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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42화 (42/148)

42화

키옌은 주둥이에 빨간 리본이 묶인 초콜릿 병뚜껑을 따서 안에 든 초콜릿의 향을 맡았다. 쌉쌀한 향 끝자락에 살짝 단내가 올라왔다. 키옌은 인상을 찡그리자 옆에 있던 황후궁 시녀장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황후 폐하?”

“이 초콜릿은 전부 버려라. 병도 깨서 가루로 만들어 버려. 흔적을 남기지 마.”

황후는 초콜릿 병을 시녀에게 건넸다.

황제가 지나치게 신중한 탓에 마차와 말에도 손을 대지 못했고 동행할 궁인들도 자신의 사람을 섞어 넣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이대로 무사히 기우제를 마치고 돌아오도록 얌전히 보내 줄 생각 따윈 없어.’

황제가 살아 있는 한 볼테르를 황제로 만들 수도 없고, 설령 황제가 없다고 해도 이미 에오넬의 자리가 굳건한 데다가 멜리까지 있었다.

‘에오넬이야 후계를 낳을 수 없으니 천천히 제거해도 괜찮아. 하지만 멜리는 아니야. 크로이젠 공작가와 약혼 동맹을 맺기 전에 제거해야 해.’

멜리의 마차나 수행원에 손을 쓰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녀가 저녁마다 마신다는 핫초코의 재료인 초콜릿을 바꿔치기하는 데는 성공했다.

먹으면 처음에는 감기몸살과 비슷한 발열과 근육통, 기침을 동반하다 점점 열이 오르는 독 가루를 초콜릿 표면에 카카오 파우더와 섞어 발라 두었다.

어린애가 장거리 여행을 처음 겪으면 몸살이 좀 날 수도 있고 그럼 열도 오를 수 있지. 아무도 독 때문이라고 의심하지는 못할 거다. 그래서 일부러 감기몸살과 비슷한 증상이 나는 독으로 어렵게 구하지 않았던가.

기우제를 지내고 피로가 밀려올 즈음 증상이 나타나도록 양도 조절했다. 이대로 닷새 정도 꾸준히 먹으면 환궁할 즈음 40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릴 테지. 황궁 밖에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을 거다.

‘그렇게 된다면 황위 계승자는 내 아들밖에 남지 않게 된다.’

***

섀도 나이트의 단장 레이하임은 황제가 퍽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레이하임만의 생각은 아닌 모양이다.

섀도 나이트에 입단한 지 올해로 10년 이상 훌쩍 넘긴 밀렌은 장기 출장 명령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지 투덜거렸다.

“우리를 두 명이나 보낼 필요가 있습니까?”

하지만 밀렌과 달리 레이하임은 그 불만을 겉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고작 일개 단원인 밀렌과 달리 레이하임은 임페리얼 섀도 나이트의 단장이었으니까.

레이하임은 어깨를 으쓱하며 밀렌에게 말했다.

“그럼 너 혼자 가든가.”

“네? 장기 출장인데 혼자 가라고요?”

“그래, 그러니까 둘이 가라고. 한 명씩은 돌아가면서 자야 할 것 아니냐?”

레이하임의 말에 밀렌이 경악했다.

“심지어 24시간 교대 패턴입니까?”

“그럼 황태손 호위를 낮에만 하려고 했냐?”

“당연히 밤에만 하는 줄 알았죠. 낮에는 호위기사들 잔뜩 있잖습니까.”

밀렌이 대놓고 귀찮은 기색을 표하자 레이하임은 저놈의 주둥이를 베어 버릴까 살짝 고민했다.

그때 뒤늦게 레이하임의 방으로 누군가 들어오며 말했다.

“그럼 저 혼자 가겠습니다.”

그 얼굴을 확인한 밀렌이 아까보다 더욱 소리를 높였다.

“저거 아르 아닙니까? 설마 녀석하고 가라고요? 저더러 애 보라는 겁니까? 싫습니다!”

