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후작저 입구에서 집사가 초대장과 마차의 가문 문양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안으로 들여보냈다. 제니의 이름을 빌린 우리도 무사히 통과했다.
“으으, 저……가 아니라 리아야, 난 저 대문 통과하기 전까지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어.”
그러나 그녀가 나를 저하라고 부를 뻔했을 때는 성공했다는 안도도 잠시, 정말 심장이 벌러덩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나는 제니 네가 말실수할까 봐 아직도 심장이 떨린단다.’
그건 아르도 마찬가지인지 숨을 홉 들이켰다가 이제야 길게 내뱉고 있었다.
곧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서자 화려한 옷과 가면으로 치장한 사람들이 가득했다. 한쪽에서는 검은 정장을 입은 하인들과 메이드복을 입은 하녀들이 쉴 새 없이 음식과 음료를 나르고 있었다. 소규모의 악단이 감미로운 곡을 연주했다.
제니는 들어서자마자 심장 떨려 목이 탄다며 서빙을 하던 하인을 불러 칵테일 하나를 그 자리에서 들이켰다.
“나는 딸기 주스.”
하인이 능숙하게 딸기 주스를 골라서 내게 공손히 내밀고 이번에는 아르를 향해 섰다.
“얼음물은 있나?”
간단하게 주문을 마치고 하인이 물러가자 제니는 의외라는 듯 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진짜 평민 맞아요? 아니면 연기를 잘하는 거예요, 뭐예요?”
나도 제니에게 손짓하여 귀를 낮추게 하고 귓속말로 대답했다.
“뭐가?”
“뭐긴요. 평민이면 하인한테 존댓말했을걸요? 같은 평민일 테지만 평민들은 시종과 하인의 계급을 잘 구분 못 하거든요. 그게 아니더라도 그들에겐 존댓말이 거의 습관이 되었을 거고요. 게다가 딱 봐도 하인이 자기보단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이잖아요.”
그렇긴 한데 아르는 황실 기사였으니까. 지금도 황실 녹을 먹는 임페리얼 섀도 나이트가 아닌가. 누구보다 계급제와 궁중 예법, 귀족 예법에 능숙한 것은 당연했다. 나는 제니의 귓가에 다시 속삭였다.
“알면 다쳐.”
제니는 기대와는 다른 내 대답에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나 곧바로 누군가가 춤을 신청하러 다가오자 환하게 웃는 얼굴로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누나는 다녀올게, 동생 잘 보고 있어.”
오오, 제니! 처음으로 완벽했던 연기였어!
아르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제니의 연기에 응했다.
“응, 누나.”
그리고 그 한 곡이 끝나고 우리에게 다가오던 제니는 이어서 또 다른 누군가가 춤 신청을 하자 거절하지 못하고 다음 곡이 시작된 직후 홀로 나갔다.
나는 지나가던 하녀가 들고 있던 쟁반에서 쿠키를 들어 아르의 입에 쏙 넣어 주며 귓속말을 했다.
“다행이야. 제니가 인기도 많고 거절도 잘 못 하는 성격이라. 우리를 감시하지 못할 테니까.”
“성격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춤 신청을 거절당하는 것을 치욕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보니 거절하는 것도 상당히 무례한 일이 되어 버린 것 아닙니까?”
그런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고모님은 잘 거절하던데.”
“황태녀 정도 되면 그렇게 해도 누가 뭐라고 못하니까요.”
하긴, 고모님은 상대방이 치욕스럽든 말든 자신더러 누군가 무례하다고 뒤에서 욕을 하든 말든 눈앞에 보이지만 않으면 신경 쓰실 분이 아니다.
그동안 이따금 제니가 우리를 힐끔거렸는데 그 모습이 잘 있는지 확인하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저 우리가 멍하게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미안해서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제니가 미안해하는데? 그런데 자꾸 쳐다보니까 너더러 나 혼자 두고 가서 저택 둘러보고 오라는 말을 못 하겠다.”
내가 키득거리자 아르가 내 앞으로 나와 한쪽 손을 내밀고 허리를 굽혔다.
“그럼 안 미안하게 하면 됩니다. 그리고 계속 대놓고 귓속말을 하는 것도 좀 이상할 테니.”
나는 가만히 아르를 내려다보았다. 주로 낮은 곳에서 올려다보던 그의 얼굴이 이렇게 훌쩍 낮아지니 조금은 색다르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이 자세는 춤 신청?
무도회의 춤은 귀족의 전유물이다. 기사 작위가 있어도 그가 평민 출신이라면 귀족들은 그들을 철저하게 평민 취급 했다.
그러니까…… 얘 춤출 줄은 아는 걸까?
“춤출 줄 알아?”
“섀도 나이트는 이런 데 귀족 행세 하면서 지금처럼 잠입을 가끔 합니다. 그래도 대부분 이런 임무는 귀족 출신들이 합니다. 그래야 자연스러우니까요.”
“그래서 해봤어? 안 해봤다는 거지?”
“잠입 임무는 처음입니다. 이런 데 잠입하기엔 아직 너무 어리잖아요? 그리고 이런 임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좀 더 컸을 때는 저하도 아시다시피 제가 폐하의 명으로 섀도 나이트에서 나와 저하의 호위로 있었으니까요.”
