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황도의 여러 구역 중 황궁과 가장 멀면서도 도시 가장 외곽에 위치한 슬럼가, 경비대의 치안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지역에 돈도 갈 곳도 없는 사람들 또는 범죄자들이 정착해 만든 무허가 판자촌이다.
그리고 그 슬럼가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오면 2층짜리 낡은 건물들이 즐비하다. 주로 1층은 작부가 있는 술집이었고 2층은 창문마다 검붉은 커튼이 두껍게 쳐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도심 방향으로 걷다 보면 건물은 좀 더 번듯해졌다. 오래되긴 매한가지였으나 그 오래된 느낌이 낡았다기보다는 제법 운치가 있다. 그렇게 길을 따라가다 보면 점차 화려해져서 이윽고 귀족들의 밤 문화의 꽃이라 불리는 술집 로크스 거리와 맞닿게 된다.
그런 로크스 거리는 요 며칠 불경기를 맞아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신문 낭독꾼이 슬럼가에서도 신문을 읽기 시작한 지 보름째부터 시작된 불황은 한 달 넘게 이어졌다.
게다가 슬럼가에서 시작된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심지어 근거도 없이 구체화되기까지 했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러블릭 포션에 더 주목하는 겁니까? 전 대중의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에오넬이 신문을 덮자 그녀의 호위기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침 일찍 공수해 온 조간신문을 수정궁의 후원에서 한 시간 만에 전부 읽은 에오넬은 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시원한 아침의 봄바람이 가슴 깊이 들어왔다.
“그대가 대중적인 생각을 가지지 않았나 보지.”
호위기사는 주군이 무심하게 던진 말에 끙-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오넬은 앞으로의 계획을 머릿속에 그려 갔다.
로크스 거리의 가면 클럽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약은 드림 퍼퓸이었지만 정작 소문의 중심에 떠오른 건 미약인 러블릭 포션이었다.
“저 진짜 궁금해서 여쭙는 겁니다. 왜 대중들이 러블릭 포션에 주목하는 겁니까? 그것도 전하의 의도된 그림 맞죠?”
“귀족가 도련님들은 정신없이 잠이 들 정도로 힘들게 일하며 살지 않아. 그러니 드림 퍼퓸이 더 많이 팔린 것이지.”
“그게 러블릭 포션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서민들에게는 고된 노동 후에 두 다리 뻗고 자는 게 꿀잠인데, 그들은 드림 퍼퓸의 효능이라는 몸이 나른해지고 눈을 감으면 잠이 솔솔 밀려들어 기분이 편안해진다는 말은 노동 후의 꿀잠과 도통 무슨 차이인지 모를 거란 말이네.”
기사가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에오넬은 그런 그의 순박한 모습이 즐거웠다.
“자신들의 상식으로는 드림 퍼퓸이 잘 이해가 되질 않으니 반대로 관심이 러블릭 포션에 쏠린 것이지. 게다가 고대로부터 색사는 인간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더냐?”
거기까지 말하더니 그녀는 더 설명하기 귀찮은 듯 대충 얼버무렸다.
“자기들 딴에는 귀족님들이 고급술에 섞어 마시고는 서로 사랑에 빠지는 묘약이라 하니 뭔가 로맨틱한 심리라도 자극한 모양이지.”
“로맨틱이라기보다는 범죄…… 아니, 그보다 아까 신문 1면에 있던 기사는 좀…….”
에오넬은 1면에 있던 기사 내용을 떠올렸다.
페르디 백작가 후계자의 사생아를 배었다고 주장하는 여자가 나타났다는 그 기사 말하는 건가? 그 여자는 로크스 거리의 모 칵테일바에서 페르비오 남작 영윤이 준 러블릭 포션을 술에 섞어 나누어 마시고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귀족들의 사생아도 있지 않을까 하던 사람들의 의문은 소문이 황도 중심가와 가까워질수록 확신으로 변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살이 덧붙었다. 어느 클럽에서 얼마 전 은퇴를 선언한 유명 여가수가 무슨 백작가의 첫째 도련님의 정부였다더라 하는 이야기라든가. 무슨 극단의 정상급 여배우가 사실 누구 남작의 후계자와 불륜 관계였다는 이야기 등.