밀렌의 얼굴을 확인한 아르 역시 조그맣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애 취급 안 해주셔도 됩니다. 그리고 저 혼자 가도 됩니다.”

“저거 봐요. 혼자 간다잖아요. 쟤 혼자 보내세요.”

한 놈은 안 가겠다고 버티고 한 놈은 혼자 가겠다고 하고.

둘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밀렌이 요령 피우기를 좋아하고 대강대강(본인은 효율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일을 해치우는 편이라면, 아르는 명령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대로만 수행했다. 설령 그 명령이 제아무리 비합리적이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랬다.

그런 둘을 붙여 놓으면 이렇게 싸우게 될 줄 알고 미리 황제께 간언도 했건만, 황제는 기어코 둘을 딱 지목하더니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둘의 쓸데없는 말다툼이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결국 레이하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것들이? 그만! 황명이라고!”

이곳이 평범한 기사단이라면 애초에 밀렌의 이런 하극상은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여긴 임페리얼 섀도 나이트다. 기사의 탈을 뒤집어쓴 암살단.

어려서부터 출신을 따지지 않고 실력이든 재능이든 암살자로서 자질이 있으면 죄다 뽑아다 키워 놨더니 훌륭한 살인 병기들이 되었다. 감정도 있고 고집도 있는 까다로운 살인 병기들.

감정 있는 살인 병기가 말했다.

“황태손 지키라는 게 진짜 황명이지, 꼭 둘이 갈 필요가 있느냐고요.”

고집 있는 살인 병기도 말했다.

“예. 저 혼자 가도 충분합니다.”

“둘 다 내 손에 뒈지기 싫으면 닥치고 가라고!”

결국 레이하임은 오늘도 부하들을 설득하기 위해 칼을 뽑았다.

***

황궁 밖에서 맞는 첫 번째 저녁, 도시에서 가장 큰 호텔에 황실 이름으로 한 층을 통째로 예약했고 기사들이 층 전체를 지켰다.

동행한 수행원들 모두 나와 같은 층을 쓰게 됐지만, 그 덕분에 누구도 내가 몇 호실에 묵게 되는지 몰랐다. 유모는 폐하께서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것 같다고 했으나 나도 사실 그편이 안심되었다.

샤워를 마치고 벨이 내 머리를 빗겨 주었고 유모는 내게 핫초코를 만들어 주기 위해 초콜릿을 녹였다.

“저하를 스위트룸이 아닌 비즈니스룸에 묵게 하다니! 폐하께서는 평소에는 그렇게 저하를 애지중지하셨으면서 치사해요.”

“괜찮아. 나는 여기도 너무 편해.”

사실 혹시 모를 암살에 대비한 일이라고밖에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걸 벨에게 사실대로 말했다간 벨 성격에 분명 충격을 먹고 앓아누울 거다.

“세상에 암살이라니!”

하고 마치 제가 죽을 것처럼 비명을 지르겠지.

그리고 지난 생에서 그랬던 것처럼 잔뜩 겁먹은 눈으로 “저하, 저와 신분을 바꾸어요. 제가 저하인 척 분장을 하고 저하 대신 암살당하겠어요.”라고 진지하게 말할 거다.

벨은 내 머리카락을 숙면에 방해되지 않도록 한데 모아 느슨하게 땋았다. 그리고 끝을 장식 없는 머리끈으로 매듭지어 주었다.

잠자리 준비가 끝나고 유모가 내게 핫초코를 내밀었다.

“저하, 마차를 오래 타느라 피곤했을 테니 조금만 마시고 양치한 다음 주무셔요.”

“응.”

컵에서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새 초콜릿 병을 따서 그런지 초콜릿 향이 평소보다 진하게 느껴졌다.

한 모금 마시자 쌉쌀한 초콜릿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입안에 단내를 남기지 않으면서 깔끔한 맛.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좀 더 어른스러운 맛이 났다.

그런데 이건…….

