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극장을 나온 우리는 상쾌한 바깥 공기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었지만 유치한 연극 탓에 의미 없이 집어 먹은 버터 쿠키와 홍차로 헛배가 가득 차고 말았다. 식사다운 식사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점심은 좀 늦게 먹을까? 그럼 뭐 하지?”
나는 시녀들이 엔델포프 여행의 필수 코스 리스트라며 적어 준 종이를 꺼내 들었다.
어디 보자, 쇼핑? 왜 죄다 쇼핑이야?
쇼핑 아니면 먹을 것이었다.
“먹을 건 지금 너무 배부르고 쇼핑밖에 할 게 없네.”
나는 입술을 내밀고 미간을 찡그리며 종이에 다른 볼거리는 없는지 살폈다.
“엔델포프는 제국 전체에 유통되는 모든 물건이 모이는 물류 창고 같은 도시니까요. 쇼핑이 주된 관광 코스입니다.”
하지만 딱히 지금은 가지고 싶은 물건이 없다. 필요한 물건도 없다. 내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은 내 입에서 단어를 내뱉는 즉시 눈앞에 대령되었고, 귀금속이나 고급 의류 같은 사치품은 숍의 마담들이 시즌마다 카탈로그를 들고 오면 고모님과 함께 잔뜩 구매했다.
“끄응…… 나는 별로 사고 싶은 물건도 필요한 물건도 없는데.”
“그럼 황제 폐하와 황태녀 전하께 드릴 기념 선물과 시녀들에게 줄 기념품을 사시면 됩니다.”
우문현답이었다.
“그거야!”
그렇게 두 시간 후.
나는 시녀들의 리스트에 적혀 있던 오르골 장인의 집에 들러 할바마마와 고모님께 드릴 오르골을 구매해 호텔로 배송시켰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 내가 있는 척을 하느라 고생했을 시녀들과 호위 기사들에게 줄 유리세공 펜&잉크 세트를 구매해서 호텔로 배송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한 코스만 남았다!
나는 황궁에서부터 들고 온 내 용돈 주머니에서 남은 금화와 은화의 개수를 세며 아르에게 물었다. 남은 금화는 10골드, 그리고 그보다 작은 단위의 동전들이 여러 개. 무려 아르의 두 달 월급을 웃도는 금액이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번에 황궁 파티 때 파티장 내부 호위는 섀도 나이트에서 담당하는 거 맞지?”
“예.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나는 리스트에 적힌 액세서리 상점 중 가장 세련된 세공을 자랑하고 가장 비싼 브랜드 가치를 자랑한다는 명품 액세서리 매장에 발을 디뎠다.
“너도 구경하고 있어. 혹시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고.”
“딱히 갖고 싶은 건 없습니다.”
아르가 내 뒤를 바짝 따라오려 하자 나는 뒤돌아서 그를 쓱 밀어냈다.
“별로 내가 살 거 보여 주고 싶지 않아!”
아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어…… 그러니까 너무 비싸잖아. 그래서 네가 그 나랑 뭐랄까…….”
“계층 간 위화감 같은 그런 거요?”
“응응!”
나는 뭐가 됐든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일단 멀리 잘 떨어뜨려 놓았고!
나는 천천히 구경하는 척하며 은근슬쩍 남성용 액세서리 진열대 근처로 다가갔다. 그렇다고 바로 앞까지 간 건 아니고 그 옆의 팔찌를 구경하는 척했다.
아르를 힐끗 돌아보니 그도 입구 근처에 진열된 액세서리들을 구경하는 듯 보였다.
다시 고개를 돌려 대각선 앞에 놓인, 커프스단추를 힐끔거렸다. 은을 세공한 커프스단추 양쪽 끝에는 진한 푸른색의 사파이어가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세트인 듯한 넥타이핀.
“이거.”
나는 남아 있던 금화의 절반을 털었다. 한 세트에 5골드 990실버라는, 몹시도 애매한 가격이었다.
선물용으로 포장하겠냐는 종업원의 물음에 나는 그렇게 해달라고 말했다. 종업원이 선물을 포장하는 동안 나는 아르가 멍하니 구경하고 있던 장식장 앞으로 다가갔다.
“뭐 봐?”
나는 아르의 어깨 옆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흠칫 놀란 아르가 옆으로 물러났다.
장식장 안에는 붉은 루비가 여럿 박혀 있는 단풍잎 모양 머리 장식이 있었다. 샛노란 금색 테두리 안에 색깔을 입힌 듯 루비가 빼곡했다.
“뭐야, 머리핀이잖아. 이걸 네가 왜 보고 있어?”
“그냥…… 서월궁이 생각나서요.”
“아아! 거기 단풍이 예쁘긴 했지.”
그냥 예쁘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절경이긴 했다. 특히나 단풍이 지는 시기에 후원의 호수에 붉게 떠다니는 이파리에는 서월궁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특별한 매력이 있었다.
“가을을 좋아하셨지요, 저하께선…….”
“지금도 가을 좋아해. 가을 날씨 선선해서 좋잖아.”
나는 잠시 단풍잎, 그리고 그것을 천천히 눈에 담는 아르를 번갈아 보다가 슬쩍 말을 걸었다.
“갖고 싶어?”
“예?”
나는 아르가 대답할 새도 없이 바로 뒤돌아서 종업원을 향해 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이것도!”
바로 플렉스 한다!
“머리핀 하시게요?”
“아니, 너 줄 건데?”
“저하, 이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굳이 왜……! 그리고 이건 어차피 여성용입니다.”
