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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58화 (58/148)

58화

뒤늦은 후회와 함께 창피함이 밀려들었다.

‘장미도 백합도 아니고 이게 뭐지.’

하다못해 이름 모를 들꽃이었다 해도 나뭇잎보다는 덜 초라할 거다.

급하게 뒤로 감추려던 손이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끝을 스쳤다. 화들짝 놀란 그 순간, 애써 모았던 단풍이 바닥으로 사르륵 쏟아졌다.

급히 시선을 피하려고 했으나 그것마저 왠지 모르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소, 소신이 결례를…….”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티 없이 웃었다. 그녀를 향해 품은 마음이 너무 시커멓게 느껴질 정도로 맑은 웃음이었다. 그렇게 양심의 깊은 곳을 한없이 파고드는 얼굴로 그녀는 순진한 척 말을 걸었다.

“대체 네 욕망은 무엇인지 모르겠어…….”

비현실적으로 선명한 목소리였다.

아니, 사실 이 목소리가 이곳에서 가장 현실적일지도 몰랐다. 주변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저 목소리 혼자 붕 떠 있는 느낌이다.

“저는…….”

멋대로 입술이 떨어지려던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러자 재촉하듯 목소리가 이어졌다.

“말해 봐. 뭐든 줄게.”

눈동자만큼이나 새빨간 입술이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새카만 덩어리를 유혹하듯 끄집어냈다.

‘원하는 건 다 줄게.’

악마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천사 같은 얼굴로 금발에 새빨간 눈을 가진 악마가 속삭였다.

‘그게 무엇이든 다 줄게.’

그 순간, 이 세상 모든 것이 갑자기 한 점, 그녀의 입술 끝으로 모여들어 사라져 버렸다. 아름다웠던 궁도, 호수도, 달빛도, 단풍도.

오직 달싹이는 붉은 입술, 욕망을 말해 보라는 그 달콤한 목소리만 세상에 존재하는 듯했다.

이성을 놓고 그것을 집어삼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부드럽고 말랑한 촉감이 입술 끝에 짓이겨지듯 눌렸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다급하게 갈구하듯 빨아들이고 있었다. 두 손 가득 머리카락이 실처럼 들어와 손가락 사이사이에 얽혔다.

스물세 해. 아니, 스물세 해와 또 한 번의 스무 해. 그리고 또다시 열한 번의 해.

그 모든 삶을 통틀어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충족감이 차올랐다. 온몸이 녹아내릴 정도의 전율이 일었다.

오래전, 토해 냈던 거짓말이 불쑥 머릿속에 떠올랐다.

“너는 왕도를, 나는 기사도를 걷자.”

그때 느꼈던 모든 허무함, 공허했던 가슴이 순식간에 메워지고 혀끝에 걸려 뱉지 못한 말이 다급하게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사실 거짓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말 한마디조차 할 틈 없이 조급했다. 그런 말을 꺼내는 시간까지도 아까웠다.

조금이라도 더 깊이, 조금만 더 농밀하게, 하지만 무엇보다 달콤하고 부드럽게……. 애절하게 매달릴수록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더욱 선명했다.

“원하는 게 무엇이든 다 들어줄게.”

사실은 이 세상 그 무엇도 닿지 않는 아주아주 은밀한 곳에 당신을 가두고 이렇게 혼자서만 독차지하고 싶었습니다.

그것도 들어줄 수 있습니까.

그녀의 손이 부드럽게 그의 얼굴을 쓸어내리다 귀밑 목덜미에서 멈추었다. 저항 없이 벌어지는 입술 안으로 욕망을 채워 나가듯 혀를 밀어 넣고 더 깊이 숨을 쉬었다. 달콤했다.

그 순간, 코끝에서 생생하고 따뜻한 바람이 느껴졌다. 지금까지의 비현실적인 감촉과는 결이 다른 감각이었다.

눈이 확 뜨였다.

아멜리아 황녀…… 아니, 아멜리아 황태손이었다.

입술 끝에 쌕쌕 내쉬는 그 작은 숨이 닿았다. 조그만 손가락이 꿈속에서 느껴졌던 그대로 목덜미에 살포시 올라가 있었다.

너무 놀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 앉고 나서야 머릿속이 정리되었다.

이렇게나 깊이 잠들어 있었다니.

“하아…….”

긴장을 놓아도 너무 놓아 버렸다. 그는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나저나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데 엘비어스는 대체 어딜 간 것이며, 아멜리아 황태손은 언제 일어나 침대를 넘어온 것인가.

주변을 둘러보니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캄캄한 것인 줄 알았는데 창문의 커튼이 다 쳐 있어 아침 햇살이 들이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자리에 앉아 내려다보니 아멜리아 황태손이 새우잠 자듯 몸을 동그랗게 말고 쌕쌕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3초가량 내려다보다 문득 조금 전의 그 꿈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동시에 꿈속에서 뿌듯하게 채워졌던 그 충족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아, 이게 현실인데…….’

맞다. 이게 현실이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니 깊은 한숨이 나왔다. 조금은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니, 사실은 아릿하다.

바스락!

옆에서 이불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웅얼웅얼 잠꼬대도 함께였다.

