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마차에서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뜨니 낯선 침대 위였다. 당황한 나는 몸을 일으켜서 주변을 멍한 정신으로 둘러보았다.
‘호텔인가?’
지난번 대 기우제 때 묵었던 호텔처럼 초호화 호텔은 아닌 것 같다. 바로 출입문으로 보이는 곳의 낮은 선반 위에 신발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욕실이 보였다. 방은 꽤 넓긴 했으나 원룸 형태였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건너편의 침대에서 아르와 엘비어스가 나란히 뻗어 자고 있었다.
‘둘이 안 친한 줄 알았는데 친한가 보네.’
나는 히죽 웃으며 이번에는 뒤를 보았다. 창문이 보였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해가 뜨기 직전인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아르가 자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침대 위에 멀뚱멀뚱 앉아서 아르와 엘비어스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러는 사이에 엘비어스가 비척비척 일어나더니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나른하게 하품을 했다.
“하아아아암!”
그러고는 세상모르고 자는 아르를 제일 먼저 한번 쓱 내려다보더니 그제야 나를 향해서 몸을 돌렸다.
“잘 주무셨습니까, 저하. 간밤에는 개인실에 모시면 아침에 혼자서 많이 당황하실 듯하여서 이쪽으로 모셨는데 괜찮으신지요?”
이미 일은 벌여 놓고 괜찮냐니.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지만 이런 낯선 방에서 혼자 눈을 떴으면 엘비어스 말대로 놀라서 그대로 한참 이불 뒤집어쓰고 눈치만 보고 있었을 것 같긴 하다.
“괜찮아요. 그런데 아르는…….”
그러자 엘비어스가 쉿,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 앞에 세워 보였다.
“공작가의 호위가 여럿 함께 왔으니 지금 이 녀석은 자게 두세요. 황제 폐하께는 비밀입니다. 근무 태만으로 혼날 겁니다.”
“아…….”
나는 알겠다고 말하려다 곤히 자는 아르를 한번 쳐다보고 고개만 끄덕끄덕 움직였다.
엘비어스는 그사이 침대에서 일어나서 물병에서 물을 한잔 따라 마시고는 아침 브리핑을 시작했다.
“간밤에 저하께서 주무시는 동안 제국 최고의 상업 도시, 엔델포프 황제 직할령에 도착했습니다. 점심 이후에 제국 최대 경매장이 오픈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귀금속 경매 코너에서 이번에 귀금속 세공에 대해서는 최고로 권위 있는 장인의 공방에서 그의 수제자가 이번에 만들었다는 세이렌의 액세서리 세트를 구매하는 것이고요.”
원래는 시녀들이 해주던 일이었는데 제국 최고 공작가의 후계자인 그가 얼결에 시녀 대신 내 스케줄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시녀들 없이 맞는 첫 아침이네.’
“그리고 저녁부터는 개인적으로 아르와 조사해 볼 일이 있다고 하셨지요? 아르는 비밀이라고 알려 주지 않던데요.”
“책사의 힘이 필요하면 내가 먼저 이야기하겠어요.”
그러자 엘비어스는 알겠다고 조그맣게 말하고는 아르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객실 출입문으로 향했다.
“저는 호텔 조식 시간이 되기 전까지 호텔 온천에서 쉬고 나서 마사지를 받고 올 생각인데 저하께서는 어찌하실 겁니까? 외출하실 거라면 호위를 붙여 드리고요.”
그가 문을 열자 밖에는 그가 말한 대로 공작가에서 데려온 호위인 듯한 사람 둘이 문 양쪽에 서 있었다. 그들은 엘비어스가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고개를 깊이 숙여 보였다.
엘비어스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열린 문 앞에 서서 가만히 나를 돌아보았다.
창문 밖을 보니 빛이 없는 건 아니지만 굳이 따지자면 캄캄한 쪽에 더 가까운 듯한 시간이었다. 조식 시간이 되어 호텔 레스토랑이 열릴 때까지는 최소한 두 시간은 남은 듯했다.
“난 더 잘래요.”
“그럼 더 주무세요.”
그렇게 엘비어스가 나가고, 어슴푸레 창문으로 빛이 들어왔다. 침대 위를 곧장 비추는 실낱같은 빛줄기에 아르가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돌렸다.
나는 엉거주춤 몸을 돌려 내 침대 머리맡 창문에 달린 두꺼운 커튼을 쳤다. 모든 커튼을 차곡차곡 닫고 마지막으로 아르의 머리맡에 있는 창문만 남았다. 침대 위로 올라가야만 손이 닿을 거리였다.
나는 침대 위로 엉금엉금 기어 올라가 아르의 옆에 무릎으로 서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히 커튼을 쳤다.
그 모든 작업을 끝마쳤을 때, 방 안에 쥐 죽은 듯한 정적이 밀려들었다. 조금씩 들어오던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의 윤곽 정도를 확인하기에는 충분한 밝기였다.
