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그리고 같은 시각.
메리는 아멜리아 황태손의 궁에서 드레스룸의 옷장을 비교적 깨끗한 걸레로 정성스레 닦았다. 두 개의 양동이를 들고 바지런히 돌아다니다 뽀얀 먼지가 달라붙은 걸레를 빈 양동이에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바로 앞치마 주머니에서 새 걸레를 꺼내 물이 든 양동이에 ‘참-방!’ 담갔다가 꾹 짰다.
그때였다.
둥실!
양동이 위로 웬 연둣빛 찢어진 천이 한 조각 떠올랐다.
“어?”
앞치마에 들어 있던 천이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메리는 손가락 없는 손으로 천 조각을 휘적휘적 건져 올렸다.
‘이게 뭐지?’
그 순간, 정령의 화원에서 마주쳤던 남자의 얼굴, 허겁지겁 도망가다 넘어져 소지품을 전부 떨어뜨렸던 일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쳤다.
‘혹시 그때……?’
하지만 제법 온전한 모양새를 갖춘 이 천은 아무리 보아도 남성복이 아니라 여성복의 소맷자락이었다.
“아아!”
맞아, 그 얼굴 어디서 보았었는지 생각났다!
***
나는 극장 2층, 전망이 몹시도 좋은 프라이빗룸에서 아르와 단둘이서 멍한 눈으로 연극을 구경했다.
어째서 창피함은 내 몫이란 말이냐!
창피한 게 나뿐만은 아닌지 아르도 아까부터 말없이 프라이빗룸의 무제한 서비스인 홍차와 버터 쿠키만 끊임없이 가져다 먹고 있다.
무대를 향해 나 있는 커다란 테라스에서 목청 좋은 배우의 기합이 우렁차게 들어왔다.
“받아라아아아앗!”
그는 한눈에 보아도 장식용이 분명한 휘황찬란한 보검을 들고 악당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검은 천과 막대기로 만든 조잡한 날개를 매단 악당이 제 명치를 부여잡고 뒷걸음치다가 주저앉았다.
“크아아아악! 이, 이럴 수가!”
그러게, 정말 이럴 수가! 이렇게 내용이 조잡할 수가!
배우들이 연기를 못하는 건 아니었다. 연기는 정말 잘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내용은 정말이지 혼돈의 카오스였다.
일단 시작부터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밑도 끝도 없이 용사가 되겠다며 가출하는 주인공 페페는 이놈이 정말 정의의 용사인지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천하의 불효자식인지 헷갈리게 했다.
시녀들이 재미있게 놀다 오라는 선물이라며 삼삼오오 사비를 모아 구해 준 VIP석 프라이빗룸 티켓만 아니었다면, 보고 와서 재미있었는지 꼭 후기를 말해 줘야 한다며 신신당부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진즉 도망쳤을 텐데……!’
내가 생각이 짧았다.
시녀들이 제정신이 박힌 이상, 아홉 살짜리에게 줄 공연 티켓이 잔인한 장면을 여과 없이, 마법 홀로그램 장비로 생생하게 보여 주는 액션물일 리가 없지 않은가!
보다가 오줌 지리면서 울음을 터뜨릴 스릴러물일 리도 없고, 남배우가 옷을 홀딱홀딱 벗어 던지는 외설적인 로맨스물일 리도 없다.
“으으, 다음에는 꼭 내 손으로 고를 거야!”
내가 눈물을 머금으며 버터 쿠키를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다음번에는 뭘 보시게요?”
“내가 열여섯 살 때, 그때 상영할 그 유명한 로맨스 연극 있잖아. 제목은 기억 안 나. 들으면 생각날 것 같은데. 그거 결국 고모님이 외출 허락을 안 해주셔서 못 봤었지. 이번에는 꼭 볼 거야.”
“아…… 그거요? 평민 소녀가 우연히 길에서 도와준 사람이 백작가의 후계자였는데 사랑에 빠져서 주변의 갖은 방해 끝에 나중에는 백작 부인이 되는…….”
“으아아아! 내용 이야기하지 마!”
내가 손을 마구 내저으며 아르의 입을 틀어막으려 하자 그는 여유롭게 내 손을 피하며 말했다.
“이 부분은 극장 광고 내용입니다.”
“그래도!”
“그런 스토리가 재미있습니까?”
“응. 낭만적일 것 같은데? 그리고 신분 상승 로맨스는 클리셰라고!”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던 것들을 누군가가 나타나 해결해 주는 마법 같은 이야기. 누군가는 너무 의존적이라고, 무기력하다고, 혹은 속물이라고 욕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허구잖아? 그런 허무맹랑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지라도 연극 속 여주인공의 입장에서는 그 자체로 빛이 아니었을까?
길었던 연극이 끝나고 막이 내려왔다. 커튼콜이 시작되고 주연 배우부터 하나둘 무대 위에 올라와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들었다.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극 속에 몰입한 그 순간에는 짧지만 답답한 현실에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대리만족.
“그래, 그냥 대리만족이야. 그리고 언젠가 나에게도 그런 연극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 같은 거지.”
