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69화 (69/148)

69화

메리는 떨리는 손을 간신히 억누르고 다음 글자를 이었다.

「볼테르 황자 전하의 탄신일은 7월 말입니다.」

“숙부의 생신은 나도 알고 있어.”

「황제 폐하께서는 그 전, 9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한 달 보름 정도 황궁을 비우셨습니다. 그 직후 황후마마께서 달거리를 한 번 하셨고요.」

아멜리아보다 유모의 눈이 먼저 커졌다. 유모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겨우 이런 것을 가지고 평범한 귀부인도 아니고 황후를 모함하기에는 너무 위험합니다. 이미 그 당시에도 이 일로 몇몇 귀족들이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어요. 그러나 황제 폐하께서는 황실을 함부로 모독하지 말라 하시며 크게 노하셨습니다. 그랬던 일을 다시 들추겠다니요.”

맞는 말이었다. 황후의 공식적인 임신 기간은 황제가 환궁했던 11월부터 7월, 조산이긴 하지만 크게 문제 삼기에는 다소 애매한 감이 있다. 자칫 잘못하다간 황족의 핏줄을 의심했다며 황족 모독죄로 누군가를 단두대에 세워야 한다.

아멜리아는 잠시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았다. 이런 위험을 감수해서 얻을 이익이 클 것인가. 과연 이것을 다시 문제 삼을 경우 돌아오는 리스크는 얼마나 클 것인가. 또한…… 그 리스크는 과연 누가 책임지게 될 것인가.

아멜리아는 앞으로 나서는 유모를 한쪽 팔로 제지하며 메리에게 말했다.

“일단 들어는 봐야겠어. 계속 써.”

황태손의 허락이 떨어지자 메리는 조금 더 반듯해진 글씨체로 말을 이어 나갔다. 떨림이 줄어든 글씨는 아까보다 약간 보기 편해졌다.

「제가 황후궁 옷감 창고에서 그걸 목격했을 때가 10월입니다. 요맘때 즈음, 황후 폐하의 생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이요.」

“일단 그 남자가 누군지 알아야겠어. 아마 귀족 중 누군가겠지. 그 비단을 구할 만한 재력을 가진 귀족들 위주로 조사해서 인상착의를 대조해 보면 범위가 좁혀지겠어.”

아멜리아가 이야기를 마치려 할 때 메리가 다급하게 아멜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손가락 없는 손바닥이 손목을 스쳤다.

「그리고 빨래터 하녀들의 소문도 있었는데.」

빨래터 하녀들의 소문?

주제와는 살짝 다른 뜬금없는 이야기에 아멜리아와 유모가 동시에 메리를 쳐다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황후 폐하께서는 황제 폐하께서 환궁하기 바로 전의 달거리를 이미 거르셨다고…….」

“그 하녀들은? 아니, 황후의 속옷을 빨래하는 하녀는 어떻게 되었느냐?”

「모릅니다.」

“모른다고? 황후의 옷방과 빨래방은 네 담당이 아니었더냐?”

「어느 날 갑자기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그 하녀의 사표를 시녀장님이 직접 처리했다고…….」

겨우 빨래방 하녀의 사표 따위를 시녀장이 직접 처리한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때는 메리, 아니 마리도 시녀 일이 처음이라 그것이 그리 이상한 일인 줄 몰랐다. 그래서 그 하녀의 일은 기억 저편에 던져 두고 망각해 버렸다.

그러나 그 남자의 얼굴을 보았을 때, 비로소 스물 몇 년이나 지난 일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굵직한 사건 사이에 자잘하게 묻혀 있던 것들이 무의식에서 의식의 세계로 떠오르자 퍼즐이 촘촘하게 맞추어지기 시작했다.

그저 황태손에게 자신의 작은 의혹만 전달하고 간략하게 설명하려던 것이 어느새 구체화되어 또렷한 형상을 띠게 되었다.

곧 아멜리아가 결정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이번 황후의 탄신 연회에서 그 남자를 찾아야겠다.”

***

황궁 교향악단의 아름다운 연주가 대연회장인 그랜드홀을 가득 메웠다.

홀 안에는 이미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저마다 인사말을 나누며 오늘 파티의 첫 순서인 데뷔 무대에 대해 무난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잡힐 무렵, 드디어 데뷔 무대가 시작되고 데뷔를 치를 귀족 자제들이 호명되었다.

가장 처음 호명된 이는 민티아였다. 그녀는 이번 사교계 데뷔를 치르는 귀족 가문 자제 가운데 가장 신분이 높았다. 아니, ‘가장’이라는 말로는 감히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그녀의 가문은 높은 작위와 압도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진짜 밀어붙이다니 독하네.’

나는 황족들이 앉은 높은 곳의 의자에 가만히 앉아 할바마마의 축사를 들으며 이벤트의 주인공인 아이들이 홀 중앙에 동그랗게 모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마다 데뷔 무대의 오프닝 왈츠를 함께할 파트너와 짝을 이루어 선 모습이 귀엽고 깜찍하기까지 하다.

그러다 나는 민티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살짝 발그레한 눈가는 어딘지 울었던 흔적이 있었다.

‘싫었는데 억지로 내보냈구나.’

