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나는 핫초코를 다 먹은 후 양치를 하고 유모와 벨을 방에서 내보냈다. 피곤해서 일찍 자고 싶다고 했더니 유모는 내 잠자리를 봐주고 나갔다.
그렇게 주위를 물리고 주변이 조용해질 즈음 나는 방에 딸린 작은 욕실에서 두 번째 양치를 시작했다.
‘핫초코를 토해야 해.’
물을 틀고 칫솔을 목구멍으로 깊게 밀어 넣었다. 명치에서부터 깊은 거북함이 밀려들었다.
“욱!”
나올 듯하면서도 나오지 않았다.
‘생각보다 쉽지 않네.’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고 아까보다 조금 더 깊이 칫솔을 넣었다.
‘토해 내야 해. 무슨 독인지 알 수 없으니 토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어.’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짓이었다. 겉으로는 쉬워 보였는데 실상은 많은 요령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예전에 냉궁에 살 때 아르가 한번 이 짓을 하는 걸 직접 본 적이 있어서 그걸 따라 하려고 했는데, 나처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할 짓은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을 조심했다. 먹는 것, 입는 것, 전부. 설탕 스튜 사건 이후로는 아르가 줄곧 기미를 보았고 그때 상한 음식이 섞여 있었는데 당장은 그냥 상한 것인지 독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아르는 손가락 두 개로도 잘 뱉어 냈는데.’
그 순간, 딴생각을 하다 그만 목구멍 깊은 곳을 푹 찌르고 말았다.
“우욱!”
곧이어 명치에서부터 강한 압력이 차올랐다.
“우웨에엑!”
목구멍에서 아까 먹은 꾸덕꾸덕한 초콜릿의 단내가 올라왔다. 동시에 후식으로 먹은 새콤한 딸기 주스 냄새가 따라왔다. 그 색이 마치 죽은 피처럼 보였다.
“욱!”
마지막 초콜릿 덩어리가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저하!”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
감히 황태손의 욕실을 벌컥 열고 들이닥친 아르와 밀렌은 눈앞에서 황태손이 피를 토하며 엎어져 있는 장면을 보고 기겁……을 할 뻔했으나 곧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황태손은 독을 먹고 각혈을 한 것이 아니었다. 독으로 추정되는 것을 먹고 일부러 뱉어 내고 있었다. 조금은 과격한 방법으로.
황태손은 욕실에 쪼그려 앉아서 칫솔을 목구멍에 쑤셔 넣은 채 눈가가 붉어질 때까지 구역질을 해대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하!”
화들짝 놀란 아멜리아는 그 자리에서 뒤로 자빠질 뻔했다. 그녀는 칫솔을 입에 물고 앉아서 한동안 몸이 굳은 채 멍하니 아르와 밀렌을 올려다보았다.
밀렌의 표정은 요상하게 변했고 상황을 이해한 아르는 황급히 아멜리아의 입에서 칫솔을 빼내고 뒤에서 끌어안아 있는 힘껏 명치를 눌렀다.
“우욱!”
아까보다 손쉽게 남은 초콜릿을 토해 낸 멜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밀렌이 제 소매로 코를 가리며 물었다.
“궁의를 부를까요?”
아멜리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도리도리.
아르가 밖으로 나가려는 밀렌의 소매를 붙잡았다.
“부르지 마십시오. 저하께서 몰래 숨어서 이러신 데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래, 그럼. 그나저나 황손녀님, 이런 짓도 해본 사람이 할 줄 아는 거지 좋은 것만 먹고 뱉어 낼 일 없던 사람은 못 해요. 너무 대책 없는 거 아닙니까?”
맑은 물로 입을 헹구던 아멜리아가 밀렌의 꾸중 섞인 말에 움찔하며 제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 그치만 뱉지 않으면…….”
아멜리아가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본 밀렌은 그 순간 황제가 왜 이토록 제 자식들보다 황태손을 더 귀애하는지 깨달았다.
청초했다.
이 한마디로는 전부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한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이 말 말고는 적절한 표현도 없었다.
밀렌은 아멜리아를 침실까지 부축하는 아르의 옆구리를 괜스레 쿡쿡 찔렀다.
“복 받은 놈. 저 황태손이 너를 콕 집어서 호위로 달라고 하셨었다며?”
“저하께 경어는 바로 하십시오.”
