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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50화 (50/148)

50화

요 며칠 단비가 지나가고 날이 맑아지면서 언제 가뭄이 오고 언제 해갈이 되었냐는 듯 제국은 일상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요즘은 가뭄으로 흉흉해진 민심 때문에 미뤄지고, 잇따른 비 때문에 미루고 미루었던 사교계의 소규모 파티들이 하나둘씩 시작되었다.

나는 후작가의 파티에 참여해 체리에 후작저의 내부를 둘러보고 아르에게 알려 줄 생각이다. 혹은 아르를 그 파티에 데려가든가.

‘체리에 후작 부인이 가면무도회를 열기로 했다는데 어떻게 초대장을 받아 내지?’

사교계 데뷔를 아직 치르지 않은 데다가 개인적인 인맥이 그리 많지 않은 나에게는 별도로 초대장이 날아올 일이 없었다.

황태녀인 고모님께도 초대장이 몇 장 날아온 모양인데, 아마 평범한 황녀 시절만큼 활발한 사교계 활동은 힘들 터이니 고모님과 함께 참석하길 바라는 건 요원할 듯하다.

고로 나를 파티에 데려갈 보호자가 없다!

아니, 설령 고모님을 졸라 어찌저찌 초대장을 따내고 후작가의 파티에 참석한다고 해도 어차피 저택 내부를 충분히 둘러보고 아르에게 질 좋은 정보를 전달해 주기도 힘들 것 같네.

‘어떻게 체리에 후작저에 들어갈 방법이 없을까?’

내가 한참을 골똘한 상태로 꼼짝도 하지 않자 유모가 내 눈앞에 손바닥을 휘휘 흔들었다.

“저하?”

“앗, 유모. 왜?”

“무슨 생각을 그리 심각하게 해요?”

“나도 파티 가고 싶어! 황실 파티 말고. 아기자기한 작은 파티, 작은 무도회 구경하러 가고 싶다고!”

한창 사교계 시즌이라 내 시녀들은 돌아가며 휴가를 내고 이런저런 파티에 참석하는 중이다. 그리고 내게 다양한 파티 이야기를 들려주며 떠들곤 했다.

그녀들을 사교계 파티에 초대하는 가문은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고 수도 없이 많았다. 황족의 시녀라는 지위는, 그것도 황위 계승권이 확고한 황태손의 시종, 시녀의 자리는 그 자체로 곧 권력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정작 황태손인 나는 갈 수가 없는 거냐고오!

“할마마마네 집에서 하는 파티가 화려하다며! 나도 가고 싶단 말이야.”

“황후 폐하의 친정이요? 체리에 후작 부인이 여는 파티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동안 티파티가 어쩌고저쩌고 조잘거려 왔던 시녀들이 죄인이 된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나는 심장이 뜨끔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시녀 중 한 명이 나를 달랬다.

“저하, 그렇지만 이미 이번에 후작저에서 열리는 가면무도회 초대장은 다 돌았어요. 크로이젠 공작가의 파티 초대장을 얻어 보는 건 어떨까요?”

“거기 초대장이 이미 벌써 다 돌았어?”

내 물음에 시녀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장을 받은 아이들이로구나.

“히잉,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말하며 나는 악동처럼 씨익- 웃었다.

***

내가 사교계 파티에 가고 싶다며 떼를 썼던 잠깐의 해프닝이 잊힐 무렵, 나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잔느에게 말했다.

“제니를 불러 줘.”

제니는 내 시녀 중 벨보다 한 살 많아 거의 막내 축에 속했다. 그러면서 벨보다도 장난기가 많았고 이따금 사고도 곧잘 쳤는데, 그 때문에 잔느에게 잔소리를 자주 듣곤 했다.

그녀는 내 어머니인 전 황태자비가 살아 계셨을 때 직접 내 시녀로 점찍어 놓은 영애였다. 그녀가 열 살 무렵부터 입궁시켜 시녀 교육을 받도록 했으니, 나에 대한 충성심은 누구보다 높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돌아가신 내 부모님에 대한 충성심 같지만…… 아무렴 어때?

곧 제니가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세요? 저하?”

제니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제니, 일단 여기 앉아 봐. 너도 혹시 후작가의 가면무도회 초대장 받았어?”

“아, 그거요? 네. 황태손 저하의 전속 시녀, 그것도 저처럼 약혼자 없는 황족 전속 시녀는 사교계에서 최고의 신붓감이니까요!”

“오오오! 그렇구나. 최고의 신붓감!”

나는 제니의 기분을 띄워 주며 손뼉을 쳤다. 제니가 헛기침을 하며 자랑스럽게 어깨를 펼쳤다. 그러고는 아차,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하, 주스라도 마시면서 말씀하실래요?”

제니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후다닥 뛰어 나갔다 오더니 오렌지 주스를 내 앞에 대령하고 내가 권한 자리에 살포시 앉았다.

나는 제니가 가져온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제니도 제 몫으로 가져온 아이스티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래서 저에게 긴히 하실 말씀이라는 게 대체 뭔가요?”

나는 그런 제니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제니, 그 가면무도회에 나도 데려가!”

그리고 그 순간, 제니는 입에 머금었던 아이스티를 내 얼굴에 장렬하게 뿜고 말았다.

푸우우우우우웁!

***

체리에 후작 저택에서 열리는 가면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조금 이르게 잠자리에 든 척하고 제니와 미리 약속한 장소에서 만났다.

제니가 내 얼굴에 아이스티를 뿜은 죄를 내가 잔느에게 숨겨 주는 조건으로, 그녀는 마지못해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내친김에 살포시 아르도 끼워 넣었다.

