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시녀들이 할바마마께 혼날지도 몰라.”
“저하께서 그 정도도 못 막아 주십니까? 폐하께서 저하 한마디면 어지간한 건 모두 들어준다는 거 궁인들이 전부 압니다. 저도 오늘 일이 걸리면 잘 부탁드립니다.”
어쩐지 이 녀석에게서 로이드의 화술이 느껴진다. 친하게 지낸다더니 이런 것을 배워 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로이드의 능글맞으면서도 쾌활한 말투와 다르게 아르의 것은 담백하고 곧았다.
“너는 오늘 일 안 해? 나라 녹 먹으면서.”
“전 오늘 휴가입니다.”
“섀도 나이트도 휴가가 있었어?”
“그럼 없겠습니까? 휴일 없는 직장이라니 끔찍하군요. 그렇다면 벌써 사직서를 썼을 겁니다.”
그건 그렇긴 한데 처음 듣는 이야기라 조금은 놀랐다.
지난 생에서는 그는 늘 내가 필요로 하면 곁에 있었고, 냉궁에 간 이후로는 단 하루도 내 옆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내게는 집인 황궁이 그에게는 직장이었다는 아주 기본적인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번 삶에서는 아르가 언제 일하고 언제 쉬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근무 일정이 어떻게 되는데?”
“섀도 나이트의 근무 일정은 1급 기밀입니다. 다들 자기 근무 일정밖에 몰라요. 섀도 나이트 전체 근무 일정은 황제 폐하랑 단장님만 아시고요.”
“다른 사람 건 안 궁금해. 네 일정.”
“1급 기밀입니다. 궁금하면 황제가 되시면 됩니다.”
궁금하면 황제가 되라니, 앞으로 몇십 년 안에는 안 알려 주겠다는 거다. 그런 장난 같은 말을 저렇게 진지한 얼굴로 해서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내가 멍하게 쳐다보고 있자 그가 아까부터 내밀었던 자신의 손등을 내 앞에서 한번 흔들었다.
“안 가실 겁니까? 잠행이라는 거 꽤 재미있을 겁니다. 황태녀 전하께서는 저하를 데리고 나갈 때는 혹시 위험할까 봐 조금이라도 평민들과 접촉할 만한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시니까요. 아마 열대여섯 즈음이 되기 전까지는 평민들을 직접 만날 일이 없으시겠죠.”
생각해 보니 며칠 전에도 그랬다.
그리고 지난 삶에서도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고모님과 잠행은 꽤 나가 봤으나 평민들과 직접 접촉하는 일은 거의 피했었다. 잠행을 나가서 황족의 습관을 제대로 버리지 못한 채 행동하면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기 좋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내가 어릴 때는 고모님께서 그저 데리고 나가서 구경만 시켜 주셨었다. 그리고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는 고모님이 죽고 볼테르가 황제가 되자 궁 안에 갇혀 버렸다. 그때부터는 거의 2년 동안 죽을 때까지 궁 밖으로 단 한 발짝도 나가 보질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평민들의 생활을 가까이서 볼 기회가 없었던 거다.
아마 지금이 아니라면 앞으로 몇 년 동안 내게 잠행이란 그런 것뿐이겠지.
갑자기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불안했던 마음이 차곡차곡 접혀서는 저쪽 구석으로 밀려났다. 짜릿한 감각이 손끝을 간질였다.
나는 내 눈앞에 놓인 그의 손등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따뜻한 살갗 대신 보드라운 면이 닿았다.
그의 손등에 손을 올린 채 인파를 스쳐 지나갔다. 주위를 둘러보며 걸었다. 누구도 내게 고개 숙이지 않는다. 아무도 날 알아보지 못한다. 궁에서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이 스쳤다.
“아무도 나를 못 알아봐.”
“그래서 서운하십니까?”
“아니, 좋아.”
동시에 내가 한없이 작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니, 세상이 너무나 넓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갈 것만 같았다. 경이롭다.
“조금 기분이 나아지셨습니까?”
“응. 개운해.”
“여기선 아무도 저하께 충성을 바치면서 황족의 의무를 강요하지 않으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문득 장난기가 들었다.
“그대는? 여기서 그대는 내게 충성을 바치지 않느냐?”
“저도 오늘은 휴가니까 기사는 안 할 겁니다.”
“불경하구나.”
