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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44화 (44/148)

44화

“할바마마께서 내 안전을 위해 몰래 준비한 것이 있다고 하셨어. 그림자 호위를 붙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게 우리인 줄 어떻게 아셨죠? 그림자 호위를 암살하고 여기까지 잠입한 암살자라면 어쩌려고 했습니까? 저하는 제가 누군지 아시나요?”

그의 날카로운 질문에서 나는 벼랑 끝에 몰린 기분을 느꼈다.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르의 얼굴을 보고 알았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 없다. 섀도 나이트는 황제만 알아야 하는 비밀 기사단이다. 그걸 내가 알고 있었다고 말하면 아르가 곤란할 테니까. 더불어 할바마마도 섀도 나이트의 비밀이 어디선가 새어 나갔다고 생각하며 불안해하시겠지.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내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아르가 먼저 나섰다.

“저하를 추궁하다니 이게 무슨 무례한 행동입니까. 자꾸 저하를 겁주시면 폐하께 아뢸 수밖에 없습니다.”

“아까 욕실에서 황태손의 정상적인 반응은 우리에게 누구냐고 물으며 호위를 부르고 소리치는 거였어. 그런데 마치 우리 중 누군가를 이미 알고 있는 듯했거든. 근데 그게 나는 아니란 말이야. 그럼 너겠지.”

“예. 아시다시피 일전에 저하께서는 저를 직접 호위로 지목하셨던 적이…….”

“그러니까 수상하다는 거야. 그때 너 뭐라고 하고 우리 쪽으로 돌아왔는지 기억 안 나? 사고로 팔 한쪽이 날아갔다고 거짓말하고 돌아왔어. 그런데 저하께서는 마치 네가 검을 잡고 저하의 그림자 호위 노릇을 한다는 사실이 자연스럽다는 듯한 반응이란 말이지.”

고모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실까. 엘비어스 크로이젠, 나의 책사가 있었다면 이럴 때 내게 어떻게 대답하고 행동하라고 조언해 주었을까.

퇴로가 막힌 기분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저하께서 우리 새도 나이트의 존재를 어떻게 아셨을까? 나는 범인이 내부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단장께 이번 일을 고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야.”

토끼 탈을 쓴 맹수가 깊게 으르렁댔다.

하지만 더는 이런 일에 아르를 앞세우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나의 검이지 펜이 아니야. 내 책사는 따로 있고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없다.

나는 벽에 기대 웅크렸던 몸을 펴고 앉았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서 아르를 옆으로 밀어냈다. 아르는 내가 밀어내는 대로 옆으로 물러섰으면서도 불만이 가득한지 팔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르에게 허튼짓하지 말라는 듯이 팔목을 꽉 잡았다.

빠르게 뛰던 심장이 조금씩 차분해졌다. 그러자 조금씩 어둠에 적응한 시야가 트였다. 칠흑 속에서 내 전신을 옭아매는 검붉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묘하게 용기가 솟았다.

“섀도 나이트가 실제로 존재했구나.”

일단 떠오르는 말을 내뱉었다. 그렇다고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다음 대책이 바로바로 떠오를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어쩐지 말이 술술 잘 나왔다.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고 있다는 건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복잡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나는 지금 직감대로 행동하고 있다. 직감에 의존하는 것이 몹시 위험한 행동이라는 건 알고 있다.

곧 검붉은 눈의 맹수가 숨을 홉 들이켰다.

“무슨 뜻이죠?”

“방금 네가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너희 섀도 나이트의 존재를 내가 어떻게 알았겠느냐고. 전혀 몰랐다는 말이다. 네가 방금 말하기 전까지.”

“거짓말 마시죠.”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무엄하고 발칙하구나.”

금방이라도 손끝에 등허리에 힘이 들어갈 것 같았다. 하지만 긴장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엘비어스가 일전에 말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긴장한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된다고, 여유로운 척하라고. 긴장을 풀기 위해서 침을 삼켜서도 안 되며 숨을 깊게 내쉬는 것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할바마마께서 그대를 믿고 손수 뽑아서 내게 보내셨을 텐데 이리 무례하니 이번 일정이 끝나고 황궁에 돌아가는 대로 할바마마께 고할 것이다. 그대가 내게 섀도 나이트의 존재를 발설했으며, 감히 황태손인 나를 몰아세워 추궁하였으니 내 심히 심기가 불편했었다고. 그리 말씀드려도 될까?”

고요한 가운데 상대방의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긴장했던 몸이 조금 풀어졌다. 처음부터 칼자루는 내가 가지고 있었다. 상대의 기에 눌려 잊어버렸을 뿐.

그는 할바마마가 내게 보낸 그림자 호위일 뿐이고 나는 그가 황명을 받들어 호위해야 할 대상이며, 훗날 황제로 모실 황태손이었다. 그는 절대 나에게 밉보일 수 없는 입장이지만 나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드디어 그에게서 고분고분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내게 대답을 구하고 싶다면 그대의 신분을 먼저 밝혀라. 나는 그대의 이름도 작위도 모르지 않느냐?”

“밀렌 트리샤. 작위는 없습니다.”

“작위가 없다는 말은 기사 작위도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지? 그럼 트리샤 경이라고 부를 수도 없겠구나. 밀렌이라고 부르겠다.”

밀렌이 알겠다고 대답하자 명치에서부터 뿌듯함이 밀려들었다.

보세요, 엘비어스 크로이젠. 책사님, 내가 육식 토끼와 기 싸움을 해서 이겼어요!

오늘의 이야기를 황도에 돌아가면 꼭 엘비어스에게 해주어야지.

