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키옌은 황태녀 궁에서 보내온 편지를 와그작 구겼다.
“이년이 감히 나를 농락해? 내 아무리 저의 계모라 해도 황녀의 버르장머리가 아주 단단히 없구나.”
키옌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아들에게 자신의 독이 거꾸로 날아온 것도 화가 치밀고 알면서도 당해 줄 수밖에 없는 것도 치가 떨렸다. 그런데 이번에 보내온 편지는 숫제 그런 그녀를 놀린다고밖에 해석할 수가 없었다.
키옌이 구겨 바닥에 패대기친 편지를 그녀의 시녀장이 주워 펼쳤다.
「어마마마, 미리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이번 파티의 주인공은 바로 어마마마 아니겠습니까? 주인공이 함께 연회를 즐기고 싶은 이들을 초대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여기까지는 몹시 평범한 문구로 시작하고 있었다.
「어마마마께서 개인적으로 파티 참석을 원하시는 귀빈이 계시면 부담 갖지 마시고 리스트를 작성해 보내 주시겠어요? 소녀가 귀빈들의 명성과 신분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후에 일괄적으로 초대장을 발송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하 생략)…….」
제까짓 게 뭔데 자신의 귀빈 리스트를 검토한단 말이야? 그러면서 뭐? 함께 연회를 즐길 귀빈이 있느냐고? 부담 갖지 말고 말하라고?
키옌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때였다. 키옌을 친정에서부터 모시던 오래된 시녀 한 명이 급하게 키옌의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황후 폐하!”
“무슨 일이냐?”
시녀가 한달음에 달려와 황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분노로 새빨갛던 그녀의 얼굴이 차츰 가라앉았다. 동시에 뜨겁던 주변의 공기도 싸늘해졌다.
‘황태손이 제대로 된 호위도 없이 그림자만 데리고 잠행을 나간다…….’
황제 궁의 정원사가 황제와 황태손의 대화를 엿듣고 그 사실이 이렇게 황후의 귀에 들어가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반나절. 정원을 손질하던 이름 모를 황후의 끄나풀이 높게 자란 덤불 너머에서 황제와 황태손의 대화를 모두 들었을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거다.
이건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황태손을 황궁 밖에서 암살하고, 실종 처리 할 기회.
***
‘죄송해요, 할바마마. 사실은 황후의 선물을 구하러 가는 게 아니에요.’
나는 황궁을 빠져나오자마자 뒤를 돌아보고 마음속으로 할바마마께 용서를 빌었다.
황후의 선물은 그저 명분일 뿐. 진짜 목적은 지난 생에서 전염병이 최초 발생했던 근원지인 제국 최대 상업 도시, 제국 물류의 중심지에 조사를 나가는 것이다.
‘앞으로 3년 후, 전염병이 창궐한다면 이미 밑 작업은 오래전 시작되었을 거야.’
더구나 이것이 천재가 아닌 인재인 이상 어쩌면 시기가 앞당겨질지도 알 수 없다. 이미 이 사건과 관련해 많은 것이 바뀌었다. 게다가 리만이 대놓고 꼬리를 밟혔으니 조급해진 그들이 언제 일을 터뜨릴지는 사실상 미지수였다.
시녀들과 호위기사들 그리고 유모에게는 할바마마께서 알아서 입단속을 하겠다고 하셨다. 공식적으로 나는 황궁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시녀와 유모들, 그리고 호위기사들은 평소처럼 나를 모시고 있는 척을 할 필요가 있었다.
몇 시간 전, 저녁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각이 되자 나는 할바마마께서 마련해 주신 임시 황궁 출입증과 잠행용 신분증을 챙기고 황궁 밖으로 향했다.
황궁의 대문을 하나하나 지날 때마다, 근위 기사들이 혹여 나를 알아볼까 심장이 바짝 쪼그라들었다. 혼자 밖으로 나오는 것에 성공하자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황궁 동쪽의 마지막 대문을 통과하자 길모퉁이에서 엘비어스와 아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저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저하.”
“아르! 엘비어스 님!”
“일단 마차에 타시죠.”
그들이 서 있던 모퉁이 저 뒷길에는 묵직한 고동색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마차는 엘비어스가 준비하기로 했는데 공작가의 것이 아닌 마차 대여소의 마부와 마차였다.
두 명이 알맞게 앉을 정도의 폭을 가진 마차는 황궁 마차보다 좁았다. 내가 자리를 잡자 아르가 나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고 엘비어스가 내 옆에 앉았다. 곧 마부가 황도 바깥으로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따각따각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조금 멀게 느껴졌다. 승차감은 별로였지만 방음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설마 할바마마께서 내게 붙이겠다고 하신 그림자 호위가 너야?”
“네. 정확히는 폐하께서 보내신 게 아니라 제가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할바마마께서 순순히 보내 주셨네?”
“저하께서 대놓고 저를 잘 아는 척 티 내셨잖아요.”
내가? 그렇게 티가 났나?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아르가 한숨을 폭 내쉬며 마차의 유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와 말을 섞지 않겠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엘비어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엘비어스 공자는 공작님께 뭐라고 하고 나왔어요?”
“전 이미 성인인데요. 그냥 개인적인 일로 엔델포프에 다녀오겠다고만 했습니다.”
와, 나도 빨리 어른 되고 싶어!
“윽! 부럽다.”
“저하께서는 근위 기사들에게 뭐라고 둘러대고 황궁 동문을 통과하셨습니까?”
