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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48화 (48/148)

48화

5. 노블레스 오블리주

벨이 40도 가까이 치솟는 고열에 시달리던 환궁 둘째 날 밤, 약속했던 중간 지점에서 아르와 밀렌이 아슬아슬하게 해독제를 가져와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것을 유모에게 넘겼다. 유모는 벨에게 해독제를 먹이고 열이 떨어진 것을 확인한 다음 내 마차로 넘어왔다.

“저하, 해독제는 어디서 나셨어요?”

“할바마마께서 전서구로 보내 주셨어.”

졸지에 아르와 밀렌을 조류 취급 하게 되어 버렸지만 아무렴 어떠하랴. 벨이 무사하면 그걸로 되었다.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벨의 상태를 확인해 보고 싶지만, 대외적으로 나는 감기몸살이 심해 꼼짝없이 마차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어두운 밤에도 우리는 횃불에 의지해 쉬지 않고 황궁으로 달렸다. 사람들은 내가 벨보다도 심하게 앓아 사경을 헤매는 줄 알고 있다. 그러니 한시바삐 황궁에 돌아가야 한다는 핑계로 밤낮없이 서둘렀다.

“벨에게는 끝까지 말씀을 안 하실 건가요?”

“우연히 알게 되면 몰라도…… 굳이 말하지는 말아 줘. 자신이 먹은 내 초콜릿이 독이었다는 걸 알면 많이 놀랄 거야. 그냥, 벨에게는 심한 감기몸살이었다고 알게 하고 싶어.”

“네, 저하. 조그맣던 아기가 언제 이렇게 다 커서 속이 깊어지셨을까. 레이첼 태자비 마마께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셨을까요. 흑흑.”

유모가 눈시울을 붉히더니 급하게 자신이 실언했다면서 손수건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덜컹!

마차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나는 아까 유모가 했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유모, 궁의의 입단속도 잘 해줘.”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동행한 궁의에게는 사실을 숨길 수가 없었다.

“네. 그리고 의심받지 않도록 궁의에게 들르는 마을마다 감기몸살 약재만 사라고 일러 두었습니다. 약도 다른 일행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제대로 지어서 올리라고 했고요. 궁의가 그래도 멀쩡한 몸에 약은 먹지 말라고 당부하여 제가 몰래몰래 버리고 있습니다.”

궁의에게는 벨이 사실은 독을 먹은 것이고, 나는 독을 먹은 척을 해야 한다는 것과, 대외적으로는 둘 다 몸이 지쳐 감기몸살에 걸린 것으로 알려야 한다는 것 정도까지 말했다.

“황궁에 돌아가면 궁의에게 뒤탈이 생기지 않도록 할바마마께 말씀드려야겠어. 그에게도 끝까지 입을 조심하라 이르고.”

혹여 나를 독살하려던 무리가 어찌 된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애꿎은 궁의에게 해코지를 할 수도 있다.

덜커덩!

마차가 다시 흔들렸다. 그리고 그때였다.

두둑- 투둑.

마차 지붕을 희미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쏴아아아 하는 빗소리가 시원하게 들렸다.

“비, 비다!”

“와아아아아! 비다! 비!”

마차 밖에서 사람들의 환호성이 울렸다. 그들은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를 마냥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그것을 들으며 유모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비가 오나 봐요, 저하!”

그러다가 돌연 급격히 어두워진 얼굴을 했다.

“아…… 지금쯤 황자 전하께서 신전에서 기도하고 계시겠지요?”

“그렇겠지. 숙부가 내 몫까지 열심히 기도해 준다고 했어.”

숙부는 내가 시종의 등에 업혀서 환궁하는 마차에 올라탈 때, 정신을 잃은 척하는 나를 걱정하는 척했다. 약을 올리는 기색이 다분했다.

이런 타이밍에 내리는 비가 야속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거다. 억울하지 않다는 말도 거짓말일 거다.

그러나 나는 티를 내지 않았다. 마냥 순수하게 기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까지 분하다고 소리칠 만큼 나는 모질지를 못한가 보다.

내가 그들의 환희에 찬 목소리를 들으며 희미하게 웃자 유모가 내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휴, 저하는 너무 착해 빠져서 큰일이어요. 이래서야 칭송받는 성군은 될 수 있어도 행복한 군주가 되긴 힘들 거라고요.”

나는 내 볼을 쓰다듬는 유모의 품에 폭 안겼다.

“괜찮아, 유모. 나는 성군이 될 거야.”