“어? 내가 저하한테 반말했어?”
아르의 목구멍 깊은 곳에서 정정하는 말이 치밀었다.
‘저하께! 황태손 저하께서!’
그러나 모든 것이 차분한 문장으로 튀어나왔다.
“계속 반말하고 계십니다.”
“그래? 내가 그랬어요, 황손녀님?”
밀렌은 고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르는 기필코 레이하임에게 이를 보고하리라 마음먹었다. 아무리 기사가 아닌 기사라지만 이건 좀 너무한 것 아닌가?
그런 와중에 아멜리아는 유모도 시녀도 아무도 부르지 않겠다는 밀렌의 다짐을 받아 내더니 긴장이 풀렸는지 급격히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더러운 모습을 보였어. 내가, 황족인 내가! 내 체통은 어디로…….”
아르는 이 분위기를 어떻게든 환기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아멜리아에게 무언가 다른 일거리를 던져 주어야 했고, 동시에 밀렌의 관심을 끌어야 했다. 그는 고르고 골라 질문을 하나 던졌다.
“저하, 독입니까?”
그 질문에 아멜리아도 밀렌도 잠시 제정신이 돌아왔다.
“음…… 아마도?”
“진짜 독 맞아요? 독도 먹어 본 적 없는 황손녀님이 독인 건 어떻게 아셨대?”
“아! 그건 맛이…….”
아멜리아가 막 대답하려던 찰나, 아르는 어쩐지 밀렌과 아멜리아의 대화가 산으로 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급하게 말을 끊어 버렸다.
“저하, 단순한 심증만으로 이런 짓을 하신 것 같지는 않은데 이유라도 있습니까? 의심되는 음식은요?”
“초콜릿인 것 같아. 쌉쌀해.”
아멜리아의 대답에 밀렌이 관자놀이를 살짝 긁적였다.
“근데 황손녀님, 초콜릿은 원래 쌉쌀한데요?”
“그건 나도 알아! 범인이 원래 내 것하고 바꿔치기한 것 같은데. 나는 원래 제일 달달한 것만 먹는단 말이야.”
“범인이 멍청하군요. 어린애 입맛인 걸 고려하지 않고 평범한 초콜릿을 준비했나 보죠?”
밀렌과 아멜리아의 대화가 또 삼천포로 빠지기 시작하자 아르는 다시 화제를 제자리로 돌렸다.
“그래서 그 초콜릿 지금 어디 있습니까?”
“유모가 가지고 있어.”
***
아멜리아가 얌전히 잠자리에 든 것을 확인한 유모는 시녀 벨과 함께 거실로 나왔다. 물론 그들이 나가자마자 아멜리아는 두 번째 양치질(이라고 쓰고 토악질이라 해석한다)을 하러 갔지만.
방에서 나오는 동안 벨은 유모가 들고 있는 유리병 속 초콜릿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런 벨의 시선을 눈치챈 유모가 부드럽게 물었다.
“벨 양도 초콜릿이 먹고 싶은가요?”
유모가 희미하게 웃었다.
‘하긴, 벨도 아직은 어리지.’
황태손의 시녀 중에 가장 어린 벨은 내년에 올해로 열다섯이었다.
그런 그녀가 사실 이번 여정에서 공식적으로는 황태손의 시중을 들 시녀로 따라온 건 맞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그저 장거리 여행에 아멜리아가 심심해할까 봐 말동무 삼아 온 목적이 더 컸다.
아이 돌보기는 유모 하나로도 충분했다.
유모는 초콜릿 병을 벨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벨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는 고개를 저었다. 입술에 힘을 바짝 주어 일자로 꾹 다물었으나 눈빛만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꿀꺽.”
목덜미가 파르르 떨리며 침 넘어가는 소리까지 들리는 걸 보니 거짓말은 천생 못할 상이었다. 유모는 그런 벨이 귀엽다는 듯 조그맣게 소리 내어 웃고는 말했다.
“조금 덜어 줄게요, 벨. 어차피 이번 여정에서 먹으려고 구매한 초콜릿인데 여정이 끝나는 날까지 저하께서 반의반도 채 드시지 못할 거예요. 저하께서 그까짓 초콜릿 좀 먹었다고 혼내실 분도 아니고.”
“괘, 괜찮을까요? 저하의 것인데…….”
