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리만이 이곳에 있다는 것도 확실히 알았고, 그가 일으킬 역병 사태가 1년 안에 시작될 거라는 정보도 얻었다. 그리고 엘비어스와 몰딘 남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도 의논이 끝났고.
우리에게는 이제 빈 일정이 하루 남아 있다. 내 일정표가 빈 것을 보고 엘비어스가 물었다.
“오늘은 뭘 하실 겁니까?”
“뭐 하긴요. 관광해야지!”
엄격한 고모님 밑에서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들, 일탈이라고 여겨 왔던 것들이 사실은 너무 별것 아닌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그중 하나가 여행이었는데, 고모님이 황제였을 때 내가 한번 궁 밖으로 나가면 일정을 분 단위로 잡은 다음 기사단 하나가 통째로 나를 호위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절대로 궁 밖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그런 만큼 쉽게, 자주 외출할 수가 없었다. 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에나 공식적으로 행차하는 것이 내 외출의 전부였다.
‘이해해……. 할바마마께서 돌아가셨던 경위가 너무도 수상했던 만큼, 황태자 부부의 마차 사고가 사실 타살이었다는 소문이 갑자기 음지에서 퍼지고 있던 만큼, 고모님이 나를 황궁 안에서 싸고돌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으니까.’
그래서 고모님과 소원해졌다. 그런 갑갑함이 사춘기의 나를 삐뚤어지게 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굴 탓하고 싶지는 않다. 그땐 그냥 상황이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할바마마는 내가 하고 싶다는 건 그게 뭐든 민폐나 범죄만 아니라면 전부 들어주셨다.
“하루 더 있다 오는 이날은 뭐냐?”
“아…… 그건, 그냥…….”
“그냥? 놀고 싶어서?”
내가 오만 눈치를 다 보면서 억지로 끼워 넣은 하루, 할바마마는 내가 간략하게 적은 외출 계획표를 보곤 마지막 일정이 비어 있는 하루를 콕 집어내서는 물었다.
일정을 빼라고 하면 뺄 생각이었지만 수백 번 생각하고 어렵사리 꺼내어 본 말인 만큼 거절당하면 많이 섭섭할 것 같긴 했다.
그러나 할바마마 입에서 나온 대답은 정말 의외의 것이었다.
“그럼 그까짓 거 나간 김에 잘 놀다 와라. 그런데 엔델포프까지 가서 고작 하루 가지고 다 놀 수는 있겠느냐? 거기 꽤 볼거리가 많은 대도시란다.”
그 순간 나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으으으응, 하루면 충분해요!”
그렇게 얻은, 내게는 몹시 귀한 하루였다.
이미 이곳에 오기 전에 시녀들에게 <엔델포프 경제 특수구역 황제 직할령 여행가이드!>라는 제목으로 꼭 보거나 꼭 먹어야 할 것들 목록까지 받아 왔다.
그리고 잔느가 엔델포프에서 가장 큰 극장의 유명 연극까지 예약해 주었다.
“이거 보러 가고 싶어요!”
나는 잔느가 줬던 연극의 VIP 초대장 봉투를 엘비어스 앞에 자랑스레 내밀었다. 오늘 오전 11시 연극으로 예약했다는 것만 알지 연극 제목은 아직도 보지 않았다. 이런 건 나중에 열어야 설레는 법이거든!
“제목이 뭡니까?”
“저도 몰라요! 시녀들이 딱 제 취향일 거라면서 강력하게 추천해 준 연극이거든요. 이제 봉투를 열어 볼까요?”
나는 두근두근 마음을 졸이며 봉투의 실링 왁스를 살며시 떼어 냈다.
동시에 어제 광장에서 보았던 극장의 상영물 광고 여러 개를 떠올렸다.
무대에 최신식 홀로그램과 음향 효과를 입히기 위해서 마법 장비에만 1000골드 넘게 투자했다는 액션 판타지물?
아니면 보다가 심장이 멈춰도 책임 못 진다며 혼자서는 절대 보러 오지 말라던 공포스릴러물?
그도 아니면…… 유명 남배우의 상의 탈의가 있다는 로맨스물!
두근두근!
고급스러운 VIP 초대권 봉투 안에 들어 있는 VIP 입장권을 검지로 잡아 슬며시 끄집어냈다. 그리고 시녀들이 나를 위해 만장일치로 꼽아 줬다는 그 입장권을 꺼내 든 순간!
‘이걸 엘비어스 크로이젠하고 보라고?’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가는 것을 보고는 엘비어스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 내 손에 들린 입장권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재빠르게 외쳤다.
“극장의 VIP 특실은 프라이빗한 데다 수행원 하나둘 정도 데리고 들어가도 되긴 하지만, 앉을 수 있는 소파는 두 개뿐이거든요. 열네 살 꼬맹이한테 두 시간이나 서 있으라고 하기 양심에 찔리니까 쟤더러 앉으라고 하십시오! 그럼 우리 각자 놀다 해 지기 전에 객실에서 만나요, 저하!”
그리고 아르의 등을 냅다 떠밀더니 도망갔다.
으아아! 나도 도망가고 싶다!
아르는 엉겁결에 등 떠밀려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내가 들고 있는 초대장 앞으로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대체 뭔데 저러는 겁니까? 보여 주실 수 있습니까?”