유모는 그런 나를 꼭 끌어안고 토닥였다. 유모의 다정한 말과 손길에 나는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느낄 수 있었다. 아마 같은 일이 또 발생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내 명예보다는 내 사람들을 선택할 거다.

엘비어스가 만약 진실을 알면 벨만 황도로 올려보내고 나는 남아서 기도를 했어야지 왜 신전을 떠났느냐고 잔소리를 하겠지?

‘그래도 괜찮아.’

만약 벨만 황도로 올려 보냈다면 신전에 남아 있는 나는 괜찮았을지 몰라도 벨과 함께 환궁하는 이들이 분명 화를 당했을 거다. 내가 먹었어야 할 독을 벨이 먹었다는 걸 눈치챈 이들은 혹시 모를 후환을 없애려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럴 바에야 내가 독을 먹은 척하고 함께 움직이는 게 나았다. 내가 곧 죽게 될 거라는 인상을 심어 준다면 굳이 그들이 추가로 손을 쓰는 번거로운 일은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내겐 이게 최선이었어요. 이해해 줘요, 엘비어스.’

***

황도로 돌아오고 이틀 정도 더 아픈 척을 한 다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벨도 금방 기운을 차렸다. 내 궁에서 진실을 아는 사람은 유모와 시녀장인 잔느뿐이었다.

나머지는 섀도 나이트인 아르와 밀렌이 할바마마께 보고했으니 할바마마께서 알아서 처리하실 거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고 공식적으로 알린 직후 병문안을 받았다. 제일 먼저 온 사람은 의외로 키옌 황후였다.

“황손, 먼 길 다녀오느라 고생했어요. 그러게 처음부터 볼테르 황자를 보내면 되었을 것을……. 폐하께서 어린 황손에게 너무 큰 짐을 지우신 게 아니었는지, 이 할미가 몹시 걱정하였습니다.”

정말로 걱정이 듬뿍 담긴 것 같은 목소리였지만 다음부터는 나대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리고 나는 못 알아들은 척, 하지만 철이 좀 든 척 대답했다.

“아니에요, 할마마마. 황족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어요.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그 뒤로는 외가인 세르피스 후작가에서 사촌 오라버니인 루디안이 커다란 인형을 들고 대표로 오더니 외할아버지께서 내게 “영지 잘 먹겠다.”라고 전해달라 했단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전에 로크스 가면 클럽 사건 때 생긴 빈 영지들 말이야. 황제 폐하께서 경매로 내놓았던데. 다음 주가 입찰 마감이더라. 할아버님께서 그 항구도시 드시려고 지금 벼르고 계셔.”

그렇게 한참을 떠들다가 루디안 오라버니가 가고 나서 다음으로 온 사람은 디엘로니 교수님이었다.

교수님은 밀린 숙제만 검사하러 온 거라며 뜬금없이 향초를 가지고 오시더니 정작 숙제는 보지도 않고 다음 강의가 있다며 아카데미로 돌아가셨다.

교수님께서 가시고 시녀들은 교수님께서 가져온 향초에 불을 붙이며 키득거렸다.

“디엘로니 교수님은 너무 귀여우신 것 같아요.”

아, 그건 나도 인정.

하지만 곧 이어진 잔느의 잔잔하면서도 진한 눈빛에 나는 말을 보태려다 멈칫했다. 시녀들도 서둘러 떠들던 입을 꾹 다물었다.

분위기가 딱딱해지기 전에 잔느가 서둘러 다음 일정을 말했다.

“곧 크로이젠 공작가에서 로이드 공자님이 병문안을 오실 거에요.”

잠시 후, 로이드가 장미꽃 세 송이를 들고 찾아왔다.

***

한 다발로 예쁘게 묶인 장미 세 송이가 싱그럽다.

“어머니의 온실에 장미가 예쁘게 피었기에 저희 형제가 좀 골라 봤어요.”

“우와! 예뻐라. 고마워요.”

옆에 있던 시녀들이 그것을 받아 하얀 화병에 예쁘게 꽂아 침대 옆의 좁은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건 형님께서 보내시는 문안 인사입니다. 나중에 읽어 보세요.”

로이드가 내게 작은 편지 봉투를 건넸다. 끝에 붙인 말로 보아 단순한 문안 인사를 전하는 편지 같지는 않고 아마 책사로서 보낸 편지겠지.

“알았어요.”

우리는 내 궁의 정원에서 가볍게 산책을 했다. 일전에 로이드가 궁인들이 많이 볼 수 있는 곳에서 주기적으로 만나자고 했던 일도 있었고.

