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때 독에 당하기라도 한 걸까. 암살자들은 무기에 독을 바르기도 한다던데.
그러나 그런 건 아닌 듯 로이드가 고개를 슬슬 저었다.
“아뇨. 여기 오자마자 긴장이 풀린 탓인지 갑자기 열이 나더라고요. 의원도 하인도 다 싫다고 하는데 저렇게 열이 펄펄 끓는 애를 어떻게 혼자 놔둬요. 그래서 제가 봐주고 있거든요.”
“아, 그랬구나.”
그런데 의원도 하인도 싫다는 놈이 크로이젠의 작은 공자님은 괜찮았던 걸까?
잠깐 의문이 들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대충 이해는 갔다. 나 같아도 저 녀석이 의원도 간병인도 다 필요 없다고 물려 버리면 이러지 않았을까. 차라리 묶어 놓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간호하는 편이 맘이 놓일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로이드가 줬던 따뜻한 물을 모두 마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자러 가야겠어요.”
그러고는 아르가 있는 방문을 힐끗 쳐다보았다. 굳게 닫힌 문이 어쩐지 멀게만 느껴졌다.
사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들어가서 괜찮은지 얼마나 열이 심한 건지 확인하고 싶은데, 남의 방에서 나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괜찮겠죠?”
“걱정하지 마세요. 아침에 황궁에서 저하를 모시러 호위기사들과 시녀들이 나올 겁니다. 그때 환궁하세요.”
“아르는요?”
“저렇게 아픈데 출근을 어떻게 해요. 병가 쓰라고 했어요.”
나는 어느새 로이드에게 자연스럽게 에스코트 받은 상태로 내가 아까 자다 깼던 방으로 돌아왔다. 하녀는 소파 위에서 여전히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로이드가 돌아가고 나는 침대에서 뒤척이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다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아침 일찍 공작저의 식당에서 공작과 로이드와 함께 간단하게 에그 베네딕트를 먹었다. 공작 부인은 보지 못했는데 하녀들 말로는 “도련님이 걱정되셨나 봐요.” 하는 것으로 보아 밤새 엘비어스 걱정에 잠을 못 이룬 모양이었다.
어쨌든 크로이젠 공작이 아침 대전 회의에 참석하러 황궁으로 나가자마자 나는 로이드와 함께 크로이젠 공작 저택 곳곳을 구경했다.
그리고 저녁 무렵 고모님이 직접 나를 데리러 나오셨다.
“고모!”
나는 고모님 품에 폭 안겼다. 고모님께서는 아무 말 없이 나를 한번 토닥이고는 부드럽게 옆으로 떼어 놓았다. 곧 마중을 나온 공작 부인과 로이드가 예를 갖추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제국에 영광을.”
“오랜만이에요. 공작 부인, 그리고 로이드 공자. 내 조카가 신세를 졌군요.”
“신세라니 당치 않습니다. 저하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간단하게 인사만 주고받은 우리는 곧장 만찬장으로 향했다.
대외적으로 고모님은 오늘 나를 데리고 크로이젠 공작 저택에 방문해 로이드와 공작 부인과 식사를 하면서 앞으로 있을 우리의 약혼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으로 입을 맞추기로 했다.
황실 문양이 박힌 4두 마차를 타고 호위 기사를 여섯이나 이끌고 왔는데 얼굴만 비추고 가는 건 이상할 테니까.
나는 사실 공식적으로는 외출이 아니지 않았던가. 아니, 내 외출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잠행이라 우기면 그만이다. 할바마마의 허락도 있었던 것이니까.
그러나 엘비어스 쪽이 문제였다. 그가 대동한 호위들은 공작가의 정식 기사단 소속이 아니었다. 오히려 엘비어스의 경우 들켰다가는 공작가에서 신고하지 않은 불법 사병을 육성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정적들에 의해서 반역으로 몰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엘비어스와 단둘이 사설 마차 대여 업체를 이용해 마차를 빌려서 용병을 고용해서, 황후 생일 선물을 사러 엔델포프까지 갔다가, 관광까지 하고 왔다고 둘러대는 건 더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고작 생일 선물 하나 사려고 저 짓을 했다고 하면 누가 믿겠어? 엔델포프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눈치 빠른 황후는 리만의 소재지가 황제에게 들켰다는 사실을 깨달을 거다.
만찬을 들면서 고모님은 공작 부인과 이번 사건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쨌든 황태손 암살 미수 사건은 있는데 증인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군요.”
엘비어스가 대동한 호위들의 신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고모님이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황태녀 전하. 혹…… 범인으로 추정되는 이가 있을까요?”
“어마마마겠죠. 증거는 없습니다. 100% 심증이어요.”
포크를 쥔 공작 부인의 손등에 하얗게 뼈 모양이 도드라졌다.
“내 아들이…… 죽을 뻔했어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로이드가 하얗게 질린 공작 부인의 옆구리를 살며시 찔렀다. 그러고는 식사 시중을 드는 시종을 불렀다.
“흠흠! 슬슬 다음 메뉴를 내오게.”
그러자 공작 부인이 얼른 정신을 차리곤 말했다.
