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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39화 (39/148)

39화

크로이젠 공작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나는 어제 있던 일을 떠올렸다.

“할바마마 화 안 나셨어요?”

“화 많이 났다. 이 할애비는 삐질 거다.”

그러면서 축객령을 내렸지.

어제 나는 할바마마께 내가 보름 전 즈음 황궁 밖으로 몰래 나갔던 일과 그때 벌어졌던 일 중 아르에 관한 것만 빼놓고 일부를 할바마마께 털어놓았다.

더불어 이미 아주 오래전에 라벤더궁의 비밀 통로를 찾았었다는 사실도 이야기했다.

내 예상과 달리 할바마마는 나를 꾸짖거나 화내지 않았다. 라벤더궁의 비밀 통로에 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삐졌다고 말했지.

할바마마는 내가 누구와 나갔는지, 왜 나갔는지,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았다. 내가 몰딘 남작과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은 나 혼자 해결할 수 있다고 하자 그럼 한동안 지켜볼 테니 알아서 하라고 하셨다.

마차가 크로이젠 공작저에 도착하고 나는 로이드의 에스코트를 받아 공작저의 응접실로 들어섰다. 응접실에는 엘비어스가 있었다.

“오셨습니까. 저하.”

“오랜만이에요. 크로이젠 소공작.”

나는 자리에 앉으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남작이 대리인을 보냈다고 들었어요. 예상대로네요.”

“예. 그래서 바로 다음 계획을 진행했습니다.”

“크로이젠 공작가의 이름에 겁을 먹고 정말로 직접 오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그때는 그때 나름대로 엘비어스의 계획이 있었겠지만 우리의 애초 계획은 어디까지나 남작이 대리인을 보낸다는 가정하에 짜여 있었다.

“제가 하라고 했던 일은 하셨습니까, 저하?”

“네. 내 이름으로 황도 경비대장에게 서한을 보냈어요. 몰딘 남작이 신고했던 사건의 수사를 증거 불충분으로 미해결 종결하라고요. 정말 그렇게만 보내도 괜찮을까요?”

“황도 제3구역 경비대장의 자리까지 올라갈 정도로 사회생활을 한 자라면 적어도 권력에 대한 눈치는 있을 겁니다. 황실의 이름으로 보낸 서한이었으니 아마 이번 일을 함부로 떠들면 제 목이 날아갈 수도 있다는 건 잘 알 거예요. 걱정하실 일 없습니다.”

엘비어스가 단언했다.

“그래도 만에 하나…….”

“그자가 설령 떠벌린다 해도 괜찮습니다. 자신의 행선지를 숨기고 불법을 저지른 볼테르 황자 때와는 달라요. 저하의 행선지는 몹시 깨끗하며 폐하께서 알고 계시니 막아 주실 겁니다. 물론 저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번 일을 숨기지는 못하겠지만요.”

나는 녹인 초콜릿이 든 머그를 천천히 흔들었다.

“엘비어스 공자, 나는 이번 일로 남작의 영지를 빼앗고 싶어요.”

“몰락 귀족으로 만드시려는 겁니까? 불가능할 건 없지만 그자를 파산시켜서 저하께서 얻을 이익이 없습니다.”

남작의 영지를 빼앗는다. 그리고.

“숙부에게 그 영지를 넘길 겁니다.”

“예상치 못한 흥미로운 전개군요. 전 저하께서 그걸 그 녀석에게 주고 싶어 할 줄 알았습니다. 물론 그러셨다면 저하를 말렸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는 이다음에 내가 황제가 되면 훨씬 더 비옥한 땅, 좋은 영지를 골라 작위와 함께 하사할 거다.

오히려 지금은 할바마마를 종용해 볼테르에게 영지를 넘겼을 때의 이점이 더 크다.

첫째, 황제가 황자에게 영지를 하사하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

‘황태자가 아닌 황자는 황실에서 떠나라.’ 권력을 황태자에게 몰아주는 동시에 과년한 황자나 황녀를 독립시켜 정치권에서 멀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옛날, 내 부모님이 살아 계실 적에 공작 부인으로 봉작을 받아 출궁했던 고모님처럼 말이다. 그때는 볼테르가 성년이 아니라 황궁에 붙어 있었지만 지금은 명분도 충분하다.

