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드디어 대 기우제 당일이 되었다.
신전에 도착한 것은 그제였는데 어제는 종일 기우제 예행연습을 했다. 기도문은 외우도록 읽었고, 작은 잔에 담긴 성수를 강을 향해 똑같이 세 번으로 나눠서 뿌릴 수 있도록 손과 팔의 감각을 익혔다. 기우제는 아무런 실수도 없이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신관들이 뒷정리하는 동안 나는 신전 정문 앞으로 나가 기우제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 앞에 얼굴을 한번 비추었으며, 할바마마께서 미리 준비해 주신 황제의 연설문을 대변했다.
‘좋아,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잘 흘러가고 있어.’
곧 정리를 마친 신관들이 신전의 중앙에 있는 마르지 않는 호수에서 떠 온 물을 사람들에게 한 모금씩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 마시면서 단비를 내려 달라 짧게 기도했다.
나는 그 옆에 가만히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햇볕에 까무잡잡하게 탄 피부,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물을 받아 마시는 손바닥에 박인 굳은살이 보였다. 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민심을 얻고자 비가 올 때까지 보여 주기식 기도를 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황궁 안에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애초에 이런 생각까지 해볼 계기도 없었다.
사람들의 모습에 집중할수록 그들이 웅성거리는 것이 선명하게 들렸다. 내가 기우제가 끝나도 신전에 남아서 비가 올 때까지 그들과 함께 기도하겠다고 선언한 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너도나도 나와 황실을 칭송했다.
‘신에게 빌어서 비가 올 수 있다면 이미 여기 모인 사람들의 기도로도 충분히 내렸겠지.’
그리 간절하지도 않은 내 기도를, 심지어 정치적 계산까지 깔린 내 목소리를 과연 신께서 들어주기나 할까?
시간의 신이 내게 준 두 번째 삶도 내 노력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다. 그건 아르가 내게 양보한 자신의 기회였을 뿐이다. 게다가 시간의 신이 내게 준 건 두 번째 시간뿐, 내 복수까지 이루어 준 것은 아니었다. 복수가 성공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나머지는 나의 노력에 달린 것이다.
‘그러니 신에게 영혼 없이 빌어 봤자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아.’
사람들은 내가 기도하면 비가 내릴 것처럼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비를 내리는 능력이 없다. 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니까.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기도 같은 불확실한 것 말고. 훨씬 생산적이고 확실한 일. 기도 같은 것은 나보다도 간절한 사람들, 하늘을 보며 비는 것 말고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것이 남지 않은 사람들에게 맡기고.’
나는 사람들이 슬슬 빠졌을 즈음, 적당히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신전 내에 있는 물 박물관에 들어가 보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벽면을 꽉 채운 벽화가 가장 먼저 보였다. 비가 내리고 지하수에 스며들고, 강이 흘러 바다가 되고 그 물이 증발하여 하늘로 올라 구름이 되고 다시 비가 되어 내리는 그림이었다.
그때 누군가 내 뒤로 다가왔다. 물의 대신관이었다.
“저하, 물의 선순환도를 보고 계셨습니까?”
“아, 네.”
“피곤할 텐데 들어가 쉬지 않고요.”
나는 그림을 향해있던 몸을 돌려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곧은 자세와 형형한 눈빛은 고집스러워 보였고, 허연 머리카락과 깊게 팬 주름에서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인자하게 웃었다. 어쩐지 할바마마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내가 낮에 느꼈던 감정의 일부를 그에게 털어놓았다.
“제가 기도를 하면 신께서 들어주실까요? 저보다 농민들의 기도가 훨씬 간절할 텐데요.”
내 말에 대신관께서는 퍽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흠…….”
사실 나처럼 어린애가 지나가듯 하는 질문에 ‘모두가 힘을 모아 간절히 기도하면 이루어질 겁니다.’ 같은 동화 같은 대답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다. 거기서 아주 조금만 더 성의 있는 답이 나오기를 기대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고민해 주기를 바랐던 건 아니라 조금은 당황하고 말았다.
