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황궁에서 그랜 백작가로 조사관이 나왔다. 조사관이 도착한 곳은 자택 근신령을 받은 백작가 장남의 방.
설마설마했지만 정말로 황실에서 조사관이 나올 줄은 몰랐다. 아버지가 어떻게든 막아 줄 줄 알았다. 이렇게 소문이 거대하게 부풀려질 줄 몰랐다. 게다가 며칠이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머릿속은 온통 몽롱했다.
조사관이 하는 말이 멍한 귓속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이번 사건…… 밀레이엄 자작입니다. 잘 부탁……. 또한, 거짓 진술을 하면 그랜 군은 귀족 지위가 박탈될 겁니다. 이해하셨나요?”
그랜 영윤은 소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면 지금 그가 듣는 소리가 필시 구겨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진실을 말하면 최소 황도 밖으로 추방이 되는 선에서 끝난다. 그러면 소문이 잠잠해질 때까지 지방의 백작령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평생 안온하게 살 정도는 해주겠다고, 그의 아버지인 백작이 알려 주었다.
하지만 만약 그리된다면 후계자 자리는 동생에게 빼앗길 거다. 아버지가 알려 주지 않아도 이 정도쯤은 그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20년 넘게 자신이 아버지 다음 대 백작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살아왔던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뽑아 버리는 것이었다.
‘일단은 아니라고 잡아떼 볼까?’
거짓을 말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저들이 어찌 알 수 있을까. 적당히 말해도 될 건 말하고 숨길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숨겨 본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조사관이 그의 앞에 익숙하거나 낯선 이름들이 뒤섞인 종이를 내밀었다.
“여기 적힌 분 중 딱 한 번이라도 함께 드림 퍼퓸을 구매한 적이 있는 분들을 짚어 주시면 된답니다. 만약 이분들이 얼마나 구매했는지 얼마나 자주 모임에 나오는지 기억하신다면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정상참작을 해줄 수도 있답니다. 참 간단하죠?”
“모, 몰라요. 모릅니다.”
“그래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트로이카 백작 영윤도 그랬거든요. 만약 여기서 둘의 진술이 엇갈리면 둘 다 거짓을 고한 것이 되겠지요? 아, 그리고 사실 어젯밤에 이 명단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더 잡혔습니다만……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니 누군지 모르시겠죠? 그가 누굴까요?”
그랜 영윤은 생각했다. 이는 분명 수작을 부리는 거다. 겁을 주어 유도신문을 하려는 자작의 수작일 뿐이다.
“아, 내가 허튼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하나 본데, 증거를 대주겠습니다. 그가 증언하기를 당신이 지난달 구매한 드림 퍼퓸이 세 병이라고 했습니다.”
그랜 영윤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배신감을 느낀 건지 전신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자작의 말처럼 누군가 더 잡힌 적은 없다. 다들 몸을 사린 탓이었다.
‘드림 퍼퓸 세 병’이라는 건 사실 대강 찍어 본 거였다. 클럽을 조사할 때 발견한 비밀 장부에 대부분이 한 번에 세 병씩 판매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트로이카 백작 영윤을 조사할 때는 이 작전이 실패했지만 이쪽은 다행히도 빙고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용의자를 불안하게 만들고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만들어 진실을 불게 할 수 있을지가 중요할 뿐.
“그러니 아무나 지목하고 빠져나갈 생각 하지 마십시오. 제가 말한 또 다른 용의자가 누군지도 맞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까도 말했듯이 그대들의 진술이 계속 엇갈린다면 그대들의 귀족 지위를 보장해 드릴 수 없으니까요.”
곧 자작의 눈앞에 앉은 용의자가 천천히 손가락을 뻗어 종이 위에 적힌 이름들을 한 명 한 명 지목하기 시작했다.
***
그랜 백작 영윤과 트로이카 백작 영윤이 자백한 지 한 달 후, 해가 쨍한 정오. 황궁 앞 광장 한복판에 거대한 단두대가 놓여 있다. 그 단두대를 중심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기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사람들이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늘이야? 수프 자작인가?”
“이 사람아, 수페니아 자작. 이제 자작도 아니라던데.”
“간도 크지. 고위 귀족 나리 자제분들께 이상한 약 같은 거 팔았다면서요?”
파피란 공작가가 언론에 자료를 뿌리고 에오넬이 신문 낭독꾼을 풀어 소문을 키운 효과는 지대했다. 이미 귀족이고 평민이고 할 것 없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잘 알게 되었다. 수페니아 자작이 왜 저 단두대에 오르게 되었는지까지도.