늘 반듯하던 그가 받아 주는 장난이 너무 신기해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10분 즈음 걸었을 때 거대한 쇼핑거리가 나왔다. 마차 세 대가 나란히 통과해도 될 정도로 넓게 뚫린 대로 양옆으로 5층짜리 건물들이 빼곡했다.
간간이 귀족 가문의 문양을 단 마차가 서행했다. 귀족들은 대부분 마차를 타고 이동했기 때문에 걷는 사람들은 대개가 평민이었다. 부유한 평민들과 점심을 먹으러 나온 인근 상가의 종업원들인 듯했다.
“그런데 우리 뭐 하러 가?”
“그냥 온 건데요. 하고 싶은 게 있습니까?”
목적도 없이 그냥 나온다고? 나는 아르의 얼굴을 말똥말똥 올려다보았다. 장난인가? 더 신기한 곳을 데려가기 위한 밑 작업인가? 하지만 아무리 쳐다보아도 그런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가 고개를 갸웃하기까지 했다.
“생각나는 게 없으시면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아프다는 핑계로 아침에도 미음만 드셨으니 시장하실 겁니다.”
“그래.”
사실 여기서 뭘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뭐가 뭔지도 잘 모르겠다. 우리는 성큼성큼 걸었다.
음식점으로 보이는 간판이 요란하게 번쩍거렸다. 저들 중 어디를 가게 될까. 기대감을 물씬 안고 따라 걸었지만 좀처럼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몹시도 걷기 귀찮아졌을 즈음, 나는 멈춰서 조개 모양 간판이 번쩍이는 해산물 요리점을 가리켰다.
“그냥 아무 곳이나 가자. 저기 어때?”
“저기 예약 안 하면 못 들어갑니다.”
“그럼 저긴?”
“저기도 예약 안 하면 안 됩니다.”
그럼 대체 되는 데가 어디냐!
“예약 없이도 먹을 수 있는 곳으로 갈 겁니다. 그런 곳이 황궁 요리만 드신 저하 입맛에는 별로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인근 상가 종업원들 사이에서는 나름대로 유명한 점심 메뉴가 있는 곳입니다.”
“평민들이 먹는 음식을 먹는다고?”
“예. 그럼 잠행 나와서 귀족인 척하시게요? 어느 가문의 영애라고 할 겁니까?”
“그건…….”
“그래도 냉궁에서 먹었던 설탕 들어간 스튜보다는 맛있을 겁니다.”
“윽!”
그때 상상만 해도 토가 나왔다. 시녀들이 바뀌고 냉궁에서 지내던 첫 사흘간 내 몫의 식사가 나오지 않았다. 내 궁의 주방 궁인들까지 전부 바뀌면서 새로운 궁인들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대로 잊혔다. 그렇게 첫날은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다음 날부터는 아르가 기사단 식당에서 받은 후식류나 궁 밖에서 사 온 것들로 허기를 달랬다.
그렇게 나흘 뒤, 드디어 내게 식사가 나왔다. 스튜였다. 달았다. 몹시도 인공적인 단맛에 한술 뜨자마자 구역질이 나왔다. 숙부가 꽂아 넣은 그 시녀들이 설탕을 넣었던 거였다.
“그래도 그때 배고프다면서 다 드시지 않았습니까?”
“어? 나 그랬어? 아닌데 내가 그냥 먹을 수 있으니까 제발 조용히 넘어가자고 했더니 네가…….”
“아, 그러고 보니 우리 둘이 기억하는 시간이 조금은 달랐군요. 그때 제가 어떻게 했는데요?”
아르가 조그맣게 키득거렸다.
어찌했긴, 음식에 설탕 넣은 시녀의 멱살을 한 손으로 질질 끌고 와서는 내 앞에 무릎을 꿇렸지. 그러더니 내가 들고 있던 스튜를 빼앗아 그녀의 무릎 앞 바닥에 그릇을 던지듯 내려놓고는 검을 뽑아 목에 들이댔다.
“핥아 먹어라. 남김없이 다 먹으면 살려 주겠다.”
그녀의 목덜미에 조그맣게 실금이 가며 피가 배어 나왔었다. 무겁게 가라앉았던 공기,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나까지 짓눌릴 것만 같았다. 그건 그저 하는 위협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 시녀는 나와 다른 시녀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개처럼 무릎을 꿇고 엎드려 숟가락도 없이 설탕 스튜를 그릇째 핥아서 먹어야 했다.
