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그때 뺨을 맞은 게 아직도 화가 덜 풀린 걸까?
나는 활짝 웃으며 아르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살살 쓰다듬었다.
“몰딘 남작을 잡으면 너에게도 그자의 면상에 주먹을 날릴 기회를 주도록 하겠다.”
“……그런 것이 아니라…….”
아르가 당황하며 티슈로 손과 테이블의 과자 부스러기를 닦았다.
“그럼 내 몫까지 두 번 때려라. 내가 때려 봤자 아프지도 않을 것 같으니.”
이번에는 의외로 빠르게 대답이 나왔다.
“알겠습니다.”
음, 마음에 드는군!
나는 아르가 얌전히 앉아서 다시 쿠키를 집어 먹는 것을 보고 엘비어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남작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갔던 주제에 담도 크군요. 부인에게 이혼은 안 당한답니까?”
“다른 귀족들의 압박 때문에 제대로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부인이 일방적으로 이혼을 통보할 명분이 없잖아요. 게다가 남작가의 재산은 전부 그자가 들고 들어와서 불린 겁니다. 부인에겐 작위만 있을 뿐 이혼 소송을 진행할 돈이 없죠.”
엘비어스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비록 적이라곤 해도 전 그자의 사업적 능력을 높게 쳐주고 있습니다. 평민들에게 고리대금 하는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사업은 전부 깨끗하게 운영하는 터라 그쪽으로는 털어 봐도 먼지가 안 나와요.”
조금 아쉽다.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사업도 탈탈 털어서 개털로 만들어 놓고 시작하고 싶었는데.
“그럼 사업 쪽은 어쩔 수 없죠. 경비대에서 포기한 수사를 제대로 다시 하도록 하겠어요.”
“아마 경비대 수준에서는 영지를 빼앗을 수 있을 만큼 깊이 있는 수사는 불가능할 겁니다. 확실한 방법을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엘비어스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불가능하다고?’
“왜요?”
“아까 말했듯이 귀족과 시비가 걸려야 사건이 황도 치안 경비대에서 귀족원의 수사기관으로 넘어갈 겁니다.
그래야 정말 제대로 수사가 진행될 거고요. 설령 저하와 제가 공정한 수사를 하도록 경비대에 압박을 넣는다 해도, 남작과 얽힌 귀족들이 은밀하게 방해할 겁니다. 사이에 끼어 있는 경비대만 눈치 보느라 죽어날 테고, 그사이 남작은 증거를 인멸해서 발을 빼버리겠죠.”
아니, 그게 아니잖아!
“저는요? 제가 나서면 되죠. 저도 피해자인데요.”
“그날 황궁 밖으로 나간 것은 비밀로 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땐 숙부님의 무단 외출로 궁이 시끄러워 그런 거니 괜찮아요. 사람들은 내가 로즈벨리아에 왜 갔는지보다 남작의 범죄에 관심이 더 많을 테니까. 게다가 로즈벨리아는 귀족 영애들이 자주 찾는 패션, 액세서리, 취미용품 전문점이 많으니 조용히 구경하러 나갔다고 하기도 좋고요. 누구처럼 작부촌을 끼고 있는 유흥 거리에 간 것보단 낫지 않겠어요?”
나는 당당한 얼굴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할바마마는 이미 그날 일을 다 알고 계신다.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하자 그렇게 하라고 하셨고. 고모님께도 몰딘 남작에 관한 이야기만 말씀을 안 드렸을 뿐이지 내가 사실 몰래 외출했었다는 이야기는 했다.
이미 혼날 것도 다 혼났다. 생각보다 많이 혼나서 문제지. 그때 고모님께 회초리로 맞은 종아리가 아직도 저릿한 기분이다.
몰딘 남작 그놈만 아니었어도 그날의 외출은 숨기려고 했건만!
그래도 곧 다가올 달콤한 복수를 꿈꾸며 나는 행복한 상상을 했다.
