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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41화 (41/148)

41화

황도를 떠들썩하게 했던 지난 몇 달, 주인 잃은 영지가 새로운 영주를 만나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가기 시작했다.

오늘도 날씨는 화창했다. 이 화창한 날씨가 한 달이 넘었다. 그러니까 비가 오지 않은 지 한 달이 넘었다는 소리다. 그것도 비가 한참 와야 농작물이 쑥쑥 자랄 이 시기에!

할바마마께서는 연일 가뭄 대책에 관한 국무 회의로 정신이 없으셨고 고모님은 다가올 식량난을 대비하여 밀과 옥수수, 감자를 대량 수입 하기 위해 사하임 대륙으로 무역 협상을 하러 떠나셨다.

그리고 황후는 곤두박질치는 민심을 수습하러 각종 구호단체에 얼굴을 비추러 돌아다녔다. 옆구리에는 제 아들인 볼테르를 끼고서.

황궁 안의 모두가 바쁜 이때, 유일하게 한가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물론 대외적으로 한가하다 뿐, 개인적으로는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서 예법과 역사학, 지리학 수업을 듣고 귀족들의 계보를 달달 외우는 중이다.

아르의 조언대로 승마도 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아서 나중으로 미뤄 둘 정도로 바빴다.

오전의 수업이 끝나고 잠깐 짬이 나서 신문을 펼쳤다. 딱히 읽고 싶어서는 아니고 디엘로니 교수의 역사학 수업 고정 숙제였다. 매일매일 신문 읽기.

최근 들어 신문에서는 가뭄 이야기만 떠들어 댔다.

“이번 건기는 꽤 오래가네. 곧 물의 신전에서 대 기우제를 지내겠지?”

“그렇겠지요.”

잔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의 신전은 황도에서는 제법 먼 곳인데 해마다 요맘때면 형식적인 기우제를 지내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러나 곧 열릴 기우제는 예년과 같은 평범한 기우제가 아닐 것이다. 가뭄이 예년보다 극심하기 때문이다. 큰 기우제를 지내 민심을 다스릴 필요가 있다.

신문의 1면을 제국 중남부의 가장 넓은 곡창지대에서 저수지가 말라 논이 갈라지고 벼가 타들어 갔다는 기사가 차지했다. 나는 다 읽은 신문을 내려놓고 달력을 확인했다.

과거를 또렷하게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지난 생에서 조금 어렸을 적 이처럼 굵직한 기근이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한다.

‘그게 올해였구나.’

그때는 고모님이 황제로 계셨었다. 나는 지금처럼 너무 어렸고. 그래서 그때 볼테르가 황족 대표로 기우제에 참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기우제가 시작한 지 겨우 엿새 만에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렸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민심이 볼테르를 칭송했다.

이번에는 내가 그 꼴 못 보지.

“할바마마께 가자.”

조만간 황후가 볼테르를 기후제에 황실 대표로 보낼 거다. 그렇게 되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쳐야지.

나는 행여 늦을까 서둘러 할바마마의 궁으로 향했다. 할바마마의 궁은 평소보다 바빴다. 귀족들과 행정 관리들이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지나는 길에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얼핏 들어 보니 고모님도 사하임까지 가서 시도한 협상이 잘 풀린 모양이었다.

‘다다음 달이면 구황작물이 대량으로 시중에 풀리겠군. 이제 마실 물마저 부족해지기 전에 비만 오면 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할바마마의 집무실이 있는 층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어머, 멜리 어서 오렴.”

황후가 마치 제 궁인 양 나를 맞이했다. 할바마마의 집무실 입구에 서서.

“할마마마, 오랜만에 뵈어요.”

우리는 거의 동시에 할바마마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할바마마아아아아아아!”

나는 키옌 황후가 인사를 하기도 전에 할바마마 앞으로 냉큼 달려가 안겼고 그러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쳐 버린 그녀는 오도카니 방 한가운데 서 있어야 했다.

“우리 멜리가 왔구나.”

할바마마는 나를 꼭 끌어안고는 볼을 비볐다. 그렇게 인사를 주고받은 후에야 할바마마는 키옌 황후를 아는체했다.

“황후 왔소?”

“꽤 바쁘신 듯합니다, 폐하. 신첩은 폐하의 건강이 염려됩니다.”

“난 멀쩡한데. 그래서 무슨 일이시오?”

“다름이 아니라 가뭄이 극심하니 곧 물의 신전에서 대 기우제를 지내지 않는가 하여서요. 그러면 황실에서 누군가는 가야 할 테니까요.”

그녀가 서두를 꺼냈고 나는 그것을 날름 주워 먹었다.

“진짜요? 그럼 내가 갈래요! 기우제 보고 싶어요. 디엘로니 교수님이 그러셨는데 그냥 기우제나 기청제는 자주 하지만 대 기우제는 10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한대요.”

키옌이 미간을 눈에 띄게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할바마마 구워삶기 작전에 돌입했다.

“황족 중에 누군가는 가야 한다면서요. 할바마마도 고모도 다 바쁘니까 제가 갈게요.”

내 눈빛 공격에 할바마마는 심장을 부여잡고 끅끅거렸다.

“우리 멜리가 이렇게 기특한 생각을 하는구나. 이 할애비랑 고모를 대신해서 그런 중요한 행사에 가려고 하다니. 그래, 대 기우제에는 네가 가려무나.”

할바마마께서 막 비서실과 연결된 설렁줄을 당기려던 찰나 키옌 황후가 그런 할바마마의 손목을 붙잡았다.

“폐하. 황손은 황실을 대표하여 대 기우제에 보내기에 너무 어립니다! 기우제에서 황족이 해야 할 일도 있지 않습니까.”