나는 그대로 스르륵 주저앉았다. 무릎을 W자로 꿇고 앉은 모양새 그대로 조용히 자는 아르를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두 시간 동안 이러고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비어스 님은 이 녀석을 대체 어떻게 재운 거지?’
자는 모습은 영락없는 열네 살 소년이지만 자꾸만 언제나 스물셋의 아르가 겹쳐 보인다.
그러다 문득 궁금했다. 아르도 내가 열여덟으로 보일지.
나는 손끝으로 그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과거이기도 하고 미래이기도 한 그 시절, 스물셋이었던 아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생각으로 나를 회귀시켰던 걸까. 무슨 생각으로 회귀했을까.
이전까지는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문제였다. 그저 ‘충심’이라는 단어 하나로 퉁 치자고 하기에는 그가 밑지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니 언젠가 그에게 세습되는 귀족 작위를 주고 좋은 영지를 내려 어떻게든 그에게 보답할 작정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그가 바라는 것이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만약 그가 그런 물질적인 것만을 좇는 속물이었다면 진즉 나를 배신하고 숙부의 편에 붙었을 테니까.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 가장 귀한 것을 그의 손에 쥐여 주고 싶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평온하게 자는 모습을 쳐다보니 어쩐지 속물은 내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그가 과연 기꺼워할까. 정말로 원하던 것이었을까.
‘너는 대체 무엇이 갖고 싶은 것이냐…….’
반면에 내 욕망은 너무나 확고하다. 황위. 원래 내 것이었던 황관.
그리고 역사에 길이 남을 성군의 자리!
‘원하는 모든 것을 네 손에 쥐여 줄 테니 제발 말해 다오.’
“네 욕망은 무엇인지 모르겠어…….”
내 목소리를 따라 호선을 그리는 입술은 대체 무슨 꿈을 꾸는 것인지 행복해 보이기만 했다.
***
뽀얀 안개가 낀 호수를 걷고 있다. 언제부터 걸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걷고 있다. 분명 안개가 짙은 것 같은데 이상하리만치 시야가 선명했다. 머리는 멍하고 몸도 나른한데 자꾸만 걷고 싶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이곳은 은은한 달빛이 정말 아름다운 서월궁의 후원, 달빛호수였다.
볼테르가 황제가 되기 전까지 서월궁은 아멜리아 황녀의 거처였다. 그녀가 냉궁으로 유폐되기 전까지 살던 이 아름다운 서월궁의 후원에는 호수라고 부르기엔 민망할 정도로 작고 웅덩이라고 부르기엔 넓은 호수가 있었다. 딱 달빛만 담을 수 있는 크기의 호수라 하여 달빛호수라 불렸다.
서월궁의 후원은 특히 가을에 절경을 이루었는데 사방이 온통 단풍나무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풍이 곱게 지는 호수의 둘레를 따라 계속 걸었다. 붉은 이파리가 하늘하늘 떨어져서 호수 위에 파문을 그리며 조각배처럼 떠다녔다. 물속에는 노란 보름달이 그득 담겨 있었다.
밤하늘에서 떨어지는 단풍이 손 위로 사뿐히 내려왔다. 별빛을 머금은 듯 아름다웠다. 평생 보아 왔던 그 어떤 단풍보다도 맑고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불꽃 같았다. 그래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이 아름다운 단풍들을 하나둘 손에 모으며 호수 둘레를 따라 계속 걸었다.
호수 건너편을 향해서 둘레를 하염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저 멀리 희미한 사람 형태가 보였다. 그 모습이 또렷하진 않으나 신기하게도 그 사람 모양이 누구인지 머릿속에 너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열여덟의 아멜리아 황녀였다. 제국법을 기준으로 딱 성년이 지난 나이. 그러나 냉궁에 유폐된 황녀의 성년식 같은 건 없었다.
사실 아멜리아 황녀가 냉궁으로 유폐되었던 건 열여섯이었지만 그런 건 지금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서월궁에 아멜리아가 있다는 사실이 몹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녀는 서월궁에서 가장 큰 단풍나무 아래에 앉아 몸을 좌우로 기분 좋게 흔들고 있었다.
조금씩 걸음이 빨라졌다. 이윽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맑은 루비빛 눈동자가 빤히 올려다본다. 빨려 들어갈 것 같다. 그러더니 여전히 기분이 좋은 듯한 목소리로 나른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그러게……. 내가 왜 여기에 왔더라…….’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냥”이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대답한다면 “그럼 가던 길이나 마저 가렴.” 하고는 갑자기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한참을 머뭇거렸는데 불현듯 손에 가득 주워 왔던 단풍잎이 생각났다. 가장 예뻐 보이는, 루비빛 눈동자를 닮은 단풍. 맞다, 단풍이 그녀의 눈동자 색을 닮아서 모았었다.
그러나 부끄러워 말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고운 단풍잎을 켜켜이 모은 손만 간신히 내밀었을 뿐이었다.
이것이 무엇이냐는 듯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손에 든 것은 꽃이 아니라 그저 나뭇잎 뭉치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