“이번에 황후의 파티 때 몰딘 남작에게도 초대장이 가도록 할 거예요. 그자가 내 얼굴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너무 궁금하네요.”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엘비어스가 소리 낮춰 큭큭 웃었다.
“저하께서는 그냥 몰딘 남작이 당황하는 꼴을 보고 싶으신 거죠?”
“그것도 있고……. 어쨌든요. 흠흠!”
사실 숙부에게 몰딘 남작의 코딱지만 한 변방 영지 쥐여 주고 쫓아내는 것은 너무 먼 일 같아 보였다. 그보다는 당장 몰딘 남작의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는 것이 더 통쾌할 것 같다. 그러나 그 말은 입 밖으로 못 내놓을 말이었다.
황태손으로서 위엄이 없어 보이잖아!
그러다 중요한 사실이 생각났다. 영지를 빼앗는 데까지는 무리가 없다. 그런데 그 이후는?
“그런데 그 영지는 어떻게 숙부에게 떠넘길 생각이세요?”
“크로이젠 공작께서 우리 쪽 귀족들을 선동하여 간언을 올릴 겁니다. 에오넬 황태녀 전하께서도 성년을 넘긴 황녀 시절에 작위를 받아 황궁 밖으로 나가 생활하셨으니 황자 전하께서도 출궁하실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요.”
“그러다 할바마마가 황도 근처의 영지를 쥐여 주면요?”
그래도 아들인데. 그래, 우리에겐 적이지만 할바마마에겐 아들 아닌가.
그러나 엘비어스는 별로 걱정할 것 없다는 듯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역대 황자들을 그런 방식으로 내보냈던 이유는 황태자의 지위를 공고히 다져 주기 위함이라 대부분 황도에서는 먼 영지를 하사했어요. 아들이니 좋은 영지를 쥐여 줄 수는 있지만 절대로 황도 근처로는 잡지 않을 겁니다. 설령 그런다 해도 전례가 없다며 우리 측 귀족들이 귀족원에서 필사적으로 막을 거고요.”
“그렇담 관건은 숙부가 출궁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숙부가 받을 땅이 몰딘 남작에게서 빼앗은 황무지 국경이냐 아니냐, 이거겠군요.”
“예. 그것이 아마 주된 쟁점이 될 겁니다.”
***
아멜리아 황태손이 잠행을 떠난 라벤더궁. 시녀들은 여느 때처럼 굴었다. 매일 하던 산책만 없었을 뿐, 일상과 똑같은 하루처럼 보였다.
아침 점심 저녁 식사도 전부 정상적으로 황태손의 방까지 들어갔다가 시녀들이 한 입씩 증거를 인멸한 것인지 나올 때는 빈 그릇이었다.
첫날 오후에는 엘비어스의 부탁을 받은 공작 부인이 방문했다. 그녀는 아멜리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척 응접실에 들어가 혼자 두 시간 정도 차를 마시며 책을 읽다 조용히 나갔다.
키옌은 라벤더궁에 심어 둔 하인을 통해 시녀가 알아 온 것들을 전해 듣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치밀한 늙은이.”
정말 아무렇지 않게 일상처럼 돌아가는 상황이라는 말을 듣자 괜스레 찝찝했다. 마치 나가는 걸 누가 알면 꼭 죽이러 쫓아갈 거라고 예상했다는 듯이…….
“폐하, 그런데 정말 황손이 밖으로 나간 게 맞을까요?”
“아프거나 비가 오지 않는 이상 산책은 늘 해왔어.”
황후가 고개를 젓자 시녀가 조심스레 말했다.
“고작 하루 안 보인걸요. 그냥 컨디션이 나빴던 것 아닐까요? 게다가 호위기사들도 빠짐없이 전부 다 있고요.”
잠행을 나갔으면 시녀는 놓고 가더라도 최소한 호위를 데려갔을 게 아닌가. 그런데 휴가자 한 명 없이 전부 다 정상적으로 출퇴근했다.