“송구합니다. 전하. 저하께서도 위험하셨는데…….”
“그 이야기는 아바마마께서 공작님과 이야기 마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 사건 그냥 묻어 버리기로요. 멜리와 공자가 죽을 뻔했다고 해도 우리에게 불리한 일들이 많다는 건 부인께서도 아실 겁니다.”
크로이젠 공작가의 사병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게다가 황제와 공작이 이미 합의가 끝났다는데 공작 부인이 여기서 말을 더 보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 역시 섭섭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공작 부인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 폐하께서 그렇게 하기로 하셨다니 알겠습니다.”
고모님은 그런 공작 부인을 한번 쓱 쳐다보곤 입에 넣고 씹던 고기를 삼킨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입니다만 공작 부인. 아바마마께서는 이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려서 범인을 잡아 황태손을 시해하려 한 범인의 사지를 찢어 놓겠다고 난리를 치셨습니다. 만약 아바마마께서 공식적으로 난리를 치셨다면 제가 나서서 묻어 버릴 생각이었습니다만…….”
공작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모님은 여유롭게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이어 말했다.
“다행히도 공작께서 그런 아바마마를 저 대신 진정시켜 주었다니 참으로 다행인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공작가에서도 앞으로 그림자 사병은 좀 더 신중히 움직이시길…….”
공작 후계자가 크게 다쳤으니 공작도 당연히 노발대발할 줄 알았는데 굉장히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하는 모양이었다.
***
메리는 아멜리아 황태손의 드레스룸에서 하루의 마지막 일과를 시작했다. 보송하게 마른 속옷을 예쁘게 개서 정리하고 저녁 날씨에 맞는 적절한 잠옷을 꺼내어 침실 문 옆의 테이블 위에 곱게 올려 두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깨에 리본을 묶었다. 리본을 묶기 시작한 지는 이틀이 지났다.
“내 잠옷 어깨끈에 이 리본을 묶어.”
그렇게 암호를 정했었는데 황태손은 그새 잊어버린 것일까. 메리는 애가 탔다. 초조한 마음으로 잠옷에 리본을 묶어 두고 하인 하녀의 전용 복도인 뒷길 복도 쪽 문을 열었다.
그때 등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멜리아 황태손의 침실 쪽 문이 조심스레 열리면서 유모와 황태손이 들어왔다.
아직 이른 저녁이었다. 잠옷으로 갈아입을 시간이 아니었다. 예고 없는 인기척에 화들짝 놀란 메리는 잡았던 문고리를 놓고 뒤돌아 급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 상태로 고개만 아주 살짝 들어 정면을 보았다.
아멜리아 황태손이 잠옷을 들고 메리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한 손으로는 잠옷을 대충 쥐고 다른 손으로는 어깨끈에 묶인 푸른 리본을 손끝으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할 말이 있느냐?”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어린아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이라고는 믿기 힘든 기운이 담겨 있었다. 날카롭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묵직하지도 않았다.
마치 끝이 뭉툭한 칼로 어깨를 지그시 누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메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멜리아가 옆에 서 있던 유모를 돌아보며 말했다.
“유모, 펜과 종이 좀.”
“예, 저하.”
메리 앞으로 빠르게 펜과 잉크, 종이가 대령되었다. 메리는 천천히 펜촉에 잉크를 찍어 아직 익숙하지 않은 왼손으로 최대한 또박또박 글자를 썼다.
「23~4년 전쯤, 막 키옌 황후 마마께서 입궁하셨을 때…….」
한참을 적어 내리는 글자를 천천히 읽은 아멜리아 황태손이 종이를 내려놓고 메리를 직시했다.
“그 남자가 누군지는 아나?”
「아뇨.」
“그때와 같은 여자야?”
「모릅니다.」
“두 번 다 여자 쪽은 보지 못했다?”
「예.」
메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멜리아를 올려다보았다. 앙다문 입술에는 기필코 황후에게 복수하고야 말겠다는 깊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아멜리아는 잠시 차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황후의 ‘궁’ 안에서 발생했던 불미스러운 사건일 뿐, 황후의 흠이 아니었다.
“이 일이 황후와 무슨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 보고 들은 사실이 아니라 개인적인 의견이나 추측이라도 좋아. 그저 직감에 의한 추측이라면 내가 정확히 다시 알아보면 되니까.”
아멜리아는 메리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두 여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 진득하게 깃펜 위로 떨어졌다. 펜을 잡은 여인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볼테르 황자가 팔삭둥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음.”
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의 이야기는 어지간하면 잘 꺼내지 않는다. 평민들은 약하게 태어난 조산아의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면 부정이 타서 아이가 쉽게 병에 걸린다고 믿었다.
귀족들의 경우에는 아이의 출생을 의심하는 날 선 무리에게 공격을 받기 쉽다. 그런 이야기가 더구나 황실의 핏줄, 제2황자의 이야기라면…… 입을 조심해야 했다.
어느새 아멜리아와 메리의 옆에서 유모가 양초를 놓고 대화를 마친 종이를 태우고 있었다. 도자기 그릇 위로 검은 재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