“라벤더궁 유모의 본가 하녀인데 편지를 전하러 왔다가 나간다고 했어요. 유모와도 입을 맞춰 두었고요.”
“무난하게 잘 둘러대셨군요.”
곧 마차가 황도의 마지막 성문에 다다랐다. 곧 밖에서 마차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똑!
아르가 손을 뻗어 문을 열자 경비병이 마차 안으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대 기우제 때 황실 문양의 마차를 타고 나갈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몹시 두근거렸다. 맞은편에 앉은 아르와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아르도 희미하게 피식 웃었다.
우리는 각자 크로이젠 공작가의 백금 증표, 제국 기사 패, 가짜 임시 신분증을 보여 주고 무사히 황도를 빠져나왔다.
성문 밖으로 나오자 우리 앞에 펼쳐진 풍경은 들판을 지나서 숲과 산을 끼고 있는 흙길이었다.
“산 하나만 넘으면 바로 엔델포프 황제 직할령이 나올 겁니다.”
아르가 마차의 천장에 걸어 둔 램프의 스위치를 조절해 조도를 희미하게 낮추었다. 간신히 각자의 형체만 확인 가능 한 수준이었다. 유리창 밖은 새카맣다.
“네다섯 시간은 꼬박 달려야 할 테니 주무십시오.”
“하지만 너무 기대되어서 잠이 안 올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말하며 유리창에 이마를 바짝 붙였다. 마차의 흔들림이 그대로 머리로 전해졌다. 그 느낌이 멍하고 어지러우면서도 이상하게 기분 좋았다.
내일은 황후의 생일 선물을 산다는 명목으로 나왔으니 엔델포프에서 매일 열린다는 귀금속 경매장에도 들를 거고…… 그리고…… 그리고 유리창 밖이 새카맣네.
창문이 조그마니 별도 안 보이고. 앞쪽에 마부석의 노란 횃불만 희미하게 어른어른하는 것이 와, 따뜻해 보인……다.
***
아멜리아가 창문 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잠드는 것을 확인한 엘비어스는 그나마 희미했던 램프를 아예 꺼버렸다.
“야, 너도 얼른 자라.”
“됐으니 등을……”
아르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엘비어스는 어둠 속에서 아르의 어깨를 기가 막히게 찾아 꽉 쥐었다.
“불 켤 생각 하지 마라. 하루 이틀 일정이 아니다. 계속해서 날을 새울 수는 없으니 지금 자둬.”
“내일 잘 거야. 이동하는 중이 가장 위험해.”
아멜리아가 깨어 있을 때 단 한 마디도 섞지 않던 둘은 의외로 허물없이 대화했다.
“황제만 그림자 호위를 보낸 게 아니야. 공작가에도 그림자가 있다는 거, 너도 알잖아. 나는 크로이젠의 차기 가주야. 내가 정말 혼자 나왔다고 생각해?”
“제국 기사 앞에서 병력으로 신고하지 않은 불법 사병을 자랑스레 이야기하는군.”
그리고 없는 것이 허물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건 황제도 마찬가지 아닌가? 제국은 기본적으로 황제 폐하께서 다스리고 계시지만 그조차도 법에 근거한 법치국가야. 아무리 황제 폐하라 해도 법에서 불법으로 규정한 행위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 귀족 회의를 통해 폐위될 수 있다.”
겁도 없이 위험한 소릴 입에 담는 엘비어스를 보고 아르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나마 있었던 희미한 램프 빛을 조금 전 아예 꺼버리는 바람에 엘비어스가 그 얼굴을 보는 일은 없었다.
“구족을 멸할 소릴 아무렇지 않게 하는군.”
“너도 목숨은 아까울 테니 폐하께 쪼르르 가서 일러바치지 않을 걸 잘 알고 있어서 하는 소리다.”
엘비어스도 장난스레 웃었지만 아르 역시 그의 그런 얼굴을 보는 일은 없었다.
둘 다 표정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숨긴 채로 뻣뻣한 목소리만 주고받았다.
“폐하와 네 공작가, 두 후작가 모두가 그런 그림자들을 너도나도 키우고 있다는 건 사실 후작 이상의 귀족이면 모두가 아는 것 아닌가? 목숨이 아까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서 그렇지, 서로서로 눈감아 주고 있는 사실이잖아.”
“하지만 폐하의 섀도 나이트는 소문만 무성할 뿐 그걸 실제로 믿는 귀족들이 거의 없어. 반면 공작이나 후작 같은 고위 귀족이 제국에 신고하지 않은 불법 사병을 양성한다는 소문을 믿는 귀족들은 많지.”
아르의 말을 들은 엘비어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옷자락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의 동작을 대신 말해 주었다. 엘비어스의 입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쨌든 폐하의 불법 사병인 네가 할 소린 아닌 것 같단 뜻이었으니 오해 없길 바란다. 그리고 너 말고도 우리를 호위할 병력은 충분하니 자라고 할 때 얼른 자둬.”
“괜찮다고 했을 텐데.”
아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엘비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아르의 양쪽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러다 키 안 큰다, 꼬맹아.”
아르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일어나려는 것을 엘비어스가 몸무게를 실어 아까보다 더 세게 어깨를 내리눌렀다.
“하여튼 맘에 안 들어.”
아르가 이를 갈며 자리에 얌전히 앉자 엘비어스가 일부러 보란 듯이 몸을 부르르 떨며 자신의 양쪽 팔을 마구 비볐다.
“내가 네놈 맘에 들어서 뭐 하냐? 징그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