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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52화 (52/148)

52화

파티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 마차 안에서 파티의 열기가 식어 갈 즈음이었다.

이제야 제니는 자신이 공범으로 가담한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 실감이 난 것인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하, 유모님이나 시녀장님한테 안 들켰겠죠? 정말 아무한테도 안 들키고 궁에 돌아가실 수 있는 것 맞죠? 저 진짜 떨려 죽겠어요.”

“괜찮아. 안 들키는 방법이 있으니 나온 거야. 그리고 얘 사실 내 호위로 나온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제니가 가느다란 눈초리로 아르를 관찰하자 아르는 가볍게 목만 움직여 걱정하지 말라는 듯 예를 표했다.

“저하 호위기사 중에…… 아무리 봐도 페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근데 평민이라면서요.”

“비밀이야. 잊어버려.”

우리는 적당히 인적이 드문 곳에서 내렸고 마부에게 백 실버짜리 은화 열 닢을 건네며 입단속을 했다. 제니를 태운 마차가 멀어지고 우리는 화려한 옷 위에 검은 로브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내 궁의 비밀통로 출구와 이어진 숲으로 향했다.

“드레스에 구두까지 신어서 걷기에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괜찮아.”

“업어 드릴까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지금은 오늘의 이 무단 외출 덕에 그가 유의미한 정보를 건졌는지가 더 중요했다.

“저택 구조는? 잘 파악했어?”

“실제 잠입 시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파악해 두었습니다.”

“잠입이 문제가 아니야. 만일의 경우 도주 경로는?”

“그것도 파악했습니다.”

그의 자신감 있는 대답에 온몸에 긴장이 탁 풀렸다. 그러는 바람에 거의 아르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걷게 되었다.

그렇게 내 방의 거울 문 근처까지 다가갔을 때, 아르는 내 드레스의 등을 조인 끈만 헐겁게 풀어 준 다음 뒤돌아 모퉁이에 섰다. 나는 혼자 낑낑대며 파티용 드레스를 벗고 통로 앞에 고이 놓아두었던 잠옷을 다시 주섬주섬 걸쳤다.

드레스는 아까 비밀통로에 들어오기 전, 숲을 통과하며 흙 묻고 나뭇가지에 걸려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둘둘 말아 아르에게 건넸다.

“들어가자마자 춥다고 불을 때달라고 할게. 그럼 궁의 난방실 하인이 불을 지필 거야. 난방실 옆이 소각실이고 굴뚝이 연결되어 있으니 연기가 나더라도 의심받지 않겠지. 거기서 네 옷과 내 드레스를 전부 남김없이 태워.”

“예.”

뒤돌아서는 그에게 가장 해주고 싶었던 말을 드디어 내뱉었다.

“실패해도, 괜찮아. 그러니까…….”

무리하지 않아도 돼.

“감사합니다, 저하.”

그러나 알았다는 대답이 아닌 그저 걱정해 줘서 감사하다는 말뿐이다.

나는 자박자박 걸어 아르의 앞에 섰다. 그리고 그가 쓰고 있던 검은 나비 가면을 조심스레 벗겼다. 램프의 희미한 빛 때문에 그림자 진 얼굴 위로 아련한 미소가 번졌다. 손끝으로 그 얼굴을 쓸어내렸다.

“부탁이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음 일을 진행하라고 하기 전까지 혼자서 움직이지 마.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게.”

결국 그는 끝까지 알았다고 답하지 않았다.

***

나는 그날 이후 부지런히 할바마마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할바마마와 놀았고, 그곳에서 방대한 분량의 역사학 숙제도 해치웠다.

그리고 레이하임이라는 자가 섀도 나이트의 단장이라는 사실도 눈치챘고, 그가 할바마마께 주기적으로 보고하러 오는 시간대도 얼추 알 수 있게 되었다. 레이하임도 이제는 곧잘 나를 아는 척했다.

그즈음 되었을 때는 이따금 할바마마에게 예전에 레이하임과 집무실에 함께 들어왔던 붉은 눈의 기사를 언급하며 밀렌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했다. 그리고 할바마마는 그때마다 대충 얼버무렸다.

그리고 오늘, 레이하임이 할바마마의 집무실에 들어온 날, 그가 보고를 마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린 나는 적당한 타이밍에 물었다.

“저번에 같이 왔던 기사는 누구였나요? 토끼처럼 붉은 눈동자가 꽤 인상 깊었는데, 황궁을 돌아다니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네요.”

나는 은근슬쩍 레이하임에게 밀렌에 대해 언급했다.

“저하께서 누구를 말씀하지는 건지 잘…….”

그가 대답을 얼버무리려 할 즈음 나는 곧바로 다음 말을 꺼냈다.

“백금색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에 엄청 잘생긴 분이었는데. 올 때마다 그분들은 없는 것 같아서 어떻게 지내시나 엄청 궁금하거든요.”

할바마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나는 이 짓을 며칠 더 반복했다.

***

그렇게 레이하임을 채근해 밀렌의 이야기를 꼬치꼬치 캐묻기만 일주일째였다.

나는 혹시나 아르가 조바심을 내서 후작저에 멋대로 잠입할까 봐 요 며칠 밤마다 그를 내 방으로 불러내 소파 위에서 재웠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새벽,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쓰윽-.

누군가의 기척이 슬그머니 내 방 창문을 열고 넘어 들어왔다. 소파 위에서 자던 아르가 숨을 죽이고 검을 집어 들어 소파 밑으로 몸을 숨겼다.