“안 쓰면 어때? 예쁘잖아. 옛날 생각나서 계속 보고 싶거든 그냥 장식용으로 방에 놔둬.”
나는 달려온 종업원에게 남은 금화를 탈탈 털어 머리핀을 결제하고 벨벳 케이스에 담긴 단풍잎 머리 장식을 아르의 품에 안겨 주었다.
그럼 이제 살 것도 다 샀고……. 오늘 부지런히 돌아다녔으니 들어가서 좀 쉬어야 내일 환궁할 때 편할 거다. 나야 마차에서 자도 되지만 아르는 계속 긴장한 상태로 있어야 할 테니.
“돌아가자.”
그렇게 호텔에 도착했을 때였다. 기막힌 타이밍으로 정문에서 엘비어스와 마주쳤다.
“연극 잘 보고 오셨나요?”
“네. 엘비어스 님은요?”
“저도 잘 돌아다녔습니다. 내일 돌아갈 길이 머니 호텔 온천에서 좀 쉬려고 합니다.”
“네, 그럼 저도 제 방으로 가서 쉬어야겠어요. 저녁 식사 할 때 만나요.”
내가 객실로 올라가려고 발을 막 떼었을 때였다.
“앗! 그럼 이놈은 제가 데려갑니다!”
엘비어스는 아르를 낚아채고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공작가의 호위들을 내게 붙였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
따뜻한 물이 바닥에서 퐁퐁 솟아올랐다. 2평 남짓한 공간의 개인실 온천은 허연 김으로 가득 차 있다.
엘비어스는 구석의 납작한 옷장에 옷을 넣어 두고 첨벙 물속으로 들어가 앉았다.
“뭐 해? 안 들어오고.”
“난 여기 일하러 왔는데.”
“황제 눈에 안 보이면 좀 놀아도 돼.”
엘비어스는 물속에 잠긴 다리를 꼬고는 벽에 느긋하게 기대어 앉았다.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났다. 그는 고개를 까딱이며 자신의 앞자리를 턱짓했다.
“중요한 이야기 할 거니까 들어와 앉아.”
아르가 마지못해 옷을 벗고 엘비어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엘비어스가 입꼬리를 올리며 싱긋 웃었다.
“꼬마 용사 페페 재밌었냐? 꼬맹이.”
“차기 공작이고 뭐고 죽일까.”
반쯤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더니 엘비어스가 과장된 몸짓을 하며 구석으로 피했다.
“미친놈, 크로이젠 공작 후계자를 암살하려 하다니.”
“괜찮네. 내 본업이 암살자거든. 커리어 하나 생기겠는데. 그나저나 중요한 얘기가 그거였어?”
“아…….”
어서 본론부터 말하라는 아르의 재촉에 엘비어스가 잠시 허공을 쳐다보며 옆머리를 긁적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로이 얘기 들었냐?”
“무슨 이야기?”
“황손녀랑 약혼 안 하겠다는 이야기.”
그 순간 무미건조하던 아르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엘비어스는 맹수가 서로를 탐색하듯 아르의 눈에 서린 감정을 읽으려 노력했다.
분노? 아니, 그보다 조금 더 원초적인 것이었다.
“그게 안 하겠다고 고집부려서 될 일이야? 황제 폐하의 결정이었어.”
눈빛은 죽일 듯 날카로운데 목소리는 몹시 평온했다. 엘비어스는 혼란스러웠다.
“황제 폐하의 결정이 아니야. 할아버님 결정이지.”
그랬다, 이건 황제의 결정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는 전대 크로이젠 공작의 결정이었다. 엘비어스는 아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정수리에 손바닥을 얹으며 이어서 말했다.
“야, 꼬맹이. 이건 로이에게도 해주지 않은 이야긴데. 내가 할아버님과 황제 사이에서 오갔던 밀서들을 봤어.”
“웬 밀서?”
전 공작과 황제 사이에 오간 밀서 이야기를 꺼내도 이 당돌한 꼬맹이가 흔들리는 법이 없다. 어려웠다. 엘비어스는 조금 더 말을 했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서재가 예전에는 할아버님 서재였거든. 연이은 두 크로이젠 공작들이 왜 아멜리아 황손에게 가문의 이름을 배팅했는지 알아?”
“자꾸 위험한 이야기 좀 하지 마.”
아르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엘비어스는 말을 이었다.
“충심? 그래, 넌 충심이겠지. 그런 마음으로 할아버님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거야. 그런데 난 아니야.”
“충심? 누가 그래? 내가 충심 때문에 황제 옆에 붙어 있다고.”
비웃음 가득 섞인 말투는 결코 열네 살의 그것이 아니었다. 어쩐지 소름이 돋아 엘비어스는 한 뼘 정도 구석으로 옮겨 앉았다.
“어쨌든 나 같은 사람이 있는 자리는 개국 공신 가문이니, 제국의 충신이라느니 그런 겉만 번지르르한 호칭 따위에 가문과 가신들의 존망을 거는 자리가 아니거든. 내 밑에 딸린 목숨이 좀 많아야 말이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크로이젠에 공녀가 있었다면 우리는 전 황태자가 죽자마자 볼테르 황자를 지지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황제가 아멜리아 황손을 여황제로 만들 생각을 했을 때, 크로이젠 공작가는 소공자들 중 하나를 여황제의 부군으로 만들 생각을 하게 되었거든.”
“그러니까 결론은 공녀가 없어서 아멜리아 황태손을 지지하기로 했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