지는 못할 거라는 확신.

그가 모시는 황제는 황후의 배우자이자 볼테르의 아버지이지만, 내 할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러니 내가 황태손의 지위를 유지하는 동안 이 비밀은 안전하다.

적어도 그가 오늘 나와의 일을 없던 것으로 묻어 버리고 황제께 고하지 않았다고 할바마마의 미움을 살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나 오늘 일을 할바마마께 고해바치거나 내 부탁을 아주 무시해 버린다면 언제 황제가 될지 모를 나와 척을 지게 될 수도 있다.

“그럼 제게 명령할 수 있는 분이 또 계십니까?”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에오넬 고모님이 황제가 되신다면 그때는 이런 일로 경을 충분히 움직일 수 있거든요. 하지만 그때는 경이 더 골치 아파질걸요?”

이번에 레이하임은 처음 손을 움찔거렸을 때와는 달리 차분했다. 완벽한 포커페이스였다.

“조만간 제가 모은 증거들을 정리해 경에게 보내 줄게요.”

“이번처럼 직접 만나기는 힘들 겁니다.”

“직접 만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전에 말했던 붉은 눈의 기사님을 아무 때나 밤에 내 방으로 보내요.”

“알겠습니다. 다만 이 일이 황제 폐하께 해가 되는 일이라 판단되면 전 무슨 일이 되었든 폐하께 모든 사실을 고할 겁니다.”

“그럼요.”

곡의 마지막 한 마디, 우아하게 턴을 마친 나는 레이하임과 고갯짓으로 가볍게 맞절을 한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뒤돌았다. 그리고 곧바로 내게 춤을 신청해 온 이름 모를 어느 귀족 영식의 손에 내 손을 올렸다.

사람들이 나와 레이하임을 번갈아 보며 수군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레이하임이 누군지 아는 귀족은 없다. 그런 그가 황태손과 춤을 추었으니, 나와 무슨 관계인가 속닥이는 사람이 생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 수군거림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내게 들어오는 얼굴도 가문도 모르는 이들의 춤 신청이란 춤 신청은 죄다 받아들였다. 그 덕분에 레이하임에게 쏠리던 관심은 ‘그냥 우연히 춤을 신청했는데 내가 받아 준 거겠거니.’ 하며 자연스럽게 희석되었다.

그러다 보니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겼는데…….

‘개나 소나 죄다 춤추자고 난리네.’

팔다리가 후들거릴 즈음,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눈치 빠른 로이드에게 눈빛으로 구조신호를 날렸다. 곧 로이드는 이 신호를 기가 막히게 알아듣고는 그 한 곡이 끝나자마자 내게 달려와 말을 걸었다. 그러고는 간이 휴게 공간으로 꾸며진 작은 테라스로 데려왔다.

대연회장의 메인홀 옆면을 따라 돌기처럼 밖으로 돌출된 무수히 많은 테라스 가운데 어디 즈음이었다. 실내라고 하기도 야외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테라스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테라스에는 엘비어스와 리엘라가 먼저 와서 쉬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엘비어스는 앉아 있던 고동색 원목 등받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내가 그 의자 위에 털썩 쓰러지듯 앉자 엘비어스가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서며 물었다.

“저하, 잠시 쉬었다가 또 할 일이 있다는 건 기억하고 계시죠?”

“뭘요?”

“몰딘 남작이요. 저하의 계획을 검토해 봤는데요. 마음대로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조용히 처리할 수는 없겠지만 목적을 달성하기엔 빠른 방법이긴 합니다.”

엘비어스의 말을 듣고 나는 내가 엘비어스에게 계획을 검토해 달라 말해 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와, 나 오늘 할 거 엄청 많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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