나는 등을 돌리고 자는 척 이불을 둘둘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의 커다란 손바닥이 내 입을 부드럽게 틀어막았다.

“읍!”

“창문도 잠그지 않고 경보장치의 마력 공급기를 꺼둔 것을 보면, 역시 나 부르려고 그런 거 맞죠? 황손녀님.”

그 순간.

스릉!

공기를 무겁게 울리는 쇳소리와 함께 아르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하의 옥체에 손을 대다니, 죽고 싶습니까?”

“어……? 아르, 네가 여기 왜 있냐? 황손녀님, 이 녀석도 불렀어요?”

밀렌이었다.

밀렌은 아르가 제 목에 검을 들이대든 말든 개의치 않고 나를 두 손으로 흔들어 깨웠다.

“그보다 왜 자꾸 절 찾으세요. 저는 편히 살고 싶어요. 단장이 저한테 자꾸 ‘저하께서 네가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자꾸 물으신다. 하하하!’ 하고 농담처럼 말씀하실 때마다! 제가 얼마나 심장 떨리는 줄은 아세요?”

밀렌이 칭얼거렸다. 나는 밀렌을 향해 배시시 웃는 것으로 미안함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의 뒤에 선 아르를 향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르, 검 좀 치워.”

“하오나…….”

“너도 나 처음 봤을 때 손으로 내 입 틀어막았잖아.”

그 말을 들은 밀렌이 아르의 검 끝자락을 제 손가락으로 잡아 흔들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와, 저거 쓰레기네. 넌 되고 난 안 되냐?”

“사람에게 쓰레기라니, 저하 앞에서는 단어 선택을 신중히 하십시오.”

둘의 싸움에 벌써 한숨이 흘렀다. 나는 밀렌이 여전히 내 어깨에 올리고 있는 손을 톡, 건드렸다.

“둘 다 그만 싸우고. 밀렌은 내 몸에서 손 좀 떼줄래? 이제 일어날 테니.”

밀렌이 아까 나를 흔들어 깨우던 손을 제 어깨 옆으로 들어 올리며 치우자 아르도 밀렌의 목을 겨누던 검을 거두었고, 나는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밀렌, 그대에게 부탁이 있어 불렀다.”

“얼레? 저는 섀도 나이트라서 황제 폐하 명령만 듣는데요?”

“난 명령이라고 한 적 없는데. 부탁이라고 했지.”

“그럼 이 녀석 통해서 전해도 되잖아요.”

밀렌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손가락으로 아르를 가리켰다. 내 시선이 그의 손가락을 따라 자연스럽게 아르에게로 향했다. 아르의 표정이 대놓고 일그러졌다. 아무리 봐도 둘의 사이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다시 밀렌을 쳐다보았다.

“그대가 거절할 것 같아서.”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밀렌이 곧바로 대답했다.

“아, 그래요? 그럼 뭔진 몰라도 거절하겠습니다.”

이렇게 빨리?

내가 황당하다는 듯 밀렌을 쳐다보자 아르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처음에는 싫어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빠른 거절 의사 표시는 조금 예상외였다.

“흐음, 그럼 할바마마께 일러야지. 밀렌이 나한테 섀도 나이트에 대해서 다 말했다고.”

그러자 밀렌이 경악하며 내 어깨를 두 손으로 쥐고 흔들었다.

“허어억! 안 돼요!”

“저하께 손 떼십시오!”

아르의 주먹이 밀렌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아윽! 아프잖아! 황손녀님, 그거 폐하한테 말하면 아르 저 녀석은 무사할 것 같아요?”

나는 아르를 한 번 쳐다보았다가 밀렌을 다시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확신을 담아서 고개를 움직였다.

끄덕끄덕.

밀렌은 두 손에 힘이 빠진 건지 팔을 축 늘어뜨리며 아르를 뒤돌아봤다. 아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내 말대로 자신은 무사할 거라고 강력하게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히잉, 이건 부탁이 아니라 순 협박이잖아요.”

밀렌은 입을 잔뜩 내밀고는 투덜거렸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그래서 뭔데요? 들어 보고 결정할래요.”

“무리한 건 안 시켜. 아르랑 같이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

내 말이 끝나자 아르가 갑자기 경악하더니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밀렌과 나란히 앉았다.

“설마 그것 때문에 밀렌 님을 부른 겁니까? 싫습니다. 차라리 혼자 가겠습니다.”

“위험해.”

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이번에는 밀렌이 울상을 지었다.

“헉! 저한테 위험한 거 시키려고 부른 겁니까? 싫어요. 안 가요. 쟤 혼자 간다잖아요. 혼자 보내요. 저도 제 목숨은 아깝습니다.”

“목숨 아까웠으면 섀도 나이트에 들어가면 안 됐지.”

“그건 어쩔 수 없었어요. 열두 살 때 도망 노예 신분 벗게 해준다는 말에 멋모르고 단장한테 사기당해서 끌려온 거라고요!”

나는 그들의 반대를 깡그리 무시하고 손을 내두르며 말했다.

“다 됐고, 아르 혼자 가면 할바마마한테 둘 다 이를 거야. 그러니까 혼자 가지도 말고 혼자 보내지도 마.”

아르는 인상을 찌푸렸다. 밀렌도 마지못한 얼굴로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좋아, 둘 다 내 뜻을 이해해 준다니 참으로 기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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