나는 로이드를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지금 궁인들이 한참 퇴궁할 시간인데. 나가는 궁인들 대여섯 정도만 더 마주치고 헤어지죠, 우리.”

그리고 내 궁의 정문에서 가까우면서 높이가 낮은 꽃들 위주로 장식된 화원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로이드가 멋쩍게 웃었다.

“정말 칼 같으시네요.”

“뭐가요?”

“전부터 궁금했는데요, 저랑 약혼하는 게 싫으신 건가요? 아니면 저에 대해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건가요?”

그와 나란히 걷던 나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와 눈을 마주치려고 고개가 뻐근할 정도로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내 앞에 앉아 시선을 낮추어 주었다.

“사실 우리 나이 차이가 차이이기도 하고 저는 정상인이라서요. 제가 저하께 흑심을 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약혼이 마냥 싫지는 않습니다. 그냥 어른들의 사정이 그러려니 하고 있어요. 그래서 아직까진 귀여운 동생이 생긴 느낌입니다.”

동생이라…….

지난 삶에서 수년 동안 그와 약혼 관계로 지내오면서 내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나는 열다섯즈음부터 그를 사모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그즈음이었을 거다. 어린 마음에 저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보였던 약혼자를 향한 풋사랑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도 지금처럼 나를 어린애 취급 했고, 그의 집안과 외모와 부드럽고 매너 있는 성격 주변으로 수많은 영애가 꼬여 들었다. 그가 황녀였던 내 약혼자라는 사실도 뻔히 알면서.

그런 만큼 그때의 나는 혼자서만 절절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다. 이제 그에게 남은 정이라곤 미운 정. 딱 그것뿐이다.

“저도 그래요. 제가 나이가 더 많아져도 로이드 님을 사모하게 될 것 같지는 않아요. 저에게도 로이드 님은 그저 자상한 오라버니 같을 뿐이거든요.”

“저하의 뜻이 그렇다면 어른들 눈 밖에 나지 않을 정도로만 지내도록 하죠. 때가 되면 제가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가 내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더니 이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퇴궁하는 궁인이 일곱이나 지나갔네요. 저는 이만 공작저로 돌아가야겠습니다.”

그가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그렇게 헤어지고 나니 문득 아쉬웠다. 혼자 끙끙 앓으며 간직해 왔던 마음이 아무리 어린애 장난 같은 풋사랑이었다고 해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정리될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억울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지난 삶에서의 로이드는 어떤 생각이었을지 내가 결코 알게 될 일은 없겠지만, 내게는 그가 애증 깊은 오랜 연인이었나 보다.

시원섭섭했다.

***

대략 일주일, 벨은 내가 강제로 승인해 줘버린 병가를 모두 쓰고 아침 일찍 궁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출근하자마자 내 치맛자락을 붙들고는 펑펑 울었다.

“흐아아앙! 죄송해요, 저하! 제가 아파서 저하께 감기나 옮기고. 저하께서 그 고생을 했는데 저 때문에 비가 오기도 전에 환궁해 버리다니! 흐어어엉!”

그녀가 눈물 콧물 다 짜면서 우는 탓에 되레 내가 미안해졌다.

‘아니야. 사실 너, 나 대신에 독에 당한 거였어…….’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서 그저 벨을 꼭 끌어안았다.

“괜찮아. 괜찮으니 되었어.”

나에게는 명예와 권력보다 너희가 더 소중해.

비록 비가 오기도 전에 환궁했지만, 세간에는 내가 기우제를 지낸 직후 몹시 아팠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면서 동정표가 더 많이 생겼다. 오히려 비가 올 때까지 버티려는 계획에서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좋은 결과를 낳았다.

이는 엘비어스의 책략이기도 했다. 엘비어스가 로이드를 통해서 보낸 편지에는 내가 신전에서 무리하게 기도를 하던 중 과로로 쓰러졌다는 소문을 내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다소 뜬금없게도 볼테르 황자가 아픈 조카를 혼자 환궁시키고는 공을 가로채려고 신전에 남은 것 아니냐는 뒷소문이 퍼졌다. 이건 보나 마나 고모님 짓이었다.

어쨌든 나는 다 울고 얼굴을 든 벨의 어깨를 꽉 끌어안고 말했다.

“보고 싶었어, 벨. 난 벨이 해주는 머리가 가장 마음에 들어! 오랜만에 예쁘게 땋아 줘. 할바마마께 갈 거야.”

내 말에 벨은 훌쩍훌쩍 울음을 삼키고는 화사하게 웃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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