초대권에는 큼직하게 상영 연극 제목이 쓰여 있었다.
<꼬마 용사 페페의 두근두근 대모험!>
***
데뷔 신청서 접수가 시작된 직후, 식 순서가 안내된 간략한 팸플릿까지 귀족들에게 뿌려졌다. 정말 필수적인 요소만 딱 들어간 데뷔 무대였다.
사교계에 데뷔를 하는 아이들의 명단을 호명하고 미리 파트너로 약속되어 있던 상대와 홀로 나와 어른들에게 다 함께 인사를 한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무곡인 왈츠에 맞추어 춤을 춘다.
그게 끝이었다.
황후의 정식 탄신 파티 이전에 진행되는 사전 이벤트인 만큼, 제일 중요한 황후의 탄신 파티가 묻히지 않도록 간소화했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예상했던 일이라 각오는 했으나 이렇게까지 간소화할 줄은 몰랐다.
팸플릿을 주르륵 읽는 민티아의 얼굴이 시시각각 울상이 되어 갔다.
“싫어요! 이게 뭐야!”
민티아가 생소리를 내질렀다.
“싫다고 떼를 써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황후가 냉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민티아는 고개를 돌려 제 옆에 앉아 있는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후작가의 후계자이자 황후의 첫째 오라비인 그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래서 지금…… 황자 전하가 저지른 실수에 대한 책임을 내 딸한테 져라, 이겁니까? 싫습니다! 차라리 황녀더러 데뷔 무대 기획을 취소하라고 하시죠.”
“오라버니!”
“오라비라 부르지도 마! 가뜩이나 신년회가 아닌 파티에서 데뷔시키는 것도 꺼려졌는데 잘되었다. 그때는 네가 민티아를 화려하게 사교계에 데뷔하게 해주겠다던 약속을 믿고 하겠다고 했던 거지. 이렇게 초라하게 하겠다는 뜻은 아니었어!”
제 아버지가 제 편을 들자 민티아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차라리 굶어 죽어 버릴 거예요! 이럴 바에야 얼굴도 비추지 않을 테야!”
민티아가 꽤 강수를 두자 한숨만 푹푹 내쉬던 늙은 체리에 후작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다. 데뷔해라.”
“할아버지!”
“아버지!”
“대의를 위한 일이다.”
“고작 몇 달입니다, 아버지!”
“고작 몇 달이 아니어요, 오라버니!”
황후가 지지 않고 소리 높였다. 그리고 주변을 물렸다. 울며불며 떼를 쓰는 민티아도 내보냈다.
“그 몇 달 안에 ‘그 문서’의 기밀 등급이 해제된다.”
황태자 부부의 마차 사고 사건에 관한 문서였다. 신년회 한 달 전에 황태자 부부의 기일이 있다. 사고 발생 7년째 되는 해다.
그리고 그날을 기점으로 그날 그 사건의 수사 일지 중 일부분의 기밀 등급이 해제된다. 이전까지 관련된 모든 자료는 황제와 수사 관계자들만 열람 가능 했다. 이번에 공개될 문서는 극히 일부분이지만 어떤 것이 공개될지는 후작도 아직 모른다.
문 바깥에서 민티아가 넋 놓고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멀어졌을 즈음 후작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아마 타살 정황이 보이는 문서가 공개될 게다. 우리에게 의심이 쏟아지기 전에 에오넬에게 뒤집어씌워야지. 어른들을 움직이는 건 어렵지만 애들은 쉬워. 무엇보다 어른과 비교하면 입도 싸고.”
그렇기 때문에 민티아가 사교계에서 10대 영애들을 초청해 파티를 열 자격, 즉 사교계의 공식 호스티스 자격을 얻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같은 이유로 그런 사사로운 사교 파티에 개인적으로 초대받을 자격을 얻는 것 역시도.
“문서 기밀이 해제되기 전에 소문부터 돌려야 해. 세르피스 후작과 에오넬의 사이도 지나치게 좋아. 떨어뜨려 놓을 필요가 있어. 완전히 떨어뜨려 놓지는 못해도 세르피스 후작에게 찝찝한 마음은 남겨 둘 수 있지.”
민티아에게 직접 소문을 내게 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적어도 수상하다는 뉘앙스를 풍길 수는 있다. 가면 파티를 열고 얼굴을 가린 채로 믿을 만한 입담꾼을 슬그머니 파티장에 풀어 소문을 구체화하는 것도 방법이다.
결국, 세 사람은 민티아를 데뷔시키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남매는 서로 감정만 잔뜩 상한 채 형식적인 인사를 끝으로 헤어졌다.
그렇게 친정 식구들을 내보낸 황후는 시녀장 리사를 불렀다.
“소각장에서 몰래 태우게.”
소매 끄트머리가 볼썽사납게 찢긴 연녹색 드레스였다. 드레스의 치렁치렁한 치맛단에는 시들어 마른 나뭇잎이 조금 붙어 있었다. 아마 소매는 나뭇가지에 긁힌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리사는 걱정스레 황후에게 물었다.
“어머나, 폐하. 대체 어디서……. 팔은 안 다치셨습니까?”
“알 것 없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태우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