“평소에도 저하께서는 희귀한 간식이 들어오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먹고 싶으면 귀찮으니 일일이 허락받지 말고 맘대로 먹으라고 하시잖아요. 지금은 저하께서 주무시니까 다음에 먹고 싶어서 먹었다고 말씀드려요.”
“그럼, 꿀꺽. 한 입만…….”
말을 마쳤을 때 이미 벨의 손은 초콜릿 병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조그맣고 깨끗한 유리병에 가득 초콜릿을 담아 온 벨은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볼을 우물거렸다. 이 정도면 대 기우제 일정을 마치고 황궁에 돌아갈 때까지도 충분한 간식거리다.
유모의 방에서 초콜릿을 얻어 오며 수다를 떠느라 밤이 많이 늦었다. 내일 피곤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조금 되었지만 그래도 최고급 수제 초콜릿을 얻어 왔는데 그까짓 잠 몇십 분쯤이야.
“맛있다. 헤헷! 역시 황실에 납품되는 초콜릿이라 그런가 향도 엄청 고급스럽네.”
같은 시각.
막 잠이 든 유모의 방에 밀렌이 조심스럽게 숨어들었다. 병에 든 초콜릿은 생각보다 양이 적었다.
‘이건가? 과대포장 장난 아니네. 이 큰 병에 반밖에 들지 않았다고?’
밀렌이 초콜릿 병을 집어 들었다.
‘비싼 건 원래 다 이런가?’
밀렌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
우리는 창문 앞에 커튼을 꼼꼼히 치고 바깥에서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아주 희미하게 램프를 밝혔다.
아르는 아주 작게 조각 낸 초콜릿을 통풍이 잘되는 천에 싸서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실로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작은 종이에 적어 새끼손가락보다 가늘게 말아 전서구의 다리에 맸다.
“아르, 뭐 해?”
“폐하께 보내 초콜릿을 조사해 달라고 해야죠.”
“그 작은 종이에 그 내용을 다 적을 수 있어?”
“꼭 필요한 정도는요.”
아르는 램프를 끄고 커튼을 살짝 들춘 다음 전서구를 창문 밖으로 날려 보냈다. 전서구를 할바마마께 보낸다고 했다. 저 작은 종이 안에 한 문장이나 적을 수 있을까 싶었다.
“대체 뭘 얼마나 적을 수 있는데? 뭐 적었어?”
“독. 무사.”
그 두 마디로 이 상황이 다 전달이 된다고? 내 고개가 갸우뚱 옆으로 기울었다.
“초콜릿과 독이라는 것만 보고도 폐하는 누군가 저하를 독살하려 한다는 것 정도는 아실 겁니다. 그럼 곧바로 저 초콜릿을 조사할 거고 독이 검출된다면 초콜릿의 경로를 추적하실 테고요. 그리고 그것보다 저하께서 무사한지가 가장 궁금하실 테니 그것만 적으면 충분합니다.”
듣고 보니 그렇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로 쏙 들어갔다. 얼른 자야 내일의 행군을 이 어린애 신체가 버텨 준다.
“잘 자.”
내가 자리에 눕자 유모의 방으로 초콜릿 병을 훔치러 갔던 섀도 나이트가 내 침대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저기, 저하.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가 갑작스럽게 들이대자 나는 몸을 벽에 바짝 붙였고 아르는 그와 내 침대 사이에 끼어들었다.
“제발 저하께 경어 좀 제대로 쓰십시오. 환궁하면 단장님께 말씀드릴 겁니다.”
“그래, 그러든가. 그보다 저하, 저하는 우리가 누군지 알아요? 보고도 놀라지 않네? 난 수상한 자가 왔다고 호위를 부르면서 소리 지르실 줄 알았거든요. 물론 그랬다면 어쩔 수 없이 저하를 잠시 기절시켰겠지만요.”
그는 맹수 같기도 하고 토끼 같기도 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육식 토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는 존재감이 적어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의 존재를 자꾸만 망각하고는 평소 하던 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아니, 그가 존재감이 적었던 게 아니라 자신의 기척을 내내 지우고 있던 거였다. 그리고 그사이 그는 나에 대한 관찰을 끝마친 듯했다.
상대는 섀도 나이트다. 함부로 대답할 수 없다. 내 대답이 잘못되면 아르가 곤란해진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할 말을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