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모두가 잠이 든 새벽, 내가 방에서 기다리는 사이 아르는 내가 시킨 대로 벨의 방으로 잠입하기 위해 떠났다. 궁의가 돌아가고 벨이 깊이 잠이 들 때까지 기다리는지 꽤 늦어지고 있었다.
나는 침대 위에서 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창문 밖의 풀벌레 소리에 집중했다. 풀벌레 소리가 고요한 가운데 초조한 내 심장 소리를 따라 찌르륵찌르륵 울렸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난 후 아르가 돌아왔다.
“있었습니다.”
아니길 빌었는데 작은 유리병에 든 초콜릿도 가져왔다.
“유모와 벨에게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했어야 했어.”
“저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나는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자책해야 의미가 없다. 나는 가만히 날짜를 계산했다.
벨이 아프기 시작한 것은 오늘 늦은 오후부터였다고 했다. 그리고 대 기우제가 끝나고 지금이 나흘째, 예상대로라면 이대로 내일을 버티면 모레 비가 올 거다.
물의 신관들도 바람의 방향이나 구름의 모양으로 보아 모레 아침 즈음, 비가 올 것 같다고 예견했다.
“이틀 후면 비가 올 거야.”
“그럴 겁니다. 제 기억에도 대 기우제가 끝나고 대엿새 후에 비가 왔으니까요.”
그러니 지금 벨을 데리고 궁으로 돌아가면 고생은 내가 다 하고 정작 민심은 비가 올 때까지 고작 이틀 신전에 머무른 볼테르가 가져가게 될 거다.
“벨이 이틀이나 버틸 수 없겠지?”
“밀렌 님이 아무리 해독제를 빨리 가져와도 나흘은 걸릴 겁니다. 당장 환궁하면 전서구를 날려 중간 지점에서 이틀 후에 약속을 잡을 수 있습니다.”
이성적인 판단을 한다면 당장 내일 아침 환궁해야 옳다. 하지만 억울했다. 그건 벨이 아픈 것과는 또 다른 감정적 문제였다. 더불어 이 와중에도 그런 손익 따위를 생각하는 내가 지독히 이기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까보다 더욱 동그랗게 몸을 말고 무릎을 바짝 끌어안았다. 그런 내 옆, 침대 아래에서 아르가 무릎을 꿇고 내 시선이 닿은 쪽으로 몸을 낮추었다.
“저하, 저하께서는 무엇이 더 소중하십니까?”
이제 막 변성기가 시작된 듯한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잔잔하게 떨렸다. 나는 무릎에 묻고 있던 얼굴을 빼꼼 들어 침대 아래서 나를 올려다보는 그를 말가니 쳐다보았다.
“저하가 기억하는 지난 삶에서는 벨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저의 지난 삶에서 벨은 저하께서 사약을 받으셨던 그날, 이미 쫓겨났던 황궁으로 몰래 제 발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저하와 옷을 바꾸어 입고 저하 대신 사약을 받았습니다. 그 상태로 시간을 끌어 저하께서 도망치실 시간을 벌기 위해서요.”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시에 혐오스러웠다.
“벨은 지난 삶에서 전부 나 때문에 죽었는데, 나는 고작 민심 몇 자락 얻겠다고 벨의 목숨과 저울질을 하고 있었어.”
꽉 쥔 주먹 사이로 바스락 잠옷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파르르 떨리는 두 손 위로 아르의 손이 포근하게 올라왔다.
“저하, 소신이 실언했습니다. 저하를 책망하고자 함이 아니니…….”
“포기하고 싶어. 황제가 되려고 노력할수록 어느새 자꾸만 사람의 목숨과 나의 권력을 저울질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야. 할바마마께 성군이 되겠다고 약속했는데, 성군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복수하는 것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 같아. 무서워.”
눈에서 제멋대로 눈물이 나왔다.
“내가 그들을 용서하면 이런 위선이 끝날까? 그치만 아무리 잊으려 해도 용서가 되지 않아. 어떡하지?”