알 것 같았다. 나 같아도 아무리 급한들 이런 초라한 데뷔 무대는 사양이다. 그렇다 보니 함께 데뷔하는 영식 중 민티아와 데뷔 무대의 파트너를 하기에 적합한 신분을 가진 이도 없다. 정말 아무나와 파트너가 된 티도 역력했다.

‘고모님께서 작정하고 깽판을 놓으셨군.’

황후의 얼굴은 어떤가 힐끗 돌아보자 억지로 지어내는 싸늘한 미소가 소름 돋는다. 반면에 고모님의 얼굴은 오늘의 파티가 몹시 기대된다는 듯 그 미소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데 대체 이렇게까지 데뷔를 간소화하였는데도 굳이 민티아를 내보낸 이유가 뭘까. 도대체 3개월 안에 사교계에서 뭘 얼마나 하려고?’

나는 내 사람 중 이미 사교계에 데뷔해 자리를 잡아 가는 귀족 영애 목록을 추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녀밖에 없군.’

벨과 제니를 이용해 민티아가, 아니 후작가가 무슨 짓을 꾸미려는 것인지 감시하게 할까? 그 전에 그런 짓을 하면 벨과 제니는 과연 안전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왈츠가 끝이 났다. 간소화한 데뷔 무대의 춤은 고작 한 곡으로 끝나 버렸다. 신년회의 데뷔는 가장 기본적인 왈츠를 시작으로 파트너를 바꿔 가며, 무곡을 종류별로 세 곡 정도 추는 것에 비하면 몹시 빠른 종결이었다.

아이들이 저마다 부모님의 곁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동안 민티아는 홀 가운데에 남아 치맛자락을 잔뜩 움켜쥐고는 황후인 제 고모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쳐다보던 그녀는 휙 돌아서는 커튼이 쳐진 테라스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 황후의 진짜 생일 파티가 시작되었다. 여러 귀족과 외국의 사신들이 보내온 선물이 홀의 한쪽에 산더미처럼 쌓였다. 나 역시 황후를 위해 손수 준비한 선물을 선보였다.

“오오, 세이렌 시리즈가 저기에……!”

누군가 알아보고는 감탄을 내뱉었다. 내가 입찰하기 전까지 세이렌의 시리즈는 아주아주 유명한 공방에서 나왔을 뿐인 보석 세공품 중 하나였다.

그러나 내가 50골드에 낙찰해 버리는 바람에 무명의 액세서리는 유명세를 타고 말았다.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이었다.

사람들은 50골드라는 그럴듯한 포장을 이슈로 내세워서 사실은 내가 황후에게 치욕적인 선물을 했다는 사실을 두고두고 안줏거리로 곱씹을 거다. 그렇게 한동안은 사교계에서 입방아에 오르내리겠지.

경매장의 지배인이 저 액세서리를 내가 샀다는 사실은 철저히 숨겨 주었지만, 수많은 입찰자가 보았던 50골드 낙찰의 순간에 대한 소문만큼은 나도 그도 어찌할 수 없었다.

“저게 엔델포프에서 50골드에 낙찰되었다던 그 액세서리?”

“그게 황태손께서 낙찰받으셨던 것이었어?”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50골드란 귀족들에게 이리 수군거릴 만큼 막대한 돈은 아니지만, 세이렌이라는 전설이 가지는 의미가 이 선물을 가격과는 별개로 특별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실제 가치보다 부풀려진 경매가에 낙찰된 이 아름다운 세공품을 이야기하면서 속으로는 한참 어린 황태손에게 남의 자리 탐내지 말라는 소리를 들은 황후를 비웃을 터였다.

나는 보석에 아무 의미도 담지 않았던 것처럼 그저 그 전설이 가지는 의미가 우연이었던 것처럼 무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축하드려요, 할마마마.”

이번에는 과연 어떤 라벤더였을까 궁금하셨죠?

그러나 황후의 표정은 이미 내 선물을 예상했던 것처럼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고마워요. 예쁘네요.”

하긴, 엔델포프에서 마부까지 바꿔치기해서 나를 죽이려 했었는데. 그 시기에 그 도시에서 50골드에 세이렌을 낙찰한 소문의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은 이미 충분히 예상했었을 거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생일 선물이 될 거라는 것 역시도.

황후가 은은하게 웃으며 세이렌의 시리즈를 눈으로 훑고는 케이스 뚜껑을 탁- 닫았다.

“이런 건 저 같은 늙은이보다는 황태손같이 어여쁜 숙녀에게 더 어울리겠어요.”

예상대로 황후가 생일 선물을 곱게 받아 주지 않고 기어이 한마디 받아치자 고모님이 끼어들었다.

“어마마마, 늙어서 어울리지 않을 거라뇨? 그리 말씀하시면 어마마마를 생각하며 멀리서 이걸 구해 온 멜리가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황후와 고모님께서 한마디씩 공방을 주고받는 사이에 나는 쏙 빠져서 계단을 내려가 홀로 나왔다.

그러는 동안 여전히 저 계단 위에선 황후가 사람들의 선물을 차례대로 받으며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았다. 지루하고 힘들어 보였다.

그와 별개로 그녀가 휘황찬란한 선물 더미에 파묻혀 포장지를 뜯는 장면을 쳐다보는 건 배알이 뒤틀렸다.

내가 막 마지막 계단을 내려섰을 때, 로이드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내게 오늘의 첫 춤을 신청하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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