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어차피 전 황태자 부부가 살아 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 가문은 황녀 하나를 반드시 며느리로 맞았을 거야. 물론 그건 아멜리아 황손녀가 유력했겠지. 첫째 황녀가 가지는 상징성은 꽤 중요하니까.”
엘비어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의 존망이 걸린 문제치곤 참으로 별것 아닌 이유처럼 보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크로이젠이 아들 부잣집이라서.
아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엘비어스가 길게 빙글빙글 돌려서 이야기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그러니까 내게 하고 싶은 말은 로이를 대신 설득해 달라는 거고?”
엘비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식이 자신은 어린애 취향이 아니라나 뭐라나. 황태손하고 약혼시키면 바람이 뭔지 보여 주겠다며 파혼당해 줄 자신이 있다고 내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는데……. 휴우, 패버릴 뻔했다. 아버님 앞에서 그딴 소리 지껄이지 않은 게 다행이지.”
전 크로이젠 공작인 할아버님은 시간을 두고 설득하거나 다른 방법을 찾으셨겠지만 현 크로이젠 공작인 아버님은 그딴 거 없을 거다. 엘비어스는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아르는 엘비어스가 하는 고민을 가만히 듣다가 피식 웃었다.
“아시면 다시 걸을 수는 있을 정도로 반쯤 죽이시겠지.”
“남의 일이라는 거냐?”
“내 일은 아니지.”
아르는 먼 산 바라보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래서였구나.’
“그 바람둥이 새끼가!”
참 솔직하지 못하다. 로이드는 자기 밥그릇을 잘 챙길 줄 몰랐다. 아마 이유가 있을 거다. 그래서 일부러 파혼당할 구실을 만들고 다녔던 걸 거다.
그렇다고 그가 계략에 능한 것은 아닌지라 지난 생에서는 의도치 않게 아멜리아에게 상처를 입힌 거였겠지.
‘처음부터 그런 자신을 알고 계략에 능한 형에게 부탁한 것일 텐데 거절당하는 바람에 혼자서 해결해 보려다 그렇게 된 거였어.’
로이드가 계산하지 못한 것은 엘비어스가 단순히 그의 형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거였다. 엘비어스는 로이드의 형이기 이전에 크로이젠의 차기 가주였다.
아르는 고개를 들었다. 로이드는 형인 엘비어스를 퍽 어려워했다. 어쩐지 로이드와 엘비어스, 둘 사이에 콕 끼어 버린 기분이다. 아니, 이건 제대로 낀 것이 맞다.
‘어렵다.’
아르는 눈을 감고 일어났다. 엘비어스에게 대답은 하지 않았다. 엘비어스도 대답 같은 건 기대하지 않았을 거다. 설득은 안 하더라도 그저 로이드가 어떤 생각인지 떠봐 주기만 해도 만족할 거다.
물기를 닦고 옷을 입으려고 집어 들었을 때였다
툭- 첨벙!
옷 사이에 묻혀 있던 벨벳 케이스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뚜껑이 홱 열렸다. 안에서는 새빨간 단풍잎 모양 머리핀이 떨어졌다.
퐁퐁 솟아오르는 물살을 타고 휘날리는 머리핀을 엘비어스가 건져 올렸다. 루비 장식의 정체가 머리핀이라는 것을 확인한 엘비어스가 비명을 지르듯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신줏단지 모시듯 단풍잎 머리핀을 들어 올렸다.
“……어? 야아아아! 너 이거 뭐야!”
“그냥 단풍잎이야. 내놔.”
엘비어스는 드디어 아르의 목소리에서 그렇게 바라 마지않던 기분이라는 것을 읽어 냈다. 살기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건 별로 알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나 이건…… 이건 너무 기회잖아! 이 얼음장 같은 꼬맹이를 약 올려서 정말로 어린애로 만들어 버릴 기회!
“요즘 단풍나무는 이파리에서 루비가 열리냐, 미친놈아? 그런 나무 있으면 나 좀 줘. 어머니 온실에 심어 드리게. 이건 누가 봐도 여자 머리 장신구잖아! 이 자식이 꼬맹이 주제에 연애해?”
엘비어스는 단풍잎 머리핀을 등 뒤로 감추고 욕탕 구석으로 몸을 내뺐다. 아르가 머리핀을 빼앗으려고 그런 엘비어스에게 달려들었다.
“엘비! 진짜 죽여 버린다!”
아르가 이렇게까지 격하게 감정을 표출하는 모습은 실로 오랜만이라 엘비어스는 이러다 정말로 죽는 게 아닐까 잠깐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누군데? 귀족이야?”
“아니라고!”
“진짜? 그럼 평민이야? 예뻐?”
“빨리 내놔! 애새끼도 아니고 이러고 싶냐?”
그리고 엘비어스와 아르가 한참 싸우던 그 시각.
가볍게 샤워를 하고 나와서 잔뜩 쇼핑한 짐을 차곡차곡 정리하던 아멜리아는 그만 중요한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으아앗! 이거 안 줬다!”
서월궁의 후원을 닮은 단풍잎 머리핀에 꽂혀서 정작 제일 처음 주려고 했던 넥타이핀과 커프스단추는 깜빡했다. 그런 주제에 별 쓰잘 데도 없는 단풍잎 장식품 하나 안겨 줬다고 온 세상을 다 줬던 것처럼 뿌듯해했다니!
누가 자꾸만 멍청이라고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귀가 간지러웠다.
“아아, 나란 멍청이…….”