나는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거절하는 것이 무례라는 말까지 들어 놓고 거절할 수도 없어서 머뭇머뭇 그의 손에 손을 얹었다.
검은 나비 반가면 뒤에서 그의 두 눈이 살포시 휘었다. 그러더니 잡힌 내 손을 잡고는 부드럽게 끌어당겨 홀 가운데로 향했다. 얼결에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누군가와 춤을 춰본 적은 많다. 리엘라가 올해나 내년 즈음, 사교계로 데뷔를 준비하면서 요즘 예법 수업 때도 무도회 매너를 배우고 있다. 그때마다 로이드가 내 파트너가 되어 매번 호흡을 맞추었다.
지난 생에서는 그것보다 수십 명 더 많은 사람과 수천 번 무도회장을 뱅글뱅글 돌았을 거다. 그러니 새삼 춤이라는 것이 새로울 게 없다. 그런데도 어쩐지 낯설었다.
내 등 뒤로 닿는 누군가의 손이 이번에는 진짜다. 며칠 전, 할바마마의 집무실에서 그를 보며 떠올리던 그 토닥임과 같은 환촉이 아니었다.
단단하게 등을 받친 손바닥이 나를 조금 더 가깝게 끌어당겼다. 내 손이 자연스레 그의 어깨에 얹어졌다. 맞잡은 반대쪽 손으로 따뜻함이 느껴졌다.
‘맨손…….’
그의 손바닥이 이렇게 직접 닿은 건 처음이었다. 오래전 수페니아 자작의 처형식을 보러 무단 외출을 감행했을 때도 그는 내게 맨손바닥이 닿는 일이 없도록 손등을 내밀었었다.
검을 쥐는 손이 부드러울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상보다 훨씬 굳은살이 많았고 몹시 거칠었다. 그러나 움직임만큼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아까부터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고 멀뚱멀뚱 서 있는 걸 민티아가 힐끔거렸습니다. 제 또래로 보여서 우리가 누군지 궁금했던 모양인데, 그랬다가 괜히 우리에게 접근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건 좋지 않습니다.”
나는 힐끔 주변을 훑었다. 민티아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강렬한 스칼렛 레드 머리카락은 아무리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도 누구인지 금방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튀었다. 그에 비해 내가 무난한 금발이라는 사실이 문득 몹시 다행이라 여겨졌다.
어쨌든 우리는 아까보다 조금 더 남들 눈에 띄지 않고 귓속말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이 곡이 끝나면 저하께서는 여기서 눈에 띄지 않게 파티를 즐기는 척하십시오. 저는 후작저를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의심받지 않을 선에서 길을 잃었다고 둘러댈 수 있는 정도로만 둘러보고 와. 오늘은 얼굴을 가린 외부인이 많은 만큼 경계가 심할 테니. 제니가 오면 내가 알아서 둘러댈게.”
“괜찮습니다. 어차피 어른도 아니라 어디서 길을 잃었다 한들 쉽게 의심하지는 않을 겁니다.”
최대한 깊이 들어가 보겠다는 소리였다. 나는 그의 어깨에 얹은 손에 힘을 꾹 주었다.
“명령이야. 허튼짓할 생각 말고 내 말 들어. 오늘은 사전조사일 뿐이야. 고작 사전조사에서 잘못 걸리는 바람에 경계심이 심해지게 하면 더 곤란해.”
내 등을 받친 손이 움찔 떨렸다. 머리 위에서 심호흡과 함께 반듯한 대답이 들렸다.
“알겠습니다.”
“적당한 선에서는 걸려도 괜찮아. 만일 후작저에서 제니를 의심한다면 황태손의 이름으로 내가 제니의 사촌 동생들을 본 적이 있다고 증명하는 편지를 써주면 돼. 황궁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한번 내 궁을 둘러보라고 허락한 적이 있다고 둘러대 줄 수 있어. 딱 그 정도로, 내가 지켜 줄 수 있을 만큼만 훑어보고 바로 나와.”
이렇게 말하면서도 목숨을 담보로 할 만큼의 위험을 함께 감수해 줄 수 없는 내 무력함에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다.
그가 하려는 일이 위험한 건 알지만, 위험하다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면 내게 더욱 숨길 것도 잘 알고 있다. 이 기사님은 언제나 그래 왔다.
그러니 차라리 내가 이렇게라도 알고 있는 것이 더 나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 시선이 벗어나는 범위에서 자신을 내던지는 짓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위험을 대비한 보험도 여럿 생각해 둘 수 있다.
‘무엇보다 이번 생에서는 내가 가진 권력을 모두 끌어모아 지켜 줄 수도 있어.’
위험한 일을 계획하기 때문에 그러는 걸까. 자꾸만 떨리는 심장을 나는 가까스로 다스리면서 왈츠에 몸을 실었다.
지금은 춤에 좀 더 집중하자.
“자꾸 딴 데 보지 말고 눈 좀 마주치고 얘기하지 않을래?”
“저택 구조를 추측하는 중입니다.”
가슴이 심하게 뛰는 나와 달리 그는 여전히 평온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차가운 눈동자를 밖으로 굴렸다. 그에게는 이 또한 그저 업무의 일환일 뿐인 것 같았으나 아무렴 좋았다.
이 한 곡이 다 끝날 때까지는 적어도 이 파티를 즐기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