도대체 어떻게 하면 러블릭 포션이라는 소재 하나 가지고 소문이 이리도 부풀려졌을까 싶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수군거렸다.
그런 소문을 사실로 만들어 줄 누군가가 나타나 주길 바랐지만 한 달이 다 되어 가도록 실제로 그런 여자가 표면에 등장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에오넬은 과감하게 결정했다.
‘그렇다면 내가 그냥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일을 벌이면 되지?’
파피란 공작가가 유사시를 대비해 가지고 있는 가짜 평민 신분, 가상의 인물은 꽤 많았다. 그중 하나를 적당히 골라 가짜 임신 서류를 꾸몄다. 그 직후 페르디 백작 영윤의 뒷조사 자료를 토대로 적당히 알리바이와 시나리오까지 만들어서 신문사에 제보한다.
“황자는 못 낚았지만 그래도 대어를 낚을 수 있겠어.”
“페르디 백작가요? 그런데 진짜 그 여자가 페르디 백작가 큰 도련님의 아들을 임신한 걸까요?”
페르디 백작가라면 황후가 제 조카인 민티아와 약혼을 추진하는 가문이었다. 아직은 민티아가 어려서 제대로 이야기가 오가지 않았지만, 아멜리아와 로이드의 관계처럼 암묵적인 예비 약혼 관계였다.
이 모든 것이 에오넬의 계략인 것을 모르는 호위기사는 페르디 백작 영윤이 아무리 전하의 정적이라곤 해도 그렇게까지는 안 봤는데 생각보다 쓰레기였다며 욕했다.
에오넬은 제 호위기사를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황후가 백작가를 버릴지 아니면 앞으로 나서 줄지 지켜봐야겠어.”
***
“대체 뭘 어떻게 처신하면 그런 날파리가 꼬여? 곧 그 여자를 따라서 개나 소나 귀족 사생아를 뱄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나타날 거라고!”
소식을 접한 키옌은 제 뒷목을 잡고 부들거렸다. 지금 구설에 오른 다른 가문의 머저리들이 앞다투어 자백을 해대는 것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이번에는 더 골 때리는 일이 일어났다.
이런 종류의 스캔들은 거짓도 있지만 대개 사실인 것이 훨씬 많다. 그리고 이렇게 안팎으로 시끄러울 때는 대개 적당히 돈을 쥐여 주는 선에서 그친다. 죽이는 것도 다 돈이므로 그 사이쯤 어딘가로 협박 섞인 합의를 보는 셈이었다.
페르디 백작 영윤을 시작으로 이제 또 비슷한 종류의 소문, 혹은 비슷한 종류의 주장들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키옌은 볼테르의 방에서 발견했던 망측한 그림들을 떠올렸다.
‘내 아들은 설마…… 아니겠지?’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이미 아들에 대한 신뢰가 조금씩 부서지고 있던 키옌은 조바심이 났다.
설령 볼테르가 결백하다고 해도 이미 소문에 의하면 볼테르도 엮일 대로 엮인 상태다. 증거가 나오지 않았을 뿐.
사람들은 이제 볼테르 황자도 이 사건에 연루된 건데 다들 몸을 사리느라고 황자 이야기는 숨기는 거라는 둥, 황실에서 황자만 의도적으로 숨긴 거라는 둥 수군거렸다.
키옌은 테이블에 손톱을 따닥거리다 우뚝 멈추었다.
“그 여자를 찾아.”
“찾아서 어떻게 할까요?”
“사건을 묻어야지. 적당히 돈을 쥐여 주고 낙태시켜. 그 여자의 서류를 꾸민 의원도 찾아서 임신 서류도 불에 태워 버리고. 만약 분수를 모르면 입을 막아야지.”
