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40화 (40/148)

40화

“동화책에서 읽었는데요.”

그리고 할바마마의 손을 들어서 내 머리에 얹었다.

“황궁 밖에서는 부모님이 아이를 칭찬할 때 이렇게 한대요.”

쓰담쓰담.

그러자 할바마마의 목소리가 울먹울먹 변했다. 감격에 겨운 듯 눈을 반짝반짝 빛내셨다.

“헉! 내 새끼가, 내 새끼가 이렇게 컸어! 세상에 이런 소리도 할 줄 알고!”

응? ‘이런 소리’가 대체 무슨 소린데요?

나는 할바마마의 손을 빌려 내 머리를 쓰다듬던 행동을 멈추고 할바마마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고모님이 한마디 하셨다.

“이 나이 때 아이들이 다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아바마마.”

이 후덥지근한 여름의 끝자락에서 혼자 겨울 분위기 풀풀 풍기는 고모님도 참 대단했다.

곧 샐러드가 식탁에 올라오고 고모님이 먼저 본론을 꺼냈다.

“이번에 작위를 몰수당한 귀족들이 많아서 빈 영지가 여럿 생겼는데 영지 분배는 어떻게 할 건가요?”

“황도에서 가까운 땅은 황제 직할령으로 해야지.”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할바마마께서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고모님도 그런 당연한 걸 물은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먼 땅을 어떡할 거냐고요.”

“파피란 공작가와 세르피스 후작가 그리고 크로이젠 공작가가 힘을 크게 써주었으니 그쪽에 일부 떼어 주어야 할 텐데…….”

“명분이 부족한 건 나도 압니다. 그러니까 그거 어쩔 거냐고 묻잖아요.”

고모님의 말투에서 답답함이 묻어났다. 사실 나도 할바마마가 답답하던 차였다.

사실 내가 봤을 때 두 분 다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할바마마는 명분만 주면 모든 일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폭군 기질이 있었으나, 문제는 그놈의 ‘명분’을 잘 만들지 못한다는 거였다.

반대로 고모님은 없는 명분도 잘 만들어 냈지만 그게 다였다. 그렇게 쌓은 명분을 가지고 실질적인 이득을 취하기까지 지나치게 신중했다. 그래서 대개 보다 못한 파피란 공작이 행동으로 옮겨 주었지.

나는 입에 넣은 샐러드를 삼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경매 어때요?”

내 말에 고모님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러곤 중얼거렸다.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

지금으로부터 약 150여 년 전 즈음의 사례다.

당시 제위 중이던 황제는 피에 미친 폭군이었다. 누군가가 황제에게 환각제를 몰래몰래 먹여 와서 미쳤던 거라는 낭설도 있지만, 중요한 건 그 폭군이 반정으로 폐위되어 쫓겨났다는 거다.

그때 수많은 귀족이 작위를 잃고 주인 잃은 영지는 대량으로 제국령에 편입되었다.

그 직후 남은 귀족들의 추대로 황위에 오른 내 고조할아버님께서는(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황제가 내 고조할아버님이시다.) 반정에 참여해 자신을 황제로 추대한 귀족들에게 그 영지를 나누어 주었는데 그 방식이 당시의 관점에서 실로 충격적이었다.

바로 경매였다.

반정이 있기까지 제법 많은 영지전이 벌어졌었고 그 과정에서 승자들은 전리품을 획득했다. 새로운 황제는 그들이 영지전을 통해 얻어 낸 전리품을 굳이 회수하지 않았다. 어차피 전리품 같은 건 일일이 다 회수할 수도 없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치졸하게 내놓으라 할 게 아니라 깔끔하게 줘버리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대신 황제의 직할령으로 지정할 수 없을 정도로 황궁에서 먼 곳, 황제의 손길이 닿지 않는 지역의 영지를 경매로 팔았다.

그렇게 새 황제는 자연스럽게 계륵이었던 영지를 처분하고 대신 전리품을 재화로 회수했다.