***
해가 급격하게 짧아지는 시기다. 불과 며칠 전이었다면 벌써 해가 조금 떠 있었을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여전히 어둡다. 동쪽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 오는 건 보이지만 지금이 아침이냐 밤이냐 묻는다면 밤이라고 대답하는 게 더 어울릴 그런 시간이었다.
마부는 오늘 예약 승객의 목적지가 적힌 종이를 들고 싱글벙글 웃었다. 황도의 크로이젠 공작 저택이 목적지라니, 꽤 귀한 손님이 탈 것 같다. 마부는 마차의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이모저모 살피면서 곱슬곱슬한 갈색 턱수염을 반듯하게 매만졌다.
‘크하하! 오늘이 날이구나. 팁을 얼마나 주시려나?’
긴 운행이 될 것 같으니 볼일도 미리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마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인적 없는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으으, 시워어언하다!’
몸을 부르르 떤 마부가 옷을 정리하려던 그때였다. 불현듯 싸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바람에 나뭇잎이 날카롭게 나부끼는 듯한 환청이 들렸다.
사-악!
그리고 잠시 후.
동이 슬며시 트기 시작했다. 짙은 밤색의 마차가 아침 햇살을 받고 반짝 빛났다.
마부는 손님을 기다리며 자신의 까슬한 턱을 매만졌다.
‘승객은 대체 언제 오려나?’
***
예약한 마차는 하난데 가져갈 기념품은 산더미였다. 그래서 돌아가는 길 중간에 필요할 만한 짐이 아니라면 전부 운송업을 하는 거상에게 크로이젠 공작가로 배달을 맡겨 버렸다. 역시 제국 물류의 중심지다웠다.
그 덕분에 올 때 단출했던 것처럼 갈 때도 단출했다. 다른 점이라면 황도를 조용히 나오느라 공작가의 호위들과 거리를 두고 성문을 벗어나던 때와 달리 지금은 호위들에 둘러싸여 움직인다는 정도?
새벽같이 체크아웃을 마치고 호텔 정문을 나서자 그 앞에서 짙은 밤색 마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색 로브를 두른 마부가 모자를 벗고 꾸벅 인사했다.
막 마차에 오르려던 때 갑자기 아르가 나를 붙잡고 조용히 물었다.
“은화 있습니까? 백 실버짜리 한 개면 됩니다.”
“없는데?”
그러자 엘비어스가 금화 한 닢을 꺼냈다.
“이건 어때?”
“너무 많긴 하지만…….”
잠깐 금화를 받아 들고 앞뒤로 뒤집어 보던 아르는 그것을 갑자기 마부를 향해 휙 던졌다.
“팁이다.”
“감사합니다.”
갑작스럽게 날아든 동전을 마부는 능숙하게 받아 챙겼다. 그러는 동안 엘비어스가 먼저 마차에 올라탔고 나는 그가 내민 손을 붙잡고 마차에 올라왔다. 내가 자리를 잡고 앉자 아르는 마차 밖에서 문을 닫아 버렸다.
“어? 안 타?”
내가 작은 창문으로 고개를 쑥 내밀며 묻자 아르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뒤로 앉으니 역시 멀미가 심해서요.”
그러고는 엘비어스가 데려온 다섯 명의 호위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에게 다가갔다.
“남는 말 한 마리만 타고 싶은데.”
그는 군말 없이 비상시를 대비한 여유 말 한 마리를 아르에게 내주었다.
나는 여전히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마차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상황일 뿐인데, 어쩐지 싸늘한 분위기가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만 같아 가만히 앉아 있기 몹시 불편했다.
엘비어스가 그런 나를 부드럽게 끌어다가 자리에 앉혔다.
“위험하니 얌전히 앉으십시오.”
그러고는 마차의 유리창 위, 커튼 봉에 둘둘 말아 올려놓은 커튼을 풀어 내렸다. 바깥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엘비어스가 잔뜩 굳은 얼굴을 한 채 몸을 내 쪽으로 살짝 돌려 앉았다.
그가 검지를 들어 제 입술 앞에 살포시 가져다 대었다.
쉿-.
차마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수도 없을 만큼 답답한 공기가 순식간에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 밖에는 마차 바퀴 소리와 말 달리는 소리, 이따금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런 상태는 엔델포프의 관문을 넘어 황도로 넘어가는 산의 고갯길을 탈 때까지 두 시간이나 이어졌다.
눈치만 한참을 보던 나는 결국 엘비어스의 손을 끌어와 내 무릎 위에 뒤집어 놓았다. 그러고는 그 위에 손가락으로 물음표를 그렸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엘비어스는 내 무릎 위에 놓인 자신의 손바닥을 빼냈다. 그는 손등으로 커튼을 살짝 들어 올려 눈동자만 내놓고 바깥을 잠시 살피더니 이내 다시 커튼을 쳤다.
이번에는 그가 내 손바닥을 가져다 제 무릎 위에 올리고 글씨를 그렸다.
「마부. 수상.」
우리는 서로의 손바닥에 간질간질하게 그림을 그리며 조용한 의사소통을 이어 나갔다.
「?」
「팁으로 금화를 주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그래서요?」
「마부가 전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간지러워 손바닥을 움찔거리자 엘비어스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글자를 그려 내기 시작했다.
「보통 물건을 던져서 줄 때는, 받기가 쉽도록 허공에 포물선 모양으로 천천히 던집니다.」
‘그건 그렇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비어스는 내 반응을 살피며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