배우들의 무대인사를 바라보며 아르가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왜 하필 그런 신분 상승 로맨스가 보고 싶은 겁니까? 어차피 이 세상에 저하보다 신분 높은 남편감도 없을 텐데요. 게다가 이미 예비 약혼자도 있잖습니까.”
“그러게……. 그런데 꼭 나보다 신분이 높을 필요가 있나?”
그 이야기 속에서 신분이라는 건 그저 극적인 장치일 뿐이다. 그것은 ‘나조차 어찌할 수 없었던 내 인생을 대신 구원해 준 누군가’였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시각화하기 쉬운 것이 바로 신분이고 그에 따른 권력이었을 뿐이지.
나는 배우들의 무대인사가 다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에 한참을 앉아 있던 몸이 찌뿌듯하게 저렸다. 나는 기지개를 쭉 켰다.
“으으으! 어쨌든! 마치 연극처럼 내 인생을 되돌려 구원해 준 건 경이었단다.”
아직도 이따금 눈을 감으면 그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부디 소신을…… 용서하지 마십시오.”
나는 아르의 앞, 테이블에 팔을 짚고 기대어 상체를 가까이 기울였다.
“그러니 연극 속 주인공처럼 신분 상승 할 준비나 하거라. 최소 백작의 작위와 황도 인근의 영지를 보장해 주지. 비록 로맨스가 빠져 있긴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도 꽤 연극 같지 않으냐?”
나는 그렇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 채 싱긋 웃었다. 아르의 짙푸른 눈동자 속에 이 좁은 방 안이, 그리고 내가 가득 담겨 있다.
이윽고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네요. 로맨스만…… 빼면, 연극 같은 이야기입니다.”
***
그건 오래전의 일이었다. 키옌 황후가 황후 책봉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때는 가을이 한껏 무르익었을 즈음이었다.
그날 마리는 퇴근하다 말고 잊은 물건이 생각나 황후궁으로 돌아왔다. 세탁실도, 재봉실도, 하녀들이 모두 퇴근한 공간은 몹시도 적막했다. 마리는 아무도 없는 어두운 복도를 혼자 조용히 걸었다. 그렇게 걷던 때, 옷감 창고 쪽에서 희미한 붉은 빛이 새어 나왔다.
‘누가 불도 끄지 않고 나간 거람?’
사무실에 도착하면 오늘 옷감 창고 청소를 맡은 하녀를 찾아 내일 경을 쳐야겠다고 생각하며 마리는 창고 앞으로 다다랐다.
‘옷감에 불이 붙어 화재라도 나면 어쩌려고!’
조심스레 열쇠로 창고 문을 열었을 때였다.
“하아! 으음…….”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빨갛게 익어 터져 버릴 것 같은 소리였다. 너무 놀란 나머지 마리는 창고 문을 열다 말고 숨을 멈추었다. 침이 꼴딱 넘어가면서 급속도로 입안이 말랐다.
대체 어떤 겁을 상실한 궁인들이란 말인가! 이곳은 황후궁이었다.
‘아직도 퇴근하지 않고 밀회를 하는 하인과 하녀인가?’
현장을 기습해 따끔하게 혼을 내야겠다고 생각한 마리는 창고 문틈으로 안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문을 열어젖히려고 했다.
열어젖히려고 했는데…….
‘저건, 사하임에서 수입되는 최고급 비단……!’
그녀는 이래 봬도 황후궁의 옷방에서 일하는 시녀였다. 옷감에 대한 안목이라면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딱 보아도 고동색이 섞인 짙은 금발의 남성이 입은 옷은 한 필에 십수 골드를 호가할 고급 미색 비단으로 지은 셔츠였다. 그건 곧 그 남성이 마리보다 훨씬 높으신 분이라는 걸 의미했다.
이건 못 본 척해야 한다. 무조건 모르는 척해야 한다. 마리는 뒷걸음질을 쳤다. 조심히 이곳을 떠야 한다.
그러나, 달그락! 그만 창고 문에 팔꿈치가 스치고 말았다.
“누구냐!”
야옹!
타다닥!
때마침 울며 창고 안으로 뛰어 들어간 황후의 애완 고양이가 아니었다면, 그렇다면 과연 어찌 되었을까?
“맞아, 그 남자였어!”
정령의 화원에서 본 그 남자는 그때, 이십몇 년 전 황후궁 옷감 창고에서 보았던 그자였다.
그날 그 상대 여자는 누군지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아무리 신분이 높은 자라도 그렇지 다른 곳도 아니고 감히 황후궁에서 그런 대담한 짓이라니, 아직도 단단히 미친 연놈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날 이후로 한 번도 궁에서 본 적이 없었어. 지난 20년이 넘는 동안. 대체 누구였지?’
그렇게 잊어 가고 있었는데 다시 보았다.
여자의 옷감도 딱 보아도 엄청난 고급 비단이었다. 그렇다면 정령의 화원에서 얼핏 보았던 이 연둣빛 천의 주인인 여자도 만만치 않은 신분이라는 뜻이었다. 높으신 분이 잠깐 주는 애정을 그대로 믿어 버리는 철없는 하녀 같은 여자가 아니었다.
‘여자는 누굴까, 그때와 같은 여자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