“내일도 계속 라벤더궁을 주시해.”
“예.”
시녀는 황후의 이런 유난스러운 명령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은 다소곳하게 인사하고 물러갔다. 키옌은 초조하게 손톱을 뜯었다.
황태손 또래의 여자아이가 라벤더궁에서 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하녀들의 정보는 입수했다. 그리고 그들이 어디로 향했는지도 알아냈다.
‘죽일 수 있겠지?’
***
해가 지는 저녁,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귀가하기에는 이르고 거리는 잠깐 시끄러워지는 선선할 즈음이었다.
우리는 이르게 저녁을 먹고 노상 카페의 거리 쪽 테이블에 앉아 넓은 광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엘비어스는 영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커피를 휘적거렸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합니까? 도대체 찾으신다는 이상한 종교가 뭐길래요?”
“음…… 종말론?”
종말론, 아예 틀린 설명은 아니니까.
그러나 내 대답에 엘비어스가 더욱 짜증 가득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런 게 이 동네에 한둘입니까?”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그중에서 어떤 사이비를 찾으시냐고요.”
“전염병 종말론.”
이곳 ‘엔델포프 경제 특수구역 황제 직할령’은 지난 생에서 전염병의 진원지로 꼽혔던 곳이었다. 그러니 아마 포교 활동도 이 동네를 중심으로 시작하지 않을까?
엔델포프는 제국의 모든 물자가 모였다가 흩어지는 곳이다. 그런 만큼 제국 전역에서 다양한 사람이 모였다가 다시 사방으로 흩어지는 곳이다. 심지어 제국 국세청 본청도 황도가 아닌 엔델포프에 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전염병을 제국 전역으로 퍼뜨리기에 여기보다 탁월한 선택은 없다.
“전염병……?”
엘비어스는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말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였다. 이 커다란 광장의 남동쪽 거리에서 사람 한 무리가 나왔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리만이었다.
그들은 광장 한복판에 간이 간판을 세워 놓고는 무슨 음료를 한 잔씩 나누어 주었다.
‘저건 또 무슨 포교 활동이지?’
“아르, 가서 보고 와.”
“예.”
아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엘비어스가 아르의 팔을 잡아당겨 다시 자리에 앉히고는 제가 일어났다.
“잠깐.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예?”
“직접요?”
나와 아르가 동시에 엘비어스를 올려다보았다.
“저자들이 애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느 정도 정보를 이미 알고 있는 아르를 보낼 것인가, 아니면 책사 엘비어스를 보낼 것인가.
나는 빠르게 결정했고 빠르게 이야기했다.
“저자들이 주는 건 마시지 말아요.”
엘비어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멀어졌다. 그동안 할 일이 사라진 아르에게 작은 밀폐 유리병을 사 오라고 했다.
엘비어스는 아르가 돌아오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컵에다 민트 이파리를 하나 띄운 노란 물을 한 모금 들고 돌아왔다.
“이게 뭐예요?”
“질병의 신의 성수라고 하루에 한 잔씩 마시면 모든 질병을 막아 준다는 헛소리를 하더군요.”
“그런 수상한 음료를 받아먹는 사람이 꽤 되네요.”
“사람들 말로는 평범한 과일즙이나 채소즙이랍니다. 매일 저 자리에서 나누어 주고 있고요. 다른 종교처럼 지극히 평범한 포교 활동입니다. 길에서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건 별로 수상한 일이 아니에요. 오렌지즙을 성수라고 부르는 건 수상한 일이지만요.”
그게 수상한 건 나도 인정한다.
“그래서 뭐라고 하던가요? 3년 후에 신벌이 내릴 거다, 이런 소리 안 하던가요?”
“1년 후에 온답니다. 1년 후에 제국민의 3분의 1 이상을 죽일 신벌이 시작될 거라네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3년이 아니라?
“다시 말해 봐요.”
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