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에오넬은 모든 파티 기획을 마치고 마지막 남은 서류 작업에 돌입했다.
“이제 이대로 맞춰서 진행하도록 하고. 데뷔 신청 접수를 시작해.”
“이게 끝이라고요? 데뷔 이벤트도 이게 끝인가요?”
시녀는 정말 최소한의 것만 갖춘 데뷔 무대 기획서를 들고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황후가 얼마나 불을 뿜을지 눈에 선했다.
“차라리 아예 없애시는 편이…….”
“어마마마께서 올해 비정기 데뷔 무대를 한 번은 가져야 신년회에서 아이들이 너무 몰리지 않을 거라고 하셨잖니?”
에오넬 황태녀는 꼭 이럴 때만 제 계모를 어마마마라고 불렀다.
“하오나…….”
시녀는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걱정스러워하다가 제가 주제넘게 나설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고 생각마저 멈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심하지 않나? 아무리 그래도 황후의 생일을 기념해 여는 파티의 오프닝 이벤트인데. 그것도 외국 사신들까지 초청한 파티에서 이렇게 마지못해서 하는 이벤트라는 걸 티 낸다면 황후는 분명 모욕으로 받아들일 터다. 아니, 황후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어디 이래도 민티아를 데뷔시킬 건지 봅시다. 우린 프리체 백작 영애를 절대로 데뷔시킬 생각이 없거든요, 어마마마. 후훗!’
프리체 백작 영애는 황태손의 예동이다. 프리체 백작 영애가 아니라 아멜리아를 생각해서라도 절대 아무 시기에나 함부로 데뷔시킬 수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간단했다.
‘민티아의 데뷔 무대도 엎어 버리면 되지.’
이렇게 했는데도 데뷔시킨다면 정말 후작가의 그 대단한 정신력 하나만큼은 인정해 줄 수밖에 없다. 더불어 아깝지만 3개월 뒤처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치고 상대의 정신력과 독기를 확인한 값을 치렀다고 생각하면 된다.
에오넬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으로 나갔다. 잘그락거리는 돌길 옆으로 작은 수로를 타고 맑은 물이 쫄쫄 흘렀다. 물길이 시작되는 곳에는 유리 분수대가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다.
일을 마치고 갖는 잠깐의 휴식, 이 산책 시간이 상쾌하다.
그때 밖에서 시녀 하나가 달려 들어왔다.
“전하! 황태녀 전하! 라파트니 대공국의 사절단이 왔습니다.”
호들갑을 떨며 달려 들어오는 걸 보니 방금 도착한 모양이었다.
사신들은 먼 곳에서 올수록 예고한 도착일과 하루 이틀 차이가 나곤 했다. 가뜩이나 일찍 오겠다던 라파트니 대공국은 예정보다 이틀이나 더 일찍 와버렸다. 황궁 안에서 대접해야 할 귀빈 중에서는 제일 먼저 도착한 셈이었다.
다행히도 파티 때까지 귀빈들이 머무를 궁은 일찌감치 손님맞이 준비가 끝났으니 그쪽은 더 신경 쓸 것이 없었다.
에오넬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며 눈을 감고 묵직한 바위 냄새와 시원한 물 냄새를 깊이 마셨다.
“귀빈실은 준비가 끝나지 않았느냐. 나머지는 외교부에서 알아서 하겠지.”
“그것이 아니오라…… 아무래도 비는 시간에 사절단을 찾아가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내가? 왜? 사절단 대표로 누가 왔는데?”
“라파트니 대공이 직접 왔다고 합니다.”
***
메리는 터덜터덜 궁의 북쪽, 하녀들의 생활관으로 향했다.
황궁에는 시간에 따라 출퇴근하는 궁인들이 더 많지만, 간혹 이런저런 이유로 황궁 안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궁인들도 꽤 있었다.
1년 차 하녀 메리는 황태손 궁에서 황태손의 드레스룸을 청소하고 황태손의 자잘한 빨래를 세탁하는 일을 해왔다. 이제 갓 입궁한 신입, 그것도 손도 성치 않은 하녀가 맡기에는 꽤 큰일이라 하녀들 사이에서는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생활한 지 1년…….
‘벌써 1년이 다 되었나.’
볼에는 정교하게 만든 얇은 화상 자국이 붙어 있다. 아멜리아 황태손이 특별히 신경 써준 덕분에 공기도 잘 통하고 티도 잘 나지 않는 부분 가면을 맞춤 제작 한 것이었다. 평소에는 착용한 줄도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옅은 그 가면이 어쩐지 오늘따라 유독 답답했다.
저녁노을이 지는 하늘의 빛깔이 오늘처럼 은은해도 아름답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아…… 아…….”
지금까지 그녀를 버티게 한 건 독기뿐이었다.
그녀의 가문은 황도에서 유명한 가문은 아니지만, 황후궁 끄트머리 시녀 자리로 제 딸을 밀어 넣어 볼 정도, 딱 그만큼은 힘 있던 귀족 가문이었다. 그런 가문이 한순간 자신의 실수로, 그리고 누명으로 풍비박산이 났다.
