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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67화 (67/148)

67화

중간에 말이 지치면 바꿔 타고 달리기도 했으나 쉬는 법은 없었다. 그렇게 쉬지 않고 달려 크로이젠 공작저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 녹초가 되어 있었다.

놀란 공작 부인은 실내복 차림으로 뛰쳐나왔고 소식을 전하러 황궁에 사람을 보냈다.

나는 공작 부인이 마련해 준 가장 좋은 손님방에서 하녀들의 목욕 시중을 받고 푹신한 침대에 누웠다. 그제야 모든 긴장이 마치 줄 끊어진 현악기처럼 탁 풀렸다. 그렇게 머리를 침대에 가져다 대자마자 까무룩 정신을 놓아 버렸다.

그렇게 얼마나 정신없이 잤던 걸까, 눈을 뜨자 이미 빛 한 점 없이 캄캄했다.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베개에 얼굴을 한참 비볐다. 이불을 끌어모아 또르르 몸에 말자 인세의 행복이 밀려들었다.

‘아아, 이대로 다시 잠들고 싶다.’

하지만 저녁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드는 바람에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입안이 바짝 말라 있었다.

‘물만 마시고 잘까?’

나는 무겁게 쳐진 몸을 일으켜 침대에 멍하니 앉았다.

“물…….”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금씩 어둠에 적응한 눈으로 방 안의 풍경이 들어왔다. 침대와 책상, 그리고 소파와 테이블만 있는 아주 깔끔한 방이었다.

소파 위에는 메이드복을 입은 하녀가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소파 앞 테이블에는 뚜껑이 덮인 수프 그릇과 은수저가 쟁반 위에 곱게 놓여 있었다.

나는 수프라도 먹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 소파 근처로 다가갔다. 그러나 이미 그릇이 차게 식어 있었다. 하녀를 깨워 데워 달라고 할까?

그렇게 생각하고 쳐다본 하녀는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침을 흘리며 자고 있었다. 내가 움직이는 소리를 내자 그녀는 뒤척거리다가 소매로 침을 쓱 닦았다.

“츄웁! 흠냐.”

너무 곤히 자는 것 같아서 깨우기 미안할 정도였다. 수프는 됐다 치더라도 아르는 대체 어느 방에 있는지만이라도 묻고 싶었다. 그러나 고작 그거 물어보자고 깨우자니 그것도 또 무안하다.

하여, 나는 일단 직접 나가서 찾아보기로 마음먹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거대한 문은 힘을 조금 주어 밀자 묵직하고 부드럽게 열렸다.

스륵!

복도에 사람이 더 없나 살폈으나 아무도 없는 손님방 복도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비싼 야광석이 천장에 중간중간 박혀 있어 희미하게 주변을 비추었다. 나는 방을 나와 문을 다시 스르륵 닫았다.

달칵!

방문에는 귀빈실이라고 새겨진 금속판이 우아하게 박혀 있었다. 그런 방이 옆에도 넓은 간격으로 몇 개 있었는데 나는 그 방을 하나하나 열어 보았다. 모두 빈방이었다.

그렇게 빈방 여러 개를 지나자 그 층의 로비가 나왔다. 로비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그림이 한 점 걸려 있었는데, 전대 크로이젠 공작을 중심으로 크로이젠 공작가의 사람들을 그린 군상화였다.

지금은 분가해서 나간 현 크로이젠 공작의 형제들과 그들의 아들들까지. 딸이라곤 하나도 없는 정말이지 아들 부잣집의 표본이었다. 군상화 속 여인들은 모두 크로이젠 공작 부인과 크로이젠 가문의 며느리들이었다.

‘이 집은 정말이지, 공녀가 몇 대째 없는 거야?’

벌써 7대째 공녀가 없어서 황후를 배출하지 못한 이 공작 가문이 어째서 나를 황제로 만드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될 법한 군상화다.

잠시 군상화를 감상한 나는 다시 계단을 한 층 더 올라 다음 복도에 섰다. 마침 저 앞에서 문틈으로 빛이 새어 나오는 방이 보였다.

‘이 층은 분위기가 귀빈실은 아닌 것 같은데……?’

잠시 불 켜진 방의 문을 쳐다보고 있었더니, 문이 스르륵 열렸다. 남의 방문을 너무 빤히 보고 있던 터라 놀라서 쳐다보지 않은 척 고개를 돌리려는데 안에서 나온 얼굴을 보고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로이드?’

로이드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곳이 공작가의 가족들이 생활하는 내실이 있는 층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자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남의 집에 와서는 그 집 가족들의 사적인 공간까지 침범하다니 이런 실례가 따로 없었다.

내가 아래층으로 도망치려고 몸을 돌리려는데 로이드가 먼저 날 발견하고는 곱게 눈웃음을 보냈다. 나는 뒷걸음질을 치려다 말고 ‘실례했습니다.’ 꾸벅 인사를 했다. 내가 고개를 들고 황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가려 하는데 그가 손을 들어 흔들었다.

까딱까딱.

그 손짓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리 오세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의 손짓에 홀린 듯 앞으로 걸어갔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로이드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 들고 가세요. 아니면 필요한 게 있으셨나요?”