둘째, 몇 년에 한 번 숙부를 황도 바깥으로 쫓아낼 수 있다.

몰딘 남작령은 야만족이 자주 쳐들어오는 국경 지역의 영지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3년에 한 번쯤은 소규모의 공성전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제국법에 따르면 그때마다 영주는 닷새 안에 자신의 영지에 가서 직접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

“땅이라고 다 좋은 땅은 아니니까요. 야만족과 맞닿은 국경 지역입니다. 선물로 하사할 땅이 아니에요. 오히려 누군가를 귀양보내기 딱 좋지 않나요?”

엘비어스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십니다. 그러나 저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려면 황제 폐하께서 움직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건 제 능력으로 불가능한 영역이고요.”

“알아요. 할바마마를 움직이는 건 제가 할 수 있어요.”

***

평소라면 대전 회의가 끝났어야 할 시간, 황제는 귀족들을 내보내지 않고 대신 황후의 시녀 하나를 대전으로 끌고 왔다. 겁에 잔뜩 질린 채 기사들 손에 질질 끌려 들어온 시녀가 바닥에 팽개쳐졌다.

귀족들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끌려온 여자가 대체 누군지 수군거렸다. 황후의 시녀라는 말이 웅성웅성 돌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헛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키옌 황후가 나타났다.

“대전까지 부르시다니 이례적인 일이네요. 폐하.”

“이 꼴이 보인다면 내가 왜 불렀는지 알겠지. 해명해 보시오. 황후.”

키옌은 황제의 시선을 따라서 제 시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모르겠네요.”

귀족들이 황제와 황후와 바닥에 엎드린 시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시녀는 황도의 공립 보건소 앞에서 잡았소. 잡았을 당시 이런 서류를 가지고 나오고 있었고.”

시종 하나가 서류 사본을 황후 앞에 대령했다. 키옌은 그것을 몇 번 쓱 들추어 보았다.

“페르디 백작 영윤의 사생아를 배었다 주장했다는 그 여자의 의료 기록이군요.”

“황후가 이게 대체 왜 필요했던 거요?”

“시녀의 근무 시간 이외 개인적인 행동까지 제가 어찌 압니까.”

“그래? 난 황후가 페르디 백작가의 불미스러운 소문과 관련한 증거를 없애 주려고 그런 줄 알았지.”

황제가 민감한 주제를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황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키옌이 변명하듯 소리쳤다.

“제가 뭐 하러요?”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황제가 비단 주머니를 황후 앞으로 던졌다. 주머니 안에서 잘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패물이 쏟아졌다.

촤르륵!

반지와 목걸이, 머리장식류였다.

“전부 황후의 것이네. 황후궁의 품위유지비 사용 내역서와 이 패물의 품질 보증서를 대조하는 것까지 끝났고.”

샹들리에의 불빛을 받은 장신구가 반짝 빛났다. 키옌의 눈동자가 움찔 흔들렸다.

“이 패물을 받고 서류를 내준 공립 보건소의 고용인의 자백도 있었고.”

“확인만 하려고 했어요.”

다급해진 키옌은 그만 아무 말이나 내뱉고 말았다.

“그걸 황후가 왜 확인하시오? 귀족과 관련한 일의 수사는 황제의 명을 받고 기사단이 하는 것이오. 황후가 할 일이 아니라!”

황제가 소리치자 기다렸다는 듯 파피란 공작이 첨언했다.

“황후 마마의 행동은 월권입니다. 명백하게 황제 폐하의 황권을 침범한 행위로 간주할 수 있다 사료됩니다!”

황권을 침범했다는 말은 자칫 잘못하면 반역으로 해석할 여지도 충분히 있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

황제는 키옌의 말을 더 들을 필요 없다는 듯이 잘라 버렸다.