그러나 그런 가족들에게조차 나 아직 살아 있다고 전할 방법이 없었다. 전해서도 안 되었다. 마리라는 인물은 아예 살아 있으면 안 되는 존재였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진짜로 죽고 싶었다. 복수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살아야 해.’
살아서 어떻게든 무고함을 증명하고 황후에게 복수해야 한다. 이렇게 기회까지 얻지 않았던가.
만일 정말로 다 팽개치고 죽어 버린다면 황태손이 지켜 준 자신의 가문이 이번에는 정말로 뿌리까지 뽑혀 나갈지 몰랐다. 그녀가 쓸모없는 패가 된다면 황태손은 그녀의 가문을 미련 없이 버릴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자매들이 볼모였다.
‘황후를 무너뜨릴 무언가…….’
떠올리고 싶다. 뭐가 되었든 그녀를 나락에서 건져 올려 기회를 쥐여 준 아멜리아 황태손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러나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때였다.
“라파트니 대공국에서 사절단이 왔대!”
지나가는 하녀들끼리 떠드는 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어 왔다.
“이번에는 대공 전하도 오셨다며?”
“나 이번에 귀빈실 청소 담당이라서 아까 시녀님들 따라서 그쪽에 가봤거든? 대공 전하를 봤어!”
“어머, 어머! 진짜?”
하녀들이 호들갑을 떨며 지나쳤다.
“엄청 잘생기셨어. 서른이라고 해도 믿겠더라니까?”
“그런데 왜 여태 대공비가 없지?”
“그러게.”
“나는 옛날에 황태자 전하 살아 계실 때는 에오넬 황녀 전하께서 대공비 전하가 되실 줄 알았어.”
“앗! 나도, 나도. 까르르!”
하녀들은 대공국과 대공에 대해 조잘거리며 숙소로 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대공은 그 흔한 스캔들 문제 한번 터진 적 없고, 이쯤 되면 튀어나올 법한 숨겨 둔 정부나 사생아 이야기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세간에는 대공이 남색이라는 소문까지도 돌았다.
그러나 하녀들은 그런 부분까지는 입을 아꼈다. 황궁 물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먹으려면 혓바닥을 조심해야 했다.
메리는 하녀 숙소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빨리 가서 쉬고 싶어 지름길을 택했다. 기사단과 황제의 황금궁 사이에 있는 거대한 화원을 지나서 가면 훨씬 빠르다.
그 화원은 이따금 높으신 분들이 찾는 휴게 공간이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하인이나 하녀가 지나다니는 일이 거의 없었다. 높으신 분들을 마주치는 것이 껄끄럽기도 하거니와, 애초에 그들은 이 미로 같은 화원의 출입구와 내부 지리를 잘 몰랐다.
그러나 옛날 황후궁 시녀였던 마리는 정령의 화원이라 불리는 이곳에 자주 산책을 하러 왔었다. 내부 지리와 반대쪽 출구는 훤하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이쪽 화원으로 높으신 분들이 올 일은 없다는 사실까지 꿰고 있다.
메리는 정령의 화원 안에 발을 디뎠다. 봄꽃 위주로 이루어진 이 화원은 가을에 그다지 볼 것이 없어서 요 시기에는 대개 반대쪽에 있는 하늘의 화원에 사람이 많다.
메리는 숨을 깊게 쉬었다.
“하아!”
기분이 좋았다. 양옆으로는 파란 잎사귀가 무성했다. 일부 땅은 휴지기에 들어가 아무것도 심지 않은 흙뿐이었지만 그마저도 정겨웠다.
그때였다.
“거기 누구냐!”
바스락! 타다닥!
마치 고양이 도망치듯 날랜 소리가 들리면서 맞은편 풀숲 사이에서 붉은색 무언가가 사르륵 휘날리면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바로 앞 모퉁이에서 키 큰 중년 남성이 메리 앞으로 튀어나왔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 아…….”
갑자기 울고 싶었다. ‘아.’라는 말밖에 할 수 없는 혀가 원망스러웠다.
그년에게 잘리지만 않았어도!
메리는 두 손을 모아 왼손 밑으로 손가락이 잘린 오른손을 감추었다. 그러고는 그 상태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어졌다.
“누구냐고 물었다.”
“흐…….”
메리는 고개를 들어 혀를 내보였다. 남자가 징그럽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윽!”
메리는 그 남자의 얼굴을 저도 모르게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낯이 익었다. 그것도 몹시.
‘누구였지?’
누구였는지 차분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자가 물었다.
“여긴 뭐 하러 들어왔느냐?”
메리는 오른손을 앞치마 밑으로 감춘 채 왼손으로 그간 꾸준히 연습해 온 글씨를 흙바닥에 끄적였다.
[하녀 숙소]
그러고는 숙소 방향 출구를 가리켰다. 남자는 메리가 가리킨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한번 툭 던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던 길이나 마저 가거라.”
그러고는 무심하게 뒤돌아 사라졌다. 메리는 허겁지겁 일어나 숙소 방향으로 달렸다. 급하게 달리다 넘어지는 바람에 하녀복 앞치마에 있던 소지품이 와르르 쏟아졌다.
“아…….”
메리는 바닥에 떨어진 소지품을 마구 쓸어 담아 주머니에 넣고 다시 달렸다.
자신의 주머니에 뭐가 딸려 들어갔는지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