나는 두근두근 가슴을 졸이며 할바마마를 쳐다보았다. 잠시 고민하는 듯 숨소리를 내던 할바마마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현실의 벽이 상당히 높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그때는 반정에 참여했던 귀족들이 전리품을 얻었고 그 전리품 덕에 비교적 공평한 영지 배분이 가능했으나 지금은 아니야.”

얼레? 내가 예상했던 그림은 이런 게 아닌데?

언제나 내 말이면 전부 다 들어주던 할바마마가 이번엔 내 의견을 칼같이 잘라 냈다. 고모님도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어부지리가 생길 거고 그럼 불만이 나오겠죠.”

내가 ‘경매 어때요?’ 하면 할바마마가 ‘오오! 그런 기발한 방법이!’ 하면서 실행에 옮기는 그런 것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고려하는 기색은 보이실 줄 알았다.

엘비어스가 이번 계획에서 가장 힘든 건 황제를 설득하는 거라고 했던 이유가 있었다.

내가 조금만 더 나이가 많았더라면 내가 생각하는 큰 그림을 말씀드릴 수 있었을 텐데.

사실 어린애인 척하는 이유도 할바마마와 고모님 때문이 아니라 황궁 곳곳에 숨어 있는 황후의 사람들 때문이었다. 괜히 나대다가 어른이 되기도 전에 암살당하고 싶지 않다고!

그럼 다음 작전을 개시한다.

“나도 땅이 갖고 싶어요. 내가 살래요!”

“네가 땅이 왜?”

이번에는 할바마마가 조금 다른 의미로 관심을 보였다.

***

할바마마와의 만찬 두 시간 전, 엘비어스가 방문했었다.

“오늘 황제 폐하와 만찬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럼 시간이 없으실 테니 빠르게 이야기 나누죠. 우선 폐하께서는 이번에 일부 귀족들이 작위와 영지가 몰수되면서 황제 직할령으로 흡수된 영지들을 처분하려 하실 겁니다.”

“그렇겠죠.”

“이번 만찬에서 황제 폐하께 일부 영지를 경매에 부쳐 달라고 하십시오.”

다소 뜬금없는 그의 발언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런 틈에 그가 내 방의 책장으로 가서 멋대로 제국 전도를 가져와 테이블에 넓게 펼쳤다.

“여기 이 항구도시는 세르피스 후작께서 탐내던 곳입니다. 이번에 제국령으로 들어왔으니 세르피스 후작가에 파세요. 경매 형식으로.”

“그러다 다른 사람이 사버리면?”

“그럴 일 없습니다. 영지 경영도 가까워야 가능한 겁니다. 폐하께서 황도에서 먼 땅을 봉신들에게 처분하려는 이유가 있어요. 게다가 이 도시 근방에는 항구의 이점을 살려 흑자를 낼 능력이 되는 영지도, 후작께서 작정하고 입찰하려 들면 그 재력을 이겨 낼 영주도 없습니다.”

“알았어요. 그렇다면 작전 세력이 붙어 가격 거품이 형성되지 않도록 관리하기만 하면 되겠군요.”

내 말에 엘비어스가 숨을 잠시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엘비어스에게까지 내 나이 때 어린아이인 척 굴기 위해 애를 쓸 필요는 없지 않을까. 어차피 그를 책사로 두게 된 이상 내가 그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으려면 어설픈 연기는 집어치우는 편이 나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크로이젠 공작가는 뭘 원하는 건가요?”

“황실에서 소비하는 과일들을 납품하는 과수원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그곳이 포함된 영지가 이번에 들어왔을 겁니다. 하지만 황궁에서 너무 멀죠.”

“거긴 경매로 내놓으면 서로가 사 가려고 난리가 날 텐데요?”

“황제 폐하께 그걸 달라고 하십시오.”

세르피스 후작가가 노리던 항구도시는 경매로 내놓으라고 했으면서 그 알짜배기 중에서도 알짜배기 영지를 그냥 달라고?

그러곤 하는 말이 더 가관이다.