처음에 그녀는 “차라리 시녀장님께 혼나고 마는 게 속이 편할 것 같은데요…….”라며 곤란해했었다.

하지만 이미 제니에게는 전부터 내가 눈감아주고 있던 많은 약점이 있었다.

“전에 할바마마가 내 생일 선물로 준 도자기 명장의 화병을 네가 깨 먹은 걸 내가 숨겨 줬던 거 기억하지?”

“윽! 그래도…….”

“내가 고모님과 패밀리 룩으로 맞춰 놓고 스커트 밑단이 찢어지는 바람에 한 번도 못 입어 봤던 옷, 사실 내가 입다가 밟은 거 아니고 네가 들고 오다 밟아서 그랬었다는 것도 기억하지?”

“그만! 알았어요. 사실 이렇게 부려 먹으려고 숨겨 줬던 거죠? 칫!”

“사랑해! 역시 제니밖에 없어. 헤헤!”

제니는 아무래도 죄가 죄를 낳는 것 같다며 찝찝해했지만, 나는 원하는 대로 제니를 공범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만약 가면무도회가 아니었다면 이미 황태손으로 얼굴이 알려진 내가 나설 수 없으니 아르만 제니에게 끼워 보냈을 거다. 그러나 가면무도회라면 얼굴을 가리고 직접 참석할 수 있다. 이 기회를 별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제니의 도움으로 그녀의 집인 백작저, 제니의 방에서 입이 무겁다는 하녀 몇 명에게 둘러싸인 채 곱게 단장을 했다. 그러는 동안 제니는 아버지인 백작에게 걸리면 어떡하냐며 두근두근 가슴을 졸였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제니의 사촌 동생들로 위장하여 그녀의 초대장에 살포시 발을 얹기로 했다. 마차를 타고 후작저로 향하는 길에 제니가 마차 안에서 숨죽여 물었다.

“그런데요, 저하.”

“저하 말고, 리아.”

나는 제니의 실수를 곧바로 정정했다. 그러나 제니는 그 실수를 애교로 때웠다.

“아이, 저하도 참! 이따가 들어가서는 리아라고 꼭 부를 거예요. 그나저나 저 애는 대체 누구예요? 어느 가문 몇째 도련님?”

나는 제니가 힐끗 곁눈질 한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내가 오늘을 위해 손수 골라 준 연미복을 빼입고 가면무도회의 콘셉트에 맞게 새까만 반 가면을 쓴 아르가 앉아있다. 비록 열네 살이라곤 해도 옷걸이가 좋으니 실제 나이보다도 훨씬 훤칠해 보였다.

그는 마차에 탄 직후부터 한쪽 턱을 괴고는 뾰로통하게 앉아 마차 밖 풍경이 스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제니,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마.”

제니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그래도 공범인데 너무한다며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자꾸 물었다.

“그럼 대답하기 곤란한 거 대답 안 해도 돼요. 저랑 동갑? 아니면 한 살 정도 어려 보이는데 맞아요? 귀족이에요?”

“제니!”

“히잉, 저하…….”

제니가 낑낑대는 소리를 내면서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렸다. 나는 칼같이 그녀의 애교를 잘라 내고 말했다.

“왜? 어느 가문 귀족이라고 하면 백작님께 졸라서 혼담이라도 보내게?”

“네. 아버님이 이번 무도회는 자그마치 체리에 후작저에서 열리니 검증된 참석자들만 올 거라고, 가서 약혼자감을 찾아보라고 하셨거든요. 어쨌든 열다섯? 열여섯?”

“검증된 참석자는 무슨. 우리 같은 검증 안 된 사람들이 또 있을지 어떻게 알아? 그리고 쟤 열넷이야. 너보다 어려.”

만으로 열다섯이 다 되어 가는 열넷이지만 나는 굳이 높여 주지 않았다.

“세상에! 보기보다 발육이 좋으시네. 뭐 어때요, 고작 한 살 차인걸요? 동갑이나 마찬가지죠. 어차피 혼처는 다들 십 대 초중반에 정해지잖아요?”

제니는 정말 순수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너 열여섯이잖아. 생일이 지난달에 지나서 한 살 더 먹은 거 다 아는데 어디서 약을 팔아?”

“에잇, 저하. 한 달은 봐주세요.”

“그럼 벨한테 언니 소리를 듣지나 말든가.”

“진짜 너무하세요.”

아르는 그런 제니를 힐끗 쳐다보더니 귀까지 빨개져서 아예 딱딱한 자세로 창문 밖만 응시했다. 멍하니 바깥을 감상하던 아까와는 다르게 몸이 잔뜩 굳어 있었다.

제니는 그런 아르가 귀엽다며 키득거렸다.

“그나저나, 거기 도련님? 역방향에 앉으면 멀미가 날 텐데. 제 옆으로 올래요?”

제니가 살갑게 구는 것을 보고 아르는 이 상황에 대해 어쩔 줄 모르는 듯 안절부절못했다. 그걸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문득 배알이 뒤틀렸다.

“쟤 평민이야!”

그러자 제니와 아르가 동시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어머? 진짜요?”

잠시 후 아르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아, 저하…… 제발.”

정보 좀 그만 노출하라는 신호였다. 나는 멋쩍게 헛기침을 하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흠흠! 어쨌든 평민이라고 해도 예법을 실수하는 일은 없을 거야. 내가 보증할게.”

아르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아까와 같은 자세로 멍하게 마차 밖을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휙 돌리고는 아르가 바라보는 반대쪽 창문 밖을 응시했다.

이 어색한 공기 속에서 제니가 어떻게든 말을 걸어 환기를 시키려고 쭈뼛쭈뼛 내 어깨 주변을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마차가 후작저에 당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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