두 무릎이 축축해졌다.
약해지면 안 되는데, 나는 군주니까 신하 앞에서 약해지면 안 되는데…….
그러나 눈물도 목소리도 내 의지대로 따라 주질 않는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베개라도 끌어안고 실컷 목놓아 울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내 모든 것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동등한’ 누군가가 간절히 필요했다.
***
그의 주군은 심성이 여렸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잘 믿었다. 그래서 음모와 모략에 몹시 약했다. 누군가의 배신에 너무나 손쉽게 무너졌다. 그래서 사약을 받았다.
문제는 본인도 이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과 정치적 이익 사이에서 치밀하게 계산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황궁에서 그녀는 강제로 그것을 하고 있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그녀가 의지할 곳이라고는 황제와 에오넬 황태녀뿐이었지만 그녀는 그마저도 잘 하지 않았다. 그녀의 주변에 정적들의 눈과 귀가 깔린 것처럼, 황제와 황태녀 사방에는 그보다 더 많은 정적의 눈과 귀가 깔려 있었으므로.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지금처럼 제 갈등을 가슴속으로 더 깊이 숨겼다.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옷자락을 그러모아 주먹을 꽉 쥔 채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약해지면 안 돼. 약해지면…… 안 돼.”
조그만 목소리로 같은 말을 수도 없이 되뇌면서.
그러나 그걸 보면서도 그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갈기갈기 조각난 감정을 끄집어내 하나하나 풀어 주기에는 둘의 사이가 그만큼 동등하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기척을 죽이고는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등을 돌려 서 있는 것뿐이었다.
그는 한 걸음 물러나 고개를 돌렸다. 마저 등을 돌리려는데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던 조금 전의 그 목소리가 자꾸만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아무도 보지 않아. 이곳에는 지금 아무도 없어.’
누군가가 속삭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과 반대로 몸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손을 뻗어 잘게 떨리는 어깨를 붙잡고 끌어안았다. 그의 주군은 키가 고작 그의 가슴팍에 겨우 닿을 정도로 작았다.
그 순간 훌쩍이던 숨소리가 우뚝 멎었다. 바짝 긴장한 몸이 느껴진다. 손바닥에 닿은 그녀의 등허리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저항하지는 않았다. 조심스레 팔을 움직였다.
토닥-.
그러자 어깨에서, 등에서 슬그머니 힘이 풀어졌다.
그녀의 손이 옷자락에 닿았다. 그녀는 그의 옷 끄트머리를 꾹 쥐었다. 옷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이 가슴팍에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그가 긴장했다. 그저 위로해 주고 싶었을 뿐인데 갑작스럽게 배덕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이대로 더 세게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그녀는 장차 황제가 될 황태손이자 그의 주군이었고 그는 기사 작위도 받지 못한 반쪽짜리 기사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생각할수록 주제넘은 말뿐이다. 그는 한참이나 할 말들을 고르고 골라 입을 열었다.
“저하, 복수를 포기하고 용서하자 같은 성인군자나 할 법한 말 따위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 복수하고 싶다면 하십시오. 제가 저하의 검이 되어 드리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저도 복수하고 싶습니다. 저하를 황제로 만들어 그들을 좌절시키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조금이라도 저하를 해치는 일이 된다면 저는 복수 따위 포기할 겁니다. 저하를 불행하게 하면서까지 복수를 위해 황제가 되라 말하지도 않을 겁니다.”
제겐 저하의 안위가 더 중요하니까요. 그것이 제 이번 삶의 목표입니다.
“만일 저하께서 황제가 되기 싫다고 권력 다툼에 진저리가 난다고 하시면 신분을 세탁해 체리에 후작가와 볼테르 황자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그 어떤 귀족도 찾아내지 못할 곳으로 저하를 모실 겁니다.”
어쩌면 사실은 이것이 제 진심일지도 모릅니다.