“황제 폐하께 저하의 땅으로 받은 다음, 제 동생에게 약혼 선물로 주시면 됩니다. 저하께서도 어차피 처분하려 했던 영지 좀 떼어 주고 책사를 얻으실 테니 꽤 남는 장사 아닌가요?”

“음.”

그렇긴 한데 이거 너무 양아치…….

“그래서 주실 겁니까, 마실 겁니까? 어차피 저하께서 아직 어리시니 정식 약혼까지는 몇 년 걸릴 겁니다. 저는 최대 10년까지도 충분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뢰의 증표랄까요?”

나는 잠시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파피란 공작가는? 거긴 어느 땅을 줄까요?”

“그들은 영지가 필요 없을 겁니다. 이미 제국에서 황제보다 많은 땅을 소유한 가문이 파피란 공작가니까요. 여기서 더 영지를 넓히면 관리하기만 힘들 겁니다.”

“그럼……?”

“지금 파피란 공작가에서 원하는 건 딱 하나입니다. 황태녀의 안정적인 권력. 즉, 볼테르가 황궁 밖으로 나가 독립하는 것이죠. 그건 저하께서 하시기로 했잖아요.”

“하지만 그건 이 일과 별개로…….”

그건 이번 일로 그들이 새로이 얻을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이었다. 몰딘 남작령을 볼테르 숙부에게 떠넘기는 일.

“아하! 그건 상관없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파피란 공작가가 득을 보는 건 확실하니까요. 그러니 황태녀 전하께 말씀하지 마시고 폐하를 설득하여 저하의 이름으로 생색을 내세요.”

나의 책사는 그냥 양아치가 아니라 정말 쌩 양아치였다. 쌩 양아치가 말했다.

“볼테르 황자에게 확실하게 몰딘 남작령을 떠넘기려면 남작의 땅을 뺏는 일은 경매 이후로 미뤄 둬야겠군요. 괜히 경매할 때 남작령까지 매물로 나오면 안 되니까요.”

양심을 저 너머로 팔아먹은 내 책사는 계속해서 나를 사도(邪道)로 이끌었다.

“그렇게 하면 폐하께서는 파피란 공작가에 에오넬 황태녀 전하의 황위 계승권에 대한 폐하의 마음을 다시 한번 확실히 보여 줄 수 있게 되고, 폐하를 설득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하 역시 파피란 공작가에 확실한 아군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게 될 겁니다.”

“확실히 소공작의 말대로 황실이 감당하기 버거운 영토를 경매 형식으로 봉신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그 과정에서 황실도 경매금으로 어마어마한 이득을 보게 되겠군요. 더불어 크로이젠은 공짜 영지를 얻게 되겠고요.”

“어라? 그건 제 동생에게 주는 약혼 선물이 아닙니까? 게다가 이번 사건이 잘 풀리는 데에는 제 동생의 공이 지대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엘비어스가 얄밉게 웃었다.

“뭔가, 엄청…… 약았어.”

“정치란 그런 겁니다.”

***

“네가 땅이 왜?”

“땅에 과일을 잔뜩 심어서 사람들한테 나눠 줄 거예요.”

나는 활짝 웃으며 과장된 몸짓으로 두 팔을 벌렸다.

으아아아! 손발이 오그라든다아아아! 손가락이 사라질 것 같아.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수치심이 목까지 차오를 무렵 할바마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마.”

“그럼 그 과수원 땅을 멜리에게 하사하시고 멜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세요. 나머지는 멜리가 머리가 좀 크면 알아서 하겠죠.”

고모님 나이스! 이로써 내 책사에게 보낼 선물을 얻어 냈다. 그다음 내 외가에 보낼 선물은…….

“그래. 그건 그렇게 하고. 나머지는 귀찮은데 멜리 말대로 그냥 경매할까?”

“아까는 합리적이지 않다면서요.”

“귀찮아. 내가 황젠데 배 째라고 해!”

사실 할바마마가 반대할 것을 예상하고 엘비어스가 플랜 B, C, D까지 시나리오를 짜주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간단하게 끝이 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