“아르…… 다 줄……”

꿈속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원하는 건 다 줄게. 그게 무엇이든 다 줄게.”

원하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한 것이었다. 오직 그녀만이 줄 수 있는 것, 그러면서 절대로 줄 수는 없는 것.

설령 기적이 일어나 준다 해도 받을 수조차 없는 것.

“그러니 아무것도 안 주셔도 됩니다.”

아직도 입술 끝에는 단풍나무 향기가 맴돈다.

***

경매가 끝나고 우리는 직원에게 평범한 응접실로 안내받았다. 문짝에 14호실이라고 쓰여 있던 몹시 평범한 방이었다. 그곳에서 음료를 한 잔 얻어 마시면서 상품을 인도받고 대금을 치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경매장 지배인이 허겁지겁 응접실로 뛰어 들어왔다.

원래라면 우리 앞에 있을 사람은 지배인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직원일 터였다. 그러나 이렇게 된 이유는 우리가, 정확히는 내가 말도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가격에 액세서리를 구매한 탓이었다.

그리고 난 아까부터 그런 이유로 엘비어스에게 탈탈 털리고 있다.

엘비어스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게 제가 한다니까 왜 번호푯말을 뺏어 가셨습니까. 그리고 할 거면 최대한 조용히 구매하라고 했을 텐데요.”

“그치만 골드도 아니고 실버 단위로 야금야금 올라가는 걸 언제 기다려? 답답해서 못 참아.”

경매 시작가는 1골드였고 누군가 푯말을 들어 올릴 때마다 겨우 몇백 실버씩 상승했다.

“그래서 갑자기 50골드나 지르셨습니까? 그게 어느 정도인 줄이나 아십니까?”

50골드가 50골드지 뭐야?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엘비어스의 귀에 속삭였다.

“그래서 얼만데?”

엘비어스가 정말 모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아르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놈 연봉이요.”

50골드가 연봉이라고? 그거 거짓말이지?

“그거밖에 못 받아?”

“말단 기사 연봉이면 평민 상류층입니다.”

“그거 생명수당, 야간수당 포함 안 하고 세후로 계산한 거 맞지?”

그 순간 나는 엘비어스의 얼굴에 쓰인 말을 읽고 말았다.

‘아홉 살이니까 참자……. 저하는 아홉 살이다.’

엘비어스가 꽉 눌린 심호흡을 하며 아르를 쳐다보곤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야, 혹시나 해서 말인데. 너도 화나도 참아라.”

그런 엘비어스를 슬쩍 올려다본 아르가 무표정한 얼굴로 내 반대쪽 귀에 속삭였다.

“세전이고 수당 전부 포함입니다.”

세상에!

내가 쪼잔한 황궁 공무원 월급에 경악하는 사이, 경매장 지배인은 뛰느라 차올랐던 숨을 골랐다. 그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간략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고는 새하얀 면장갑을 낀 손으로 우리 앞에 커다란 보석함을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상품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오오, 이것이 세이렌의 시리즈!

나는 보석함 안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금속을 경이에 찬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스케일링까지 말끔하게 된 은세공작품 세 점이 은빛 찬란하다.

“와……!”

나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경매장 지배인이 기쁨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어떠십니까. 정말 아름답지요?”

지배인은 테이블 위에 케이스를 내려놓고 면장갑을 낀 손으로 액세서리와 보증서를 하나하나 꺼내 꼼꼼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보증서 위에 붉은 쿠션, 그 위에 목걸이와 귀고리와 반지가 자리에 맞게 놓였다. 마지막으로 케이스 뚜껑을 닫고 붉은 비단으로 케이스를 예쁘게 말아 포장했다.

지배인이 엘비어스에게 물었다.

“나리, 대금은 어떻게 내시겠습니까?”

그리고 엘비어스가 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내실 겁니까?”

“아이쿠, 실례했습니다. 아가씨께서 구매하시는 겁니까?”

지배인이 얼른 자세를 내 쪽으로 틀어서 고쳐 앉았다.

어? 나?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보석함을 쳐다보며 ‘예쁘다.’를 연발하다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지배인이 내 얼굴을 한번 의아하게 쳐다보는 것이었다.

“설마 아가씨께서 직접 착용하시려는 건 아니시겠죠?”

이 액세서리의 전설과 의미를 알고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

당연히 알지!

이것은 황후를 고상하게 엿 먹일 수 있는 생일 선물이다. 내게 이 액세서리의 경매 정보를 가져와 직접 사러 나가자고 처음 제안한 사람은 엘비어스였다.

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액세서리 공방에서 나온 작품 중 하나인데 세이렌의 전설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나?

그 전설은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요정 세이렌이 음악의 여신에게 감히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날개가 뽑혀 바다로 추락했다는 내용이다.

어쨌든 자기 자신이 착용할 목적으로 구매하는 액세서리의 전설로서 적절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런 만큼 적어도 황후에게 ‘분수에 넘치는 것을 탐내다 다치기 전에 가지고 있는 자리나 지켜라.’라는 메시지는 확실히 전달될 것 같다.

황후가 이걸 받고 얼굴이 일그러질 것이라 상상하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지배인을 향해서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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