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6. 단풍잎이 떨어지는 날
할바마마와 오랜만에 앉아 보드게임을 했다. 물론 사람들 다 보라는 듯 할바마마의 집무실에 앉아서.
이제 내가 만으로 아홉 살이 넘어갈 즈음이 되자, 할바마마는 조금 더 복잡하고 어려운 게임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어떻게 하면 아홉 살처럼 보일까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짓은 더는 지쳐서 못 해 먹겠다.
그렇다고 진심으로 게임에 임하지는 않았고 대충 전략을 짜내는 척만 하다가 다음 수는 되는대로 진행했다. 이 정도면 아홉 살은 아니더라도 열한 살 정도로는 보이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황궁의 고관대작들은 늘 할바마마의 집무실을 들락거리며 우리가 하는 보드게임을 힐끔거렸다. 물론 이런 놀이는 내가 세 살 때부터 할바마마와 항상 하던 것이라 다들 이런 장면을 신기하게 쳐다보지는 않았다. 그래도 우리가 무슨 놀이를 하는 건지, 판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궁금한 모양이었다.
할바마마는 내가 차례를 마쳤다고 말할 때마다 힐끔 자신의 차례만 진행하고 바쁘게 국무를 보셨다.
창문 밖에는 여전히 시시때때로 비가 내렸다. 보슬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토독토독 가볍고 어여쁘다. 유리에 부딪혀 아롱아롱 방울져서 떨어지는 모습은 퍽 미끄럼틀을 타는 물의 요정 같았다.
한가로운 오후였다.
“끄응…… 제가 졌어요. 할바마마.”
“포기가 빠르구나. 더 해보렴. 방법이 있단다.”
“그 방법이라는 게 안 떠오르는걸요.”
어느 날부터인가 할바마마는 내가 아예 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게임을 끝내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면서 방법이 없다고 쩔쩔맬 때도, 할바마마는 ‘그럼 내일 하자.’라며 그대로 판을 옆으로 치워 뒀다가 진짜로 다음 날 나를 다시 불렀다. 그리고 내가 오면 마지막 상태 그대로 게임을 다시 세팅했다.
마론 백작이 말하길 “절벽에서 새끼를 굴리는 사자의 기개”라고 했다. 할바마마는 그 말을 듣고는 자신은 백수의 제왕과도 같다며 껄껄 웃었다.
그러나 아무리 곱씹어 보아도 백작의 뉘앙스로 미루어 보아 ‘절벽에서 새끼를 굴리는 건 사자 같은 짐승이나 하는 짓’이라고 돌려 깐 것 같은데?
그래도 할바마마가 알아듣지 못하고 좋다고 하시니 되었다.
모두가 행복한데 내가 굳이 그걸 지적해서 마론 백작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도 않다. 무엇보다 어린애 상대로 조금도 봐주지 않는 할바마마가 조금은 얄밉기도 했으므로 나는 모른 척 입을 다물었다.
비가 슬슬 그치고 햇빛이 들이칠 즈음, 서재에서 노크가 들렸다.
똑- 똑똑.
살짝 끊어졌다 들리는 소리가 마치 무슨 암호 같았다.
할바마마가 가늘게 뜬 눈으로 서재를 돌아보았다가 들고 있던 자신의 토큰을 내려놓았다.
“멜리야, 파훼법이 정 생각이 나지 않거든 내일도 와서 마저 하자꾸나. 들여보내게, 백작.”
마론 백작이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할바마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슬며시 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백작은 내가 나가길 바란 눈치 같은데, 할바마마가 괜찮다는데 아무렴 어때?
할바마마의 집무실로 들어온 사람은 아주 오래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아마 작년 요맘때 즈음?
황궁의 기사 제복을 입고 있었으나 기사단 문양은 조금 낯설었다. 물론 내가 제국의 백수십 개의 기사단 문양을 전부 외우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황제에게 이렇게 직접 보고하러 올 수 있는 기사단은 내가 외울 수 있는 범위로 한정되어 있다.
‘계급장으로 보아 최소 기사단 단장급.’
그리고 나는 뒤이어 나타난 사람들을 보고는 이들의 소속을 확신했다.
‘아르? 밀렌?’
섀도 나이트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저하를 뵙습니다. 제국에 영광을.”
그들의 짧은 인사 이후 나는 눈치껏…… 빠져 주기는커녕 옆으로 슬쩍 물러나서 쥐 죽은 듯 관찰했다.
“무슨 일이냐, 레이하임?”
섀도 나이트의 단장 이름이 레이하임이구나. 레이하임이 나를 한번 곁눈질하고는 말했다.
“최근 암시장에서 유통된 흔적을 찾았습니다. 아직 배후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추적하는 중입니다.”
할바마마가 나를 힐끔 쳐다보자 레이하임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나를 독살하려던 무리의 흔적을 찾은 듯했다.
“그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하지. 이따가 다시 부르겠다. 다른 건?”
“제이를 기억하십니까? 그가 그날 출입한 자를 기억해 냈습니다.”
제이는 또 누구지? 나는 기억이 날 듯 말 듯 생소한 듯 아닌 듯, 그러면서 너무 흔해서 잘 알지도 못하겠는 이름을 들으며 머리를 팽글팽글 굴렸다.
나는 아르의 눈치를 빤히 살폈다. 아르가 내게 말해 준 적이 있는 일인가?
내가 그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오히려 밀렌이 뜨거운 시선을 느낀 건지 내 쪽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두 눈을 초승달처럼 휘며 희미하게 웃더니 언제 아는 척을 했냐는 듯 순식간에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편 레이하임의 질문에 할바마마는 가만히 기억을 더듬는 듯 생각에 잠겼다가 곧 입을 열었다.