“유모, 초콜릿 말인데.”

맛이 다르다고 하려다 나는 말을 멈추었다.

유모는 언제나 설탕의 함량이 높은 초콜릿을 사용했다. 나는 이런 깔끔한 초콜릿을 사실 더 좋아하지만 유모는 내가 어린애 입맛이라고 굳게 믿어서 그런지 늘 가장 당도가 높은 것으로 핫초코를 만들어 주었다.

내가 말을 하다 말자 유모가 물었다.

“초콜릿이 왜요? 너무 뜨거운가요?”

“아니, 오늘따라 맛있다고.”

초콜릿이 실수로 바뀐 게 아니라면 이렇게 공교로울 리 없어. 황후가 바꿔치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부디 내 비약이길 바라지만 조심하는 게 좋다.

유모에게도 괜히 알릴 필요도 없어. 내가 초콜릿을 먹지 않으면 되니까.

방금 한 입 마셨을 때 곧바로 증상이 나타나지도 않고 아직 멀쩡한 걸 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효과가 발현되는 독인 모양이다.

나는 눈을 꼭 감고 핫초코를 마저 꿀꺽꿀꺽 삼켰다.

‘양치할 때 토해 내면 돼.’

***

아침 일찍부터 먼 길을 온 사람들은 피곤했는지 조금 이르게 잠들기 시작했다. 객실의 불이 하나둘 소등되었다.

황손녀의 객실도 불이 꺼지자 두 개의 인영이 빠르게 위층 창문에서 기어 내려왔다. 곧 아멜리아의 객실 창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그 두 개의 그림자가 빨려들 듯 방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이 딸린 방 세 개짜리 넓은 객실에서 두 그림자가 거실로 향하다 말고 우뚝 멈추었다.

하얀 달빛이 방 안으로 들이치자 그림자가 걷히고 둘의 모습이 드러났다. 황제의 명을 받고 황태손의 야간 밀착 호위를 맡은 아르와 밀렌이었다.

달빛이 둘을 스쳐 침대를 비추었다.

“아르, 잠깐.”

밀렌이 목소리는 거의 내지 않은 채 입 모양만 달싹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하께서 침대에 안 계신다.”

잘 정돈된 침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르는 침대 옆의 협탁 위에 놓인 빈 핫초코 잔을 손끝으로 쓸었다. 아직 따뜻했다.

“방금까지 여기 있던 것 같습니다.”

“그럼 곧 돌아오겠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다리자. 너도 알아서 잘 숨어 있어.”

밀렌은 그렇게 말하며 거대한 전신거울 뒤로 숨었다.

“숨지 말고 나오십시오. 저하께서 어디 계신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금방 오실 거야.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첫날부터 대놓고 암살하지도 않을 거고. 암살을 시도한다면 긴장도 풀리고 야영 일정이 끼어 있는 환궁 셋째 날에나 하겠지.”

“그러나 만에 하나…….”

“저기 문틈에 불 새어 나오는 거 화장실 아니냐? 오래 걸리는 거 보면 큰 거 보러 가셨나 보지.”

밀렌은 속 편하게 중얼거리며 제 몸을 전신거울 뒤로 구겨 넣었다. 아르는 그런 밀렌을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빛이 새어 나오는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물소리가 들렸다.

‘목욕 시중도 없이……?’

밀렌이 없었다면 자신이 황명으로 함께 왔다는 것을 밝히고 밤사이 곁에서 지켜 주었을 텐데 같이 오는 바람에 숨어서 따라다녀야 했다. 일명 그림자 호위.

‘쳇, 이래서 혼자 오고 싶었는데.’

아르는 욕실 문 앞에서 밀렌이 숨은 자리인 거울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윽! 우욱!”

욕실 안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저하!”

아르와 밀렌이 동시에 욕실로 뛰어들었을 때 발견한 것은 욕실에 엎드려 검붉은 피를 토해 내고 있는 아멜리아 황태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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