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그거 동물 학대 아니에요, 황손녀 님?”
밀렌의 뼈 때리는 말을 듣고 나는 잔뜩 붉어진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르와 눈이 마주쳤다. 다행히도 그는 밀렌과 달리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 손에 있던 편지 봉투를 가져가 앞뒤로 뒤집어 가며 살폈다.
“안의 내용을 제가 읽어 봐도 되겠습니까? 최대한 간추려 적으면 전서구를 보낼 수 있는 내용인지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한참을 웃던 밀렌이 그 편지를 쏙 빼앗아 갔다.
“됐어. 내가 다녀올게. 황손녀님 잘 지켜라.”
“급한 게 아니라 나중에 환궁해서 할바마마께 직접 말씀드려도 되는데…….”
“아니에요. 이참에 독이 든 초콜릿 병도 폐하께 전달해야 하고 전에 보냈던 초콜릿 샘플에서 독이 진짜 나왔는지도 알아봐야 할 테니까요.”
말을 마친 그는 내가 붙잡기도 전에 잽싸게 밖으로 튀어나가 버렸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일하기 싫어서 혼자 도망간 겁니다.”
“그럼 밀렌이 가버려서 너 혼자 남았는데 내 호위는 어떤 식으로 할 거야?”
“어쩔 수 없죠. 밤에만 호위하겠습니다. 대신 낮에는 데려온 호위기사들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마십시오. 저는 낮에 자겠습니다. 어차피 이 방에 딸린 개인 기도실까지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으니까요. 거기서 쉬면 됩니다.”
***
아침 일찍 키옌은 볼테르를 데리고 물의 신전에서 가까운 가뭄 피해 지역을 방문했다. 미리 소식을 들은 영주가 직접 마중 나와 안내를 자처했다.
키옌와 볼테르는 양산을 쓰고 밭을 한 바퀴 둘러본 이후 어서 비가 내려 해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의례적인 말을 하곤 빠르게 일정을 마쳤다.
키옌이 마차 앞에서 볼테르를 불렀다.
“황자는 여기서 기다리세요. 곧 물의 신전에서 신관이 올 겁니다. 가서 황손과 함께 기우를 빌다가 비가 내리거든 궁으로 오세요.”
“예? 갑자기요?”
궁으로 돌아갈 생각에 들떠있던 볼테르의 얼굴이 단박 찌그러졌다.
“한참 어린 조카도 비를 내려 달라며 매일 기도를 하고 있다는데 이 시국에 제국의 황자가 궁에서 편히 놀고먹으려 했단 말입니까?”
‘불편한데…….’ 드디어 드림 퍼퓸이 없어도 그럭저럭 버틸 정도가 되었는데 적응할 틈도 없이 며칠이나 잠자리가 바뀌었다. 그 때문에 몹시 피곤했다.
볼테르는 짜증이 났지만 제 어미의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키옌의 말은 타당했다. 게다가 고작 아홉 살짜리와 이렇게 비교당하고 싶지 않았다.
볼테르는 제 감정을 꾹 누르고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어마마마.”
“좋아요. 기우제에는 참여하지 못해 아쉽지만 이런 모습이라도 보여 줘야지요.”
“예.”
“그리고 이 어미가 시킨 일은 기억하지요? 해독제입니다.”
키옌은 볼테르에게 작은 유리병을 내밀었다. 안에는 연갈색 액체가 넘실거렸다.
멜리가 초콜릿을 다 먹지 못했을 테니,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는 핑계로 초콜릿을 먹어 치우고 빈 병은 깨끗하게 씻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키옌이 말한 볼테르가 할 일이었다.
물론 해독제를 먹는다고 아주 말끔하게 해독되지는 않겠지만, 하루 정도 살짝 열이 오르고 몸이 쑤시다가 곧 나을 거다. 그러면 혹여 초콜릿 병에서 독이 나오더라도 함께 먹었다는 이유로 용의 선상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을 터였다.
볼테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옌은 제 아들을 남겨 둔 채 서둘러 환궁했다.
‘아직 소식은 없지만, 슬슬 증상이 나타나고 있겠지. 조만간 황손이 고열로 쓰러졌다는 소식이 들리겠군.’
비가 내리기 전에 어서 증상이 나타나면 서둘러 환궁하려고 할 거다. 그 이후에 볼테르가 기도하는 도중에 비가 내려 주고 황손이 환궁하는 도중 죽어 준다면 금상첨화다.
벌써 황관이 손에 들어온 것만 같아 가슴이 벅찼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
저녁 식사를 마쳤을 즈음,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볼테르 숙부가 신전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는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잘 지내는지 보고 싶다며 나를 찾아왔는데 그래 놓고 한다는 소리가 홍차를 한 잔 달라는 거였다. 곁들일 것으로는 유모가 낮에 대도시에 나가서 사 온 초콜릿을 내놓았다.
볼테르는 이 초콜릿이 유모가 오늘 사 온 초콜릿인 줄 모른다.
‘숙부가 내 초콜릿을 바꿔치기한 것이라면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보이겠지.’
독이 든 초콜릿을 한 개도 먹지 못하든, 해독제가 있어서 의심을 피하려고 다 먹어 치우든. 그것도 아니라면 바꿔치기한 쓴 초콜릿과 다르게 내 것은 맛이 몹시 달다는 것을 알고 당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고 맛없다는 표정은 다 드러내면서도 끝까지 초콜릿을 다 먹어 치우고야 말았다. 심지어 달아서 맛있다는 마음에도 없는 말까지 하면서.
유모는 어제 멀리까지 가서 사 온 초콜릿이 전부 사라지자 울상을 지었다.
“아니, 황자님은 대체 왜 저러신대요? 오늘 저녁에는 저하께 꼭 맛있는 핫초코를 주고 싶었는데.”