계속 말하고 나니 전보다는 훨씬 차분해졌다. 생각도 또렷해졌고 숨소리도 고르게 바뀌었다. 두방망이질 치던 가슴이 가라앉았다. 코끝에서, 그녀의 정수리에서 장미 향이 섞인 비누 냄새가 났다.
“그러니 대답해 주십시오. 저하께는 복수가 삶의 전부입니까? 복수가 이번 생의 유일한 목표라면 그냥 비가 내릴 때까지 이곳에 남으십시오.
만일 저하께서 복수를 위해서 저를 버리는 패로 쓰시겠다면 기꺼이 이 목숨도 내드릴 수 있습니다. 심지어 저하의 가족인 황제 폐하든 황태녀 전하든 저하께서 기꺼이 버릴 수 있다고 하신다면, 그렇다면 저도 저하의 뜻에 따를 것입니다. 그럴진대 시녀 하나 정도 대수겠습니까. 그러니 복수를 원한다면 여기 남으세요.”
***
지금 한 행동만으로도 충분히 목이 달아날 일일진대, 사돈의 팔촌까지 참수를 당해도 할 말이 없을, 실로 무서운 소리까지 그는 너무나 잔잔하게 읊고 있었다. 그 바람에 나는 순간 내가 방금 들은 것이 무슨 소린지 놓치고 지나갈 뻔했다.
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위를 올려다보자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저하께서는 지금 어떻게 하고 싶으신가요?”
고민은 오래지 않았다.
“환궁해야겠다. 환자와 함께 마차로 이동하는 것은 너무 느릴 테니, 그대가 혼자 황도로 먼저 가서 할바마마께 해독제를 받아 와. 중간 지점에서 만나도록 하자.”
***
그렇게 아르를 먼저 황궁으로 보내 놓고 나는 아침 일찍 유모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섀도 나이트에 관한 것은 교묘하게 빼놓고는 초콜릿에 독이 들어 있었다는 것 정도만 말했다. 그리고 그 초콜릿 조각을 할바마마께서 주신 전서구에 매달아 보내서 알게 되었다는 것까지 말하자 유모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고 곧바로 환궁하자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벨처럼 감기몸살 증상이 있어서 환궁하는 것처럼 꾸미자고 제안했다. 내가 멀쩡한데도 벨 때문에 환궁하는 걸 독살하려던 무리가 알면, 가는 길목에 자객을 보내 암살을 시도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이유였다.
호위기사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르와 밀렌이 황궁으로 돌아가고 없으니 유모 말대로 하는 것이 옳았다.
‘확실히 내가 중독 증상이 있어 환궁하는 거라면 그들도 굳이 나에게 암살자를 보낼 필요가 없겠지.’
그렇게 우리는 신전에서 서둘러 나와 궁으로 향했다. 마차는 빠르게 성역을 벗어났다. 그러자 드디어 밀린 피로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침대까지 딸린 마차 안에서 가만히 눕자 긴장까지 탁 풀려 버렸다.
‘내일 비가 오겠지. 하지만 잘했어. 좋은 결정을 한 거야.’
나는 두 손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내 몸만큼이나 커다란 베개를 끌어안고 그 푹신한 곳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간밤에 있던 일이 떠올랐다.
토닥-.
부드러운 손이 등을 두드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불현듯 폭신한 베개가 단단하고 넓게 느껴졌다. 포근했다.
“따뜻하다…….”
이마에 보드라운 천의 감촉이 느껴졌다. 고개를 흔들며 그 감촉에 볼을 더욱 문질렀다. 입술 끝에도 사락사락 푹신한 천이 스쳤다.
두근거리는 내 심장 소리가 마차 바깥까지 울려 퍼질 것만 같았다.
그때 그 느낌을 다시 느껴 보고 싶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따뜻한 피가 짜릿하게 퍼지던 그 감각, 어깨를 감싸 안던 든든함, 등을 토닥이던 절제된 손길, 그리고 처음으로 받아 보았던 그 따뜻한 위로가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상해…….’
그것은 그저 애틋함이라고만 하기엔 조금 더 복잡한 색깔의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