“아…… 그, 그건 아닌데 그냥…….”

이런 밤중에 손님이 남의 집을 멋대로 휘젓고 다니다 집주인에게 걸린 사실이 창피해 시선을 피하자 로이드가 아무렇지 않은 듯 싱긋 웃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나를 방 안쪽으로 에스코트했다.

“일찍 주무셔서 일찍 잠이 깨신 모양이네요. 아, 맞다! 저희 저택은 한 번도 구경해 보신 적 없으시죠?”

로이드는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얼굴이 귀까지 빨갛게 되었는지 금방 눈치채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말했다. 내가 조금 편안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로이드가 환하게 웃었다.

“그럼 일단 이 방부터 구경하실래요?”

이 오밤중에 외간남자 방을 구경시켜 주겠다고요?

내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헛소리를 지껄이며 마치 내가 이 밤에 하녀도 없이 혼자 길을 헤맨 것이 아무런 일도 아닌 것처럼 굴었다.

로이드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대화 방식에 호로록호로록 휘말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나는 잠이 덜 깬 상태로 얼떨결에 방 안에 들어와 소파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버렸다. 그것도 잠옷 차림으로.

내가 자리에 앉자 로이드는 내게 따뜻한 물을 한 잔 내주었다. 작은 레몬 조각 하나가 컵 위를 동동 떠다녔다. 코끝에 은은한 레몬향이 퍼지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고마워요.”

“뭘요. 저녁때 저하께서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셔서 식사를 못 하셨다고 들었어요. 우유라도 드리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있는 게 이것밖에 없네요.”

“이거면 충분해요.”

한 모금 마시자 조금 허기가 달아났다. 꼬르륵거리던 배 속은 새콤한 향이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온수가 들어가자 금세 편안해졌다.

그러자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넓은 거실에는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소파와 유리 테이블이 있고, 한쪽에는 커다란 장식장이 있었는데 안에는 허전할 정도로 물건이 거의 없었다.

바깥과 연결되는 벽은 전면 유리로 되어 있는 것 같은데 전체가 두꺼운 암막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고, 방 안에는 다른 방으로 연결되는 문이 세 개 더 있었다.

“공자님 방인가요?”

로이드가 부끄러운 듯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옆머리를 긁적였다.

“네…… 일단은.”

나는 물을 마시면서 고개를 돌려 가며 방 안을 구경했다. 그중 문 하나는 열려 있었는데 얼핏 들여다보아도 안에는 책장이 빼곡했다.

“저기는 서재인가요?”

“아, 네.”

“구경해도 되나요?”

“다음에요. 안에 정리를 안 해서 지저분하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머지 닫힌 방문 두 개를 쳐다보았다. 하나는 욕실일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침실이겠지. 저택 안에 작은 집이 한 채 더 있는 것 같았다. 황궁의 내 방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을 수준이었다.

주변이 조용해지고 그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해질 것 같을 무렵, 로이드가 다시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형님이 조금 다치셨다고 들었어요.”

그게 조금이던가? 등에 비수를 맞았는데?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르가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었다.

“치명상은 아니래요.”

역시나 눈치 빠른 로이드는 내 말의 뜻을 그대로 간파했다.

“아르가 그러던가요? 그럼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지만 많이는 다친 모양이군요.”

게다가 이 공자님, 아르를 너무 잘 안다. 역시 사람에 대한 관찰력 하나는 타고난 인재였다.

“금방 따라오신다고 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 안 해요. 어린애도 아니고 호위도 둘이나 있으니 알아서 살아는 오겠죠.”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로 형을 걱정하는 기색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때였다.

끼이익-.

등 뒤에서 느릿한 경첩 소리가 들렸다. 서재의 맞은편, 내 등 뒤에 있던 방문이 스르륵 열린 것 같았다. 내 앞에 앉아 있던 로이드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나도 얼결에 로이드의 시선을 따라서 몸을 뒤로 돌렸다.

“엥?”

그러니까 이게 지금 무슨…….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아르였다.

그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비척비척 걸어 나와 눈을 감은 채로 문틀에 기대어 섰다.

“물…….”

그러자 로이드가 벌떡 일어나 물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저 녀석은 그걸 또 받아 마신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죠?

“쟤가 왜 여기 있어요?”

내가 로이드에게 묻자 아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내 쪽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의 동공이 사냥감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크게 확장되었다.

“아…….”

아르가 물잔을 놓치려던 그 순간 로이드가 잽싸게 빈 물잔을 빼앗듯이 가져갔다. 그리고 그 직후 그가 기절하듯 옆으로 스르륵 넘어갔다.

“어어어!”

로이드가 넘어지는 아르를 제 어깨로 받아 냈다.

“하아! 하여간 손 많이 가는 꼬맹이 같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저하.”

로이드는 컵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아르를 업어다 방에 넣어 놓고 조금 뒤 나왔다. 그가 사태를 수습하고 돌아와 소파에 앉자마자 나는 참았던 질문을 쏟아 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아르는 왜 저기서 나와요? 어디 다쳤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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