이 사건은 그냥 두어선 안 된다. 거짓이든 진실이든 조만간 진짜로 어느 귀족 사생아를 낳았었는데 그간 무서워서 숨겨 왔던 거라는 말까지 튀어나올 수도 있다. 그러면 그 와중에 황자의 사생아를 낳았다는 주장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거짓인지 진실인지는 중요치 않다. 그런 소문 자체가 나는 것을 막아야 했다.
키옌은 드디어 이 사건에 직접 개입하기로 결심했다.
***
몰딘 남작가 저택에 도착한 종이 한 장. 고작 종이 한 장으로 몰딘 남작가는 새벽부터 발칵 뒤집혔다.
“나리! 큰일 났습니다. 얼른 나와서 이것 좀 보십시오.”
남작의 하인이 편지 봉투를 들고 달려와 그의 앞에 갖다 바쳤다.
“뭐야? 이건.”
편지 봉투였다. 봉투 뒷면 중앙에 푸른 문장이 찍힌 것으로 보아선 다른 귀족이 보낸 공식 문서 같았다.
봉투의 테두리를 장식한 넝쿨무늬는 우아했고 중앙에 박힌 푸른 문양이 꽤 독특했다. 교차한 검 두 자루 위로 유니콘이 그려진 문양이었다.
같은 문양이 봉투 입구를 봉한 붉은 씰링 왁스 위에도 찍혀있다.
“이거 어디 거더라?”
자주 왕래를 하는 가문의 문양은 전부 알고 있었으나 이 푸른 문양은 어디선가 본 듯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았다.
평소 그에게 오는 편지는 한정적이었다. 영지에서 집사가 보낸 지난달 영지 경영 보고서라든가, 그와 사업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비슷한 급의 귀족들이 보낸 파티 초대장 등등. 그런 가문 문양은 거의 외우고 있다.
이따금 연락이 오는 급이 높은 귀족이라고 해봐야 영지가 인접해 있어서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페르디 백작가뿐이었다. 그마저도 영지를 관리하는 영지의 집사들끼리 주고받는 서신이지 남작과 백작이 직접 서신을 주고받은 적은 없었다.
남작이 문양을 쳐다보고 골똘해 있자 하인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아이고, 나리. 이거 크로이젠 공작가잖아요!”
백작도 아니고 자그마치 공작가라니!
“거기서 나한테 편지를 왜 보내? 잘못 온 거 아니야?”
몰딘 남작은 몇 번 더 봉투를 살펴보다가 페이퍼 나이프도 없이 봉투를 부욱 뜯었다.
안에서 나온 것은 양피지 한 장이었다. 힘 있고 유려한 필체로 자신을 밝힌 편지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엘비어스 크로이젠, 크로이젠의 두뇌라 불리는 소공작이었다.
내용은 많지 않았다.
보름 전, 로즈벨리아 거리에서 있었던 일로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오늘 내로 공작저에 오라는 거였다. 당일 찾아오겠다는 말도 충분히 무례할 터인데, 오늘 보낸 편지에 오늘 찾아오겠다는 것도 아니고 상대에게 오라 가라 하다니! 이건 제아무리 소공작이라도 몹시 무례한 요구였다.
“이게 무슨!”
남작은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와그작 구겼다.
“내가 몹시 바쁘니 가지 않겠다고…….”
거기까지 말하던 남작이 문득 하던 행동을 멈추고 구겨진 양피지를 조심스레 펼쳤다.
“보름 전에 로즈벨리아 거리……?”
로즈벨리아 거리에는 꽤 자주 방문했는데 거기서 크로이젠 공작가의 소공작과 관련될 일이 뭔지는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편지 가장 밑에는 오늘 안에 오지 않으면 후에 벌어질 일은 알아서 하라고?
“이 건방진 애새끼가.”
마흔이 넘은 남작에게 엘비어스 크로이젠은 이제 갓 스물이 넘은 새파란 애송이였다. 하지만 공작가라는 이름에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몹시 바쁘니 대리인을 보내겠다고 전해라.”
최소한의 자존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