그 덕분에 잠깐이나마 속은 시원했다. 이후에는 그들이 대놓고 내게 못된 장난을 치는 일 역시 없었다.
“그렇게 웃지만 마시고. 제가 대체 뭘 했던 겁니까?”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었는지 몹시도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걸 말을 해줘, 말아? 하지만 그 당시 그렇게밖에 나를 지켜 줄 수 없었던 그의 방식이 한편으로는 가슴 아려서 이대로 영원히 묻어 버리는 것이 더 나을 것도 같았다.
그래서 그냥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경이…… 그대가 참으로 멋있었네.”
그의 귓가가 확 붉어졌다.
“그, 그럼 전 식당 대기표 받아 오겠습니다.”
그가 도망치듯 뛰어가더니 작은 종이를 하나 손에 들고 돌아왔다.
“두 명이라서 자리는 금방 날 겁니다.”
“응?”
“조금 기다리면 빈자리가 생길 겁니다. 그때까지는 입구 앞에서 기다리면 됩니다.”
나는 식당 입구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설마 저 사람들이 다 빈자리가 생기기를 기다리는 거라고?
세상에! 바깥에 서서 기다렸다가 식당에 들어가야 한다니!
그렇게 몇 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밖에서 입 꾹 다문 채 서서 기다렸다. 다리가 바들바들 떨릴 즈음, 아르가 들고 있는 쪽지의 번호가 호명되었다. 평민들은 설마 매번 이렇게 식사를 하는 것일까?
심지어 안에 들어가서 메뉴를 주문했을 때도 음식이 순서대로 나오지 않았다. 고기가 먼저 나왔고 샐러드는 조금 후에 나왔다. 물은 아르가 물통 앞에 줄을 서서 직접 떠 왔다.
포크는 샐러드 포크와 스테이크 포크를 구별하지 않고 하나로 전부 사용했다. 나이프도 날이 무뎌 고기를 제대로 자르지 못했다.
소고기는 잘못 익힌 건지 몹시 질겨서 내가 고기를 질겅질겅 씹다가 결국에 휴지에 뱉어 버리자, 아르가 자신의 닭다리 요리를 바꿔 주었다. 그건 그나마 씹을 만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새삼 황궁 요리가 그리워졌다.
이 식당이 이 동네 평민들 사이에서 맛있는 집으로 유명하다며!
“여기가 맛있다고?”
“저하의 입맛이 이미 황궁 요리에 길들여 있으니까요. 사람이 제게 편하고 이로운 것일수록 타성에 젖기 쉬운 법입니다.”
“그래도 색다른 것이 재미는 있었다만, 맛은 최악이었다.”
“설마 설탕 스튜만 하겠습니까?”
제발 그 토 나오는 설탕 스튜 얘기 좀 그만!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던 그 순간 아르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저하, 방금 먹은 음식들을 폄하하지 마십시오. 백성들의 삶입니다. 지금 보았던 것마저도 평범한 평민이 아닌 몹시 부유한 평민들의 삶입니다. 저하께서 누리시는 모든 것들이 저들의 혈세에서 나옵니다.”
그가 내 귓가에 읊조리는 말들 속에 뼈가 숨어 있다. 그가 이어 말했다.
“맛은 없었어도 재미는 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황궁과는 다른 맛이 있었다.”
조금 더 편안하고 조금 더 유쾌했던 그런 맛. 그리고…….
“그대와 겸상도 해보았고.”
“황태손과의 오찬이었다니 영광입니다.”
우리가 황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틀었을 때였다.
툭-.
누군가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이 지저분한 평민 계집애는 뭐야? 감히 몰딘 남작님 앞을 가로막느냐!”
몰딘 남작? 얘는 또 누구냐.
“그쪽에서 먼저 부딪힌 것 같은데.”
내가 말하자 남작의 볼살이 파르르 떨렸다.
“수행원도 없이 돌아다니는 걸 보면 귀족은 아닐 테고. 이런 데까지 와서 놀 정도면 돈 꽤 있는 평민인 모양인데. 평민 주제에 귀족님께 대들다니!”
순간 어이가 없어서 남작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데 그가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이 계집애가 어디서 눈을 부라려?”
짜악!
이상하게 소리만 요란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했다. 꾹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자 내 앞을 아르가 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