곧 고민을 끝낸 그가 대답했다.
“아무리 간절하게 기도를 한다고 해도 내리지 않을 비가 갑자기 내리지는 않을 거고, 아무도 기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려야 할 비가 안 내리지도 않을 겁니다. 자연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요.”
그것은 퍽 무신론자 같은 대답이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저 그림은 물의 순환도랍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물의 양은 변하지 않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은 지는 한참이 되었고, 저 먼 사하임에서도 물난리가 났다는 소식은 없으니…….”
대신관은 허리를 굽혀 나와 시선을 맞추고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아마 그 많은 물은 전부 저기 있겠죠. 구름이 무거워지면 어느 순간 반드시 비가 되어 쏟아진답니다. 이건 신학이 아니라 과학이에요. 평생을 물만 연구해 온 이 늙은이의 감으로는 아마 대엿새, 길어야 이레쯤 걸리겠군요.”
비가 오기까지 남은 날은 엿새. 나야 미래를 보고 와서 알고 있지만 대신관은 대체 미래의 날씨를 무슨 수로 알아맞히는 걸까. 몹시 신기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늙으면 비가 오기 전에 무릎이 쑤시거든요. 껄껄.”
대신관께서는 아이처럼 장난치듯 웃었다.
“하하하! 재밌는 농담이에요.”
“농담 아닙니다, 저하.”
“그런데 가만히 있어도 내릴 비라면 우리는 대체 기우제를 왜 지내고 왜 기도를 하는 건가요?”
내 질문에 대신관은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이곳을 위해서요. 그리고…… 자연은 인간의 생각보다 변덕스럽거든요.”
우리는 박물관을 걸으며 많은 대화를 했다. 그렇게 한참 박물관의 관람 코스를 따라 걸었더니 드디어 마지막 방에 도착했다. 그 방은 물의 신전 옆을 흐르는 강과 호수의 수위를 30년 동안 기록한 기록지의 사본과 신전 주변의 지도를 전시한 곳이었다.
이 30년짜리 기록지에 따르면 물의 신전을 통과하는 강은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이 줄어들지언정 결코 마른 적이 없었다. 지금의 대 가뭄에 제국의 저수지들이 바닥 끝을 드러내고 있는데도 유일하게 이 대륙에서 물이 흐르는 지역이 바로 이곳이었다.
“이렇게 물이 마르지 않는 곳인데 왜 제대로 개발해서 사용하지 않는 걸까요?”
“환상 때문이랍니다.”
“환상이요?”
“사람들은 왜인지 고대부터 이 강과 호수를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물의 신전이 세워진 것이고요. 그런 신성한 환상이 켜켜이 쌓여 언제부턴가 이곳은 신의 영역이니 인간이 함부로 손을 대면 벌을 받을 거라는 전설이 생겼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직도 물이 부족할 때에만 이곳에서 직접 길어다 쓰고 있습니다.”
나는 한참 동안 지도를 쳐다보았다.
“이곳이 저수지를 만들고 인근의 농지까지 물길을 돌리기에는 적합한 곳이 아닌가요?”
“보를 설치하여 유속과 수위를 조절한 다음 수로를 뚫어 식수와 농업용수로 쓰기 몹시 적합한 지형입니다. 그러나 그런 대규모 공사를 시행하려면 상당한 돈이 필요하니 주변 영주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지요.”
사실 무슨 소린지 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돈이 없어 못 했던 거지 돈만 있으면 공사를 하겠다는 뜻은 확실히 알아들었다.
“그런데 주변 영주들은 왜 그렇게 하지 않았나요?”
“아까도 말했듯이 이곳은 신의 영역으로서 고대로부터 신성한 곳이었습니다. 영주의 개인 영지도 아닌 곳에 공공사업을 하겠다고 투자해도 아무리 잘해야 본전이고 잘못되면 신을 노하게 했다면서 민심만 사나워지고 욕은 욕대로 먹겠지요.”