“아아아, 맞아. 기억났다. 그자의 얼굴도 기억한다더냐?”
“최면을 이용해 몽타주를 만들었습니다.”
나는 할바마마와 레이하임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다시 아르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드디어 내게 향했다. 그러다가 무심한 듯 다시 정면을 향했다. 아주 잠깐이었다.
문득 어깨가 따뜻해졌다.
토닥-.
빈 어깨에서 환촉이 느껴졌다. 누군가의 손가락이 내 어깨를 넘어 등을 쓸어내리는 감각에 솜털이 곤두섰다.
혹여 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지는 않았을까 고개를 돌려 창문을 보았다.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은 거짓말처럼 평온했다. 그러나 아까 이후로는 아르가 다시 나를 본 척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어휴, 나 혼자만 안타깝지.’
그러는 사이에 레이하임이 할바마마께 곱게 접힌 종이를 한 장 건넸다.
할바마마는 차곡차곡 접힌 종이를 조심스레 펼쳐 정면으로 들었다. 얇은 종이에 그려진 몽타주였다. 할바마마의 등 뒤에 있는 커다란 창문을 통해서 들어온 빛이 종이를 통과하며 반대편에 선명하게 몽타주가 보였다.
어딘지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지난 삶에서 제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사이비 교주. 자신은 역병의 신이며, 이 땅에 타락한 황족과 귀족을 벌하고 인류를 솎아 내러 직접 강림하셨다나 뭐라나.
‘맞다! 앞으로 3년 남았구나.’
큰 이변이 없는 이상 아마 3년 후에 역병이 돌게 될 거다.
***
늦은 밤, 유모가 내 방을 나서고 시간이 좀 지났을 즈음, 나는 램프를 들고 조심조심 비밀통로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아르가 나직하게 물었다.
“저하, 오늘 낮에 황제 폐하께 드린 몽타주 보셨습니까? 혹, 그자를 기억하십니까?”
“사이비 교주, 리만. 어떻게 된 일이야? 제이는 누구고?”
“제이는 황후 궁의 북문을 지키던 근위 기사였던 자입니다. 누군가의 사주로 암살당할 뻔했고 지금은 섀도 나이트에서 보호 중입니다. 그리고 리만은 지난 윤년에 황후 궁에 들어왔던 자입니다.”
“리만이 황후와 관련이 있는 자였구나.”
어렴풋이 짐작은 했으나 그동안은 심증뿐이었다.
황제 에오넬이 부덕하여 신들이 재앙을 내릴 거라고 하질 않나, 자신이 만신의 대표자로 강림한 역병의 신이라고 하질 않나. 그러면서도 진정한 황제감은 볼테르라고 떠들었다.
“곧 그자가 대 가뭄이 첫 번째 벌이었다고 할 겁니다.”
“그렇겠지. 그러나 그때와 다른 점이 있어. 원래 그들은 볼테르가 대 기우제를 지극정성으로 올리는 것에 신들이 감동하여 벌을 거두고 비를 내렸다고 주장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내가 기우제를 올렸지. 이번에는 대체 무슨 주장을 펼치게 될까.”
그것이 변수였다.
“아마 신전에 남아 기도한 것을 강조할 겁니다.”
“내가 제대로 정성을 쏟지 않아 기우제 직후 비를 내리지 않고 내가 떠난 후에 비를 내렸다고 할 수도 있겠어.”
내가 최악의 경우를 이야기하자 아르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애초에 황후 궁에 그 시기에 출입한 수상한 자라고 했을 때 진즉 그 사이비 교주를 의심했어야 했는데 그것 또한…….”
나는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 똑바로 고정하고 눈을 맞추었다.
“고개 들어. 숙이지 마. 경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책사가 고민할 일을 그대가 하지 마. 책사는 따로 있으니 주제넘은 생각도 하지 마.”
“죄송합니다.”
그가 담백하게 말했다.
“죄송할 것 없다.”
이번에는 그대에게 검을 쥐는 것 이외의 일까지 맡기지 않을 생각이야. 그러니 혼자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려 하지 마.
내가 가진 권력이 네가 서 있는 자리보다 훨씬 높고, 내가 만들 수 있는 명분이 네가 휘두르는 칼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으니.
이렇게 말하며 모든 것들을 털어놓고 싶지만 그리 말한다면 이 기사님은 분명 나에게 더욱 어렵고 더러운 일들을 숨기려 들 것이 분명해서, 그래서 더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 기억에 의하면 3년 후에 도는 역병의 치료제를 최초로 개발해 배포한 곳이 체리에 후작가야. 치료제가 이미 있을지도 몰라.”
“후작저에 잠입해 볼까요?”
“그래. ……응?”
나는 그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해서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그럼 그렇게 하라고 말할 뻔했다.
“치료제나 치료제의 레시피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거길? 혼자서?”
“네. 괜찮습니다.”
“절대 안 돼!”
“……네.”
그가 마지못해 대답하긴 했으나 묘하게 반 박자가 늦었다.
“너 이래 놓고 혼자 갔다 오려고 그러지?”
“……아닙니다.”
아무래도 몰래 혼자 다녀온 다음 내가 화를 내면 그냥 듣고 넘길 속셈인 모양이다.
“알았어. 다녀와. 대신 지금 당장은 아니야. 닷새만 시간을 줘. 그 안에 더 안전한 방법을 찾아 줄게.”
“네.”
이번에는 주저 없이 대답이 나온다. 그건 다행이었다. 이렇게 닷새라는 시간을 벌었으니 조금이라도 아르를 안전하게 만들 방법을 그 안에 찾아야 한다.
‘아르에게 가장 필요한 건 후작 저택 내부 구조의 정보일 거야. 알아낼 방법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