“신경 쓰지 마.”
내가 살짝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자 벨이 찻잔을 주섬주섬 치우면서 쫑알쫑알 불만을 토로했다.
“입맛에 맞지도 않는 어린애 초콜릿을 인상을 있는 대로 써가면서 꾸역꾸역 다 먹는 게 무슨 심보겠어요? 저하께서 단것을 좋아하는 거 알면서. 대 기우제에 올 기회를 빼앗겼다고 일부러 저러는 게 틀림없어요. 하여간 스물 넘어서까지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벨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그녀가 많이 화가 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화가 난다고 귓불까지 빨개지나?’
“벨?”
내가 벨을 부르자 그녀가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찰나의 순간, 벨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깊게 쉬는 숨이 어딘지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손을 뻗어 벨의 손등에 내 손가락을 얹었다. 그리고 곧 나는 내 손끝에 닿은 벨의 손등이 뜨끈뜨끈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벨, 어디 아파?”
“괜찮아요. 장거리 일정이 처음이라 조금 피곤했나 봐요.”
그녀가 말끝에 짧은 한숨을 붙였다. 뜨끈한 바람이 팔뚝에 느껴졌다. 그 순간 유모가 벨을 돌려세워 그녀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벨 양, 열이 심하네요. 내가 치울 테니 벨은 얼른 쉬어요.”
“이것만 치우고…….”
벨이 하던 일을 마저 하겠다며 고집을 부리자 유모가 강수를 두었다.
“벨 양, 감기일지도 몰라요. 저하께 감기를 옮길 생각인가요?”
그러자 벨은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이동했고 유모는 다과상을 치운 다음 신전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호텔에서 투숙 중인 궁의를 불러올게요. 저하께서는 걱정하지 말고 일찍 주무셔요.”
유모가 불을 끄고 나가자 곧 낯익은 새 한 마리가 내 방 창문 앞으로 날아들었다.
***
내 방 창문 앞에 앉은 새는 섀도 나이트의 전서구였다. 내가 손을 뻗자 급하게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는데 잠시 후 방 안에 딸려 있던 기도실의 문이 살그머니 열렸다.
“아르, 잘 잤어?”
“일어난 지 한참 됐습니다.”
아마 밖에 사람이 있어서 나와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나오자마자 창문 앞에서 손을 뻗었다. 아까 도망갔던 전서구가 그의 손목 위에 날아와 앉더니 깃털을 정리했다. 아르가 전서구에게 먹이와 물을 챙겨 주는 동안 나는 창문 앞의 커튼을 꼼꼼히 여미며 말했다.
“저 좁은 곳에 갇혀 있느라 힘들었겠네.”
“해독제를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억지로 꾸역꾸역 다 먹은 것을 보니 증거를 인멸하는 동시에 혹시 걸리더라도 용의 선상에서 제외되려고 그런 것 같고요.”
그의 추리가 몹시 타당해서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숙부가 보통 때였다면 한 입 먹고는 달다며 소리치고 다른 것을 내오라 했겠지.”
“그리고 범인은 볼테르가 아니라 황후일 겁니다. 볼테르 황자가 범인이었다면 자신이 바꿔치기한 초콜릿과는 설탕 함량이 다르다는 걸 깨닫는 순간 굳이 억지로 다 먹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런데 볼테르는 마치 초콜릿이 바뀌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황후가 진범이고 숙부에게 초콜릿을 먹으라고 시켰을 거야.”
어쨌든 중요한 건 나는 그들의 계획을 눈치채고 무사하다는 것과, 그들은 내가 자신들의 계획을 눈치챘다는 사실을 아직 모른다는 거였다.
아르는 전서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발목의 쪽지함에 매달린 종이를 꺼냈다. 가늘게 말린 종이를 섬세하게 펼치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뭐가 많이 적혀 있어?”
“예. 같이 보시겠습니까?”
그는 희미하게 불을 밝힌 램프를 들었다.
“이곳에서 불을 밝게 켜면 문틈으로 빛이 보일 테니 기도실로 가시죠.”
“잘 안 보여?”
나는 그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서 기도실 안으로 들어갔다. 기도실은 몹시 좁아서 사람이 한두 명이 누우면 꽉 찰 것 같았다. 조금 큰 침대와 비슷한 너비였다.
우리는 좁은 공간에 나란히 앉았고 아르는 램프에 불을 켠 다음 램프 앞에 종이를 가져다 댔다. 얇은 종이로 빛이 통과하며 벽에 실지렁이 같은 무늬를 그려 냈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종이의 무늬가 아니었다. 섬세하고 간단하며 규칙적인 그것의 정체는 문자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자, 섀도 나이트의 암호. 손가락처럼 가느다란 종이에 저런 방대한 내용이 새겨 있었다니 그 광경이 실로 기이했다.
아르는 그 방법에 대해서 볼록렌즈가 어쩌고 빛이 어쩌고 하는 어려운 소리를 했는데 그런 건 잘 모르겠고, 황실의 섀도 나이트가 어마어마한 기관이라는 건 잘 알겠다.
“독의 정체는 밝혔다고 하네요. 짧게는 사나흘 길게는 열흘이 지나야 증상이 나오는 독이라 초콜릿뿐 아니라 다른 음식에도 섞여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혹시 몰라 밀렌 님은 해독제가 준비되는 대로 가지고 오겠다고 하고요.”
“그래서 대체 어떤 독인데?”
“감기몸살과 같은 증상이라고 합니다. 당장 발열이 있다면 어서 환궁해야 하지만 아니라면 괜찮으니…….”
거기까지 들은 나는 처음 이곳에 오면서 느꼈던 등골 싸한 기분을 다시금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