“이 시간 이후로 법에 따라서 제국의 공정한 수사를 방해한 저 시녀의 귀족 지위를 박탈하고, 황후를 황후궁에 한 달 동안 유폐하겠다. 황후는 그동안 자숙하시오.”

키옌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입술을 파르르 떨었고 체리에 후작이 다급히 황제를 불렀다.

“폐하! 과한 처사이옵니다!”

“짐이 과하다 했소, 후작? 난 단 한 번도 황후가 황실의 안주인으로서 행사하는 그 어떤 권한에도 참견한 적이 없어! 그런데 황후는 지난 수년 동안 사사건건 황제의 일에 참견하고 있고. 그런데 이번에는 대놓고 그랬군. 그래도 내가 과한가?”

황제가 도저히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후작이 한 발짝 물러섰다. 딱 한 달이다. 한 달만 키옌이 자신의 궁 안에서 얌전히 버텨 주면 그걸로 황제는 이 일을 더는 추궁하지 않을 거다.

그렇게 계산한 후작은 키옌을 힐끔 돌아보았다. 일을 벌일 거라면 미리 언질이라도 줄 것이지 예상치 못한 일이라 막아 줄 틈도 없었다.

키옌이 황제궁의 시녀들 손에 끌려 나가며 악을 썼다. 억울하다는 그 말에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후작이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자 황제가 옥좌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후작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이후로 한 번만 더 그대의 딸이 내 황권에 도전하는 행위를 한다면 이번엔 황후궁이 아니라 냉궁에 유폐될 것이네, 후작. 새겨들으시게.”

***

황후가 한 달 동안 궁에 유폐되고 할바마마는 무서운 속도로 관련한 일 처리를 끝마쳤다. 사건에 연루된 귀족 중 일찌감치 자백한 이들은 간신히 귀족의 이름만 건졌고, 나머지는 제국의 귀족 계보에서 도려냈다.

페르디 백작가 도련님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여자의 이야기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것치고 금방 묻혀 버렸다.

그렇게 사건이 마무리되어 갈 즈음, 오래간만에 짬이 난 것인지 할바마마는 나와 고모님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셨다.

전채요리로 입맛을 돋우고 시종들이 빈 접시를 걷어 갈 즈음이었다.

“식사 예법이 완벽한 걸 보니 크로이젠 공작 부인이 멜리를 잘 가르치는 모양이구나.”

우리 이제 막 애피타이저 먹었는데 칭찬이 너무 빠른 거 아닙니까? 메인디시가 나오기는커녕 샐러드도 아직이라고요.

그래도 옛날 같으면 덥석 끌어안고 물고 빨고 하셨을 텐데 할바마마는 언제부턴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한두 마디 칭찬만 하고 마셨다.

정확히는 고모님께서 내가 이제 좀 컸으니 아무 데서나 껴안고 볼을 부비는 그런 추한 짓은 그만하라고 말씀하신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문득 쳐다본 할바마마의 손이 달달달 떨리고 있다. 그것은 수전증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내 양 볼을 잡고 쭉 늘리며 얼굴을 부비고 싶은 것을 참아 내는 필사적인 몸짓이었다.

그러면서 힐끔힐끔 고모님의 눈치를 살폈다. 고모님도 그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할바마마를 향해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아바마마. 식사‘만’ 하세요.”

“아, 안 해. 안 한다고! 걱정하지 마라. 치사하고 더러워서 내 참는다!”

이 부녀, 분위기 보소. 체하게 생겼다.

적어도 프리체 백작 영애와 함께 크로이젠 공작 부인의 예법 교육 시간에 식사 예절을 실습하며 만찬을 들었던 분위기가 지금보다 백만 배는 더 평화로웠다. 그 정도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내게 평범한 가족 식사 시간을 달라!

그러나 이 살얼음 돋는 분위기를 타파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나뿐인 듯했다.

휴, 어쩔 수 없지.

나는 식탁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할바마마의 오른손에 내 두 손을 포갰다. 그리고 눈동자 가득 물기를 머금고 할바마마를 쳐다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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