이 할멈이?

어차피 가서 하는 일이라고는 한 시간짜리 기우제에서 앞에 가만히 서 있다가 신관이 기도문을 주면 보고 그대로 읽고, 성수를 주면 신전 정중앙의 호수에 성수를 세 번 나눠서 뿌리기만 하면 되는 건데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 정도야 가르치면 충분히 하지. 그치?”

“네. 신관님이 있으라고 하는 곳에 가만히 서 있을게요. 저 기도문도 잘 읽을 수 있고 성수도 잘 뿌릴 수 있어요.”

나는 은근슬쩍 내가 기우제의 절차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어필했다.

“보시오, 황후. 아홉 살이면 다 큰 거라니까. 이 정도면 보내도 돼.”

“하오나!”

황후는 포기할 줄 몰랐고 할바마마는 기어이 지난 일을 끄집어냈다.

“황가의 이름에 먹칠하진 않을 거요. 누구랑은 다르게.”

할바마마는 추문에 얽힌 볼테르의 일을 잊지 않았다는 듯 힘주어 경고했다.

물론 볼테르가 가면 클럽에 다녔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찾지 못하는 바람에 그의 일은 은근슬쩍 묻혀 버리고 말았으나 대중들의 합리적 의심까지 완벽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러니 더욱 볼테르가 가서 저와 얽힌 헛소문을 잠재워야 황가의 체면이 서지요.”

“제국의 공식적인 행사를 이용해 황자의 개인적인 체면을 세울 생각을 하지 마시게, 황후. 저가 흐린 제 체면은 스스로 차려야지. 그러므로 이번 일에는 황태손을 보낼 것이니 이 문제를 더는 거론하지 말도록.”

할바마마가 단호하게 쳐내자 황후는 이를 갈며 알겠다는 대답을 쥐어짜 내고 밖으로 나갔다.

나와 볼테르 숙부를 같이 보내자는 둥 어떻게든 핑계를 대어 가며 조금 더 고집을 부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순순했다. 마치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듯.

‘어? 그러고 보니 우리 부모님이 황궁 밖에서 마차 사고로 죽었는데?’

불현듯 등골이 싸해졌다.

***

내가 물의 신전에 가기로 결정되고 나자 모든 준비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직 장거리 마차가 없는 내게 할바마마는 자신의 마차와 마부까지 내주셨다. 황제가 내게 자그마치 자신의 장거리 마차를 내주었다는 소문이 나자 며칠간 궁인들의 입에 그 사실이 오르내렸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물의 신전으로 출발하는 날이 되었다.

“조심하세요, 저하.”

나를 배웅하며 잔느가 당부했다. 사실 잔느도 데려가고 싶었는데 잔느를 데려가면 내 궁을 돌볼 사람이 없어진다. 그러니 데려갈 사람으로는 말동무할 시녀 하나와 유모만 있어도 충분했다.

무엇보다 할바마마의 마차 덕분에 걱정거리가 하나 줄기도 했고.

‘제아무리 황후가 손을 댄다고 해도 황제의 마차에는 못 댔겠지.’

할바마마께서 황제의 전용 마차를 내준 이유가 있었다. 황제의 전용 마차는 황후라도 마차나 마구간에 손을 쓰러 접근하기란 쉽지 않다. 마부 역시 황제의 마차만 모는 사람이니 누군가에게 쉽게 매수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그 덕분에 나는 먹을 것과 시중들 사람들만 조심하면 되었다. 데려갈 하녀도 하인도 내가 직접 골랐고 데려갈 호위기사 여섯 명은 내 호위기사 중에 할바마마께서 정해 주셨다. 그리고 그중 황후의 사람으로 추정되는 페일은 제외했다.

내가 탄 마차는 궁을 벗어나자마자 황도 동문을 향해 달렸다. 황도의 외곽에 가까워질수록 시녀인 벨은 점점 신이 나 떠들었다.

“물의 신전에서 하는 대 기우제를 제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니, 정말 영광이에요! 저하께서 저를 데려간다고 하셨을 때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곧 황도의 마지막 성문이 등장했다. 해자 위로 거대한 교각이 내려왔다. 교각이 내려오는 동안 유모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저하께서는 황도의 성벽 바깥으로 나가시는 건 처음이시군요.”

유모도 아닌 척하더니 오랜만의 황도 바깥 외출에 조금 들뜬 모양이다.

“그보다 벨, 우리 일정이 어떻게 되지?”

“앗! 저하의 스케줄 관리는 원래 시녀장님만 하시던 일인데 이런 걸 제가 해도 되는 건가요? 정말 영광이에요.”

영광일 것도 참 많은 아이였다. 벨은 잔느가 미리 적어 준 우리의 일정표를 들고선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았다.

“지금은 잔느가 없잖아.”

총 네 개의 도시를 통과하는 일정, 그중 두 개의 도시에서는 하루씩 머물 예정이고 나머지 두 개의 도시에서는 식량 등을 보급받을 예정이다.

“그런데 이 중 한 곳은 체리에 후작가와 친한 가문의 영지예요. 황후 마마의 시녀 중 이 가문 출신인 영애가 있어요.”

“돌아서 가거나 아무것도 구매하지 않고 통과할 수는 없을까?”

“하지만 돌아서 갈 만한 다른 도시가 없어요. 인근이 전부 체리에 후작가와 관련이 있는 영지뿐이고 설령 돌아서 간다고 해도 기한 안에 도착할 수 없을 거예요.”

벨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쩔 수 없지. 이대로 가자. 중간에 길을 바꾸는 것도 이상할 테니까. 대신 그곳에서 내가 먹을 것은 아무것도 사지 마.”

할바마마께서 추가로 준비한 것이 있다고 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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