나는 당장이라도 엘비어스 대신 아르를 끌어안고 펄쩍펄쩍 뛰고 싶은 기분을 참아 내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밀렌, 그대가 내게 대답하면 나도 대답해 주기로 했으니 말해 주겠다. 내가 아르를 예전에 내 호위로 지목했던 그날 사고가 났다는 이야기는 들었었다. 그러나 얼마나 다쳤는지 자세한 건 몰랐어. 그게 가짜 소식이었다니 다행이야.”

나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이어 갔다.

“아는 얼굴이라 익숙하기도 했고, 그가 일전에 황궁의 견습 기사였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 내가 모르는 사이 다른 기사단으로 옮겨서 이번에 어쩌다 그림자 호위로 온 거라 여겼다. 정확히 어떻게 된 일인지는 밀렌, 그대가 알 필요 없으니 나중에 개인적으로 물어보려고 했었고. 의문이 풀렸나?”

밀렌은 여전히 찝찝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거기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밀렌에게 대답을 해준 건 어디까지나 아르의 원만한 직장생활을 위한 배려였지 밀렌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기 위함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밀렌이 더는 골치 아픈 질문을 하지 않도록 얼른 누워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푹신 뒤집어썼다.

“난 잔다.”

어쩐지 꿀잠이 들 것 같은 밤이었다.

***

물의 신전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첫날 밤 이후 유모가 내 초콜릿 병을 잃어버렸다며 퍽 난감해했을 뿐이다. 그래도 내가 이번 초콜릿이 써서 별로 먹고 싶지 않으니 괜찮다고 말하자 유모도 ‘내가 잘못 챙겼나?’ 하더니 그날 이후로는 초콜릿처럼 사소한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렇게 순탄하게 물의 신전에 도착할 때까지도 비는 내리지 않아 날씨가 몹시 화창했다. 쨍한 햇볕이 지상의 모든 것을 태워 버릴 것처럼 따가웠다.

하인, 하녀나 마부를 비롯한 수행원들은 신전 밖에 예약해 둔 호텔에서 묵었고 나는 유모와 벨, 호위기사만 데리고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물의 신관 한 명이 우리를 거처로 안내하면서 신전을 소개했다.

물의 신전은 꽤 단순했으나 웅장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simple is the best.’.

신전의 왼편에는 강줄기가 흘렀고 오른편에는 멀리 바다가 보였다. 신전 내부로 들어오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신전의 정중앙에 자리한 거대한 호수였다. 호수가 어찌나 거대한지 신관이 호수라고 말해 주기 전에는 바깥의 강과 연결된 것인 줄 알았다.

물론 강과 호수 주변이 가뭄으로 말라서 누렇게 마른 흙바닥이 꽤 많이 드러나긴 했지만, 그 너비로 미루어 보아 실제로 물이 흐르던 자리와 호수가 고여 있던 자리는 상당히 넓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붕은 밖에서 언뜻 보았을 때는 편평해 보였는데 안에 들어와서 보니 특이하게도 처마가 위로 뻗고 지붕의 중앙이 아래로 오목해서 마치 그릇처럼 보였다.

나를 거처로 안내하는 물의 신관이 지붕을 가리키며 말했다.

“비가 오면 지붕에서 받은 물이 호수 아래로 떨어진답니다. 지붕을 잘 보시면 저기 작은 구멍이 보이지요?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저기로 폭포처럼 떨어지는데 꽤 장관이랍니다. 기우제를 지내고 나서 비가 오면 저하께서 그 광경을 보고 가실 수 있으면 좋겠군요.”

신관의 말대로 아래로 볼록 내려온 거대한 지붕 가운데로 가느다란 빛기둥이 내려오고 있었다. 산들산들 바람이 불 때마다 호수 위로 떨어진 그 노란 동그라미가 일렁이며 반짝였다.

나는 의도적으로 그 아름다운 배경을 등진 채 신관을 향해서 말했다.

“할바마마께 편지를 보내서 말씀드리고 비가 올 때까지 제가 신전에서 머물며 기도를 올리고 싶어요.”

신관이 몹시 감동한 얼굴을 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다면 제가 대신관님께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이 대 기우제가 내 지난 생에서와 같은 날짜에 치러지는 것이 맞는다면, 이 기우제를 지내고 나서 엿새 후 비가 내릴 거다. 고작 며칠 투자해 민심을 얻을 수 있다면 그건 대 흑자였다.

그것과 별개로 저 높은 천장에서 물이 폭포처럼 떨어지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너무 궁금해서 조금 더 머물고 싶기도 했고.

나는 복도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기둥을 눈으로 훑으며 걸었다. 지붕을 떠받치는 새하얀 기둥은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처럼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우뚝 솟아 있는데 그 높이가 성인 남성 대여섯 명의 키를 합쳐 놓은 듯했다.

그 사이를 한참 걸어 손님방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보인 것은 단아하고 깔끔한 방이었다. 사방에 장식이라곤 일절 없이 공간을 효율적으로 조성해 둔 것이 매력적이었다.

자칫 검소하거나 초라해 보일 수도 있는 구조였으나 그렇지 않은 건 아마 티끌 하나 없는 새하얀 벽과 까마득히 높은 천장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이 장소에 묵직한 경건함을 더했다.

“그럼 쉬십시오.”

신관이 말하며 물러났다. 유모와 벨도 각자 개인 짐 가지고 방을 안내받으러 나갔으며, 호위 한 명만 닫힌 문밖에 남았다.

나는 잘 정돈된 침대에 펄쩍 뛰듯이 엎어졌다.

‘이걸로 미래가 또 바뀌었으면 좋겠다.’

기분 좋은 상상을 하자 나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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