박물관의 마지막 방에서 나오며 대신관은 희미하게 웃었다.
“할바마마께 말씀드려 볼게요.”
“폐하께요? 괜찮습니다. 저하의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바로 방으로 들어가실 겁니까?”
“네.”
대신관께서는 나를 내 방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우리가 서로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자 멀리서 뒤따라오던 내 호위기사가 가까이 다가왔다.
“저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죠?”
기사의 얼굴은 퍽 어두웠다.
“황후 마마께서 황자 전하와 내일 이 근처에서 일정이 있다고 합니다.”
“없던 일정이 생긴 거죠?”
“그런 듯합니다.”
없던 일정을 갑자기 잡은 걸 보면 내가 비가 올 때까지 기도하겠다고 한 내용을 어디선가 주워듣고 숟가락 얹으러 쫓아오는 모양이었다.
“예의 주시 하다가 신전으로 오게 된다면 바로 알려 주세요. 할마마마와 숙부님을 마중하러 가야겠어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처럼 해맑게 웃어 보였다.
***
「To. 사랑하는 할바마마께
할바마마, 드디어 대 기우제를 무사히 치렀어요. 저는 신전에서 잘 지내고 있답니다. 신전의 사제님들도 모두 친절하고……
(중략)
이곳까지 오면서 지난 도시들은 물이 부족했는데 역시 물의 성지답게 물이 차 있는 호수가 아름다워요. 이 마르지 않는 물을 지금처럼 가뭄이 드는 때에 활용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From. 귀여운 손녀 아멜리아.」
나는 편지지를 봉투에 넣고 신전에서 빌린 실링 왁스를 녹여 봉투의 주둥이를 잘 봉했다. 그리고 검지에 낀 반지를 뺐다. 반지에는 새끼손톱 크기의 단단한 금속이 박혀 있는데 황가의 문양이 거울상으로 새겨 있다. 나는 손수건으로 반지 알을 닦아 낸 후 실링 왁스 위에 찍었다.
“됐다!”
편지 쓰는 일을 마치고 고개를 들자 아르와 밀렌이 내가 편지를 쓰던 책상을 치우고는 손바닥만 한 봉투를 그 위에 놓았다.
나는 봉투를 열어 안에 든 것을 꺼내 확인했다. 여러 번 접힌 종이를 차곡차곡 펼치자 빼곡한 표가 드러났다. 물의 신전을 둘러싼 강과 신전 내부의 호수의 지난 30년간 수위를 기록한 표를 옮겨 적은 것이었다.
“박물관에서 이거 몰래 베끼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밀렌이 투덜거렸다. 그의 오른손 중지의 가운데 마디에 까맣게 잉크 얼룩이 있었다.
“둘 다 고생했어.”
나는 확인한 서류를 다시 접어 봉투에 넣고 그 안에 방금 쓴 편지도 함께 넣었다.
“섀도 나이트 전서구 좀 빌려 줄래?”
내가 서류 봉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아르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전서구를요? 어디에 쓰시려는 겁니까?”
“어디에 쓰긴? 이거 보내야지.”
내가 당연한 걸 왜 물어보느냐며 되묻자 이번에는 밀렌이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말도 안 되는 걸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둘 다 왜 이래?
“인편으로 보내는 것 아니었습니까?”
“황후더러 내 아이디어를 어디서 날름 주워 먹으라고? 섀도 나이트의 전서구로 보내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할바마마께 바로 편지가 갈 것 아냐.”
그렇게 말하는 내 얼굴을 보는 아르는 아까보다 더욱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고, 밀렌은 깔깔 웃기 시작했다.
“황손녀님, 이걸 새 다리에 매달겠다고요?”
그 순간 손바닥만 한 편지 봉투를 실로 매달아 다리에 묶은 새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제 머리보다 크고 깃털보다 넓적한 편지 봉투를 다리 밑에 대롱대롱 매단 새의 모습은 엽기적이기까지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