자작을 시작으로 피바람이 불게 될 거다. 많은 이들의 목이 잘리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자작이 벌어들였던 검은돈은 여러 경로로 세탁되어 볼테르를 지지하는 파벌에 속한 일부 귀족들의 정치 자금이 되고 있었다.
‘그걸 차단했다는 것만으로도 꽤 큰 성과를 이룬 거라고 할 수 있어.’
나는 머리에 눌러쓴 넓은 챙모자를 더욱 끌어 내렸다.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으셔도 아무도 모를 겁니다. 오히려 이러는 것이 더 어색해요.”
내 옆에 선 아르가 손을 올려 내가 푹 끌어 내린 모자를 슬쩍 걷었다. 그림자 졌던 시야가 밝아졌다.
오늘 나는 자작의 처형식을 보기 위해서 아르의 도움으로 몰래 빠져나왔다. 거울에서부터 이어진 비밀 통로는 황궁 바깥까지 뻗어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몸이 좋지 않아 약을 먹고 자는 중이다. 유모에게는 일찌감치 휴가를 주었고 시녀들에게는 절대 깨우지 말아 달라고 해놓았으니 아마 잠깐 정도는 괜찮을 거다.
고개를 들었다. 단두대는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높은 곳에 있었다. 까마득한 곳에서 시퍼렇게 선 날 위로 햇빛이 반사된다. 눈부시다.
단두대에 오르는 자작의 무릎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 그런 그의 걸음에서 나는 내 기억 속 ‘그날’을 보았다.
그날 고모님은 저 단두대에 올랐다. 그녀를 따르던 충신들도 함께였다. 그분들이 수많은 백성이 지켜보는 앞에서 치욕스럽게 돌아가셨다.
사람들은 고모님을 황위가 탐나 제 오라비와 아비를 죽인 끔찍한 패륜아라 욕했다. 더러는 돌을 던졌다. 나 역시 그때는 그들이 떠드는 대로 믿고 있었으므로 너무나 담담하게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었다.
사형 집행관이 죄목을 읊었다.
“죄인 윌리엄 수페니아는…….”
-“대역 죄인 에오넬 체르무트는…….”
제국법상 금지 약물류를 유통 및 판매하여 부당 이득을 취하고…….
-선 황태자를 시해하고 선황제의 독살을 모의하여 역모를 꾀하고…….
이러한 불법적인 행위는…….
-이러한 비인륜적인 행위는…….
이에 죄인의 작위를 박탈하고
-이에 죄인의 황위 계승을 취소하고
영지를 몰수하며 참수형에 처한다.
-폐위하여 참수형에 처한다.
어디선가 환청이 들린다. 심장이 옥죄었다.
‘두 눈 똑똑히 뜨고 봐야 해. 그리고 기억해야 한다. 이제 다시는 저 위에 고모님도, 외할아버님과 세르피스 후작가의 사람들도, 크로이젠 공작가의 가솔들도 올리지 않아.’
두 손에 힘이 들어간다. 동시에 집행관의 말이 끝났다. 그가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내려놓자 단두대와 연결된 굵은 밧줄이 잘렸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칼날이 몹시 느릿하게 느껴졌다. 그것이 자작의 목을 가르려던 그 순간, 사람들의 비명이 지척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다 들으라지? 어차피 죽을 계집애. 황족 시녀라고 해서 황금 동아줄인 줄 알았더니 순 썩은 동아줄이잖아?”
“사실 네 아비를 죽인 건 나란다. 멍청한 것.”
심장 소리가 혈관을 타고 귓속에서 울렸다.
그때였다.
쓰윽-.
누군가 부드럽게 내 얼굴을 붙잡아 옆으로 돌렸다. 따뜻한 손이 두 귀를 부드럽게 눌렀다. 그 덕에 자작의 단말마 섞인 비명도, 단두대가 뼈를 가르는 소리와 땅에 박히는 소리도 뿌옇게 변했다.
옆으로 돌아간 시선 가득 아르가 들어왔다. 깊고 검은 눈동자와 마주치고 시선이 얽혔다.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그가 내 귀를 막던 두 손을 떼어 냈다.
“괜찮으십니까?”
그제야 웅성웅성 자리를 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현실이 되어 들려왔다.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분명 승리했는데. 내가, 우리가 이 싸움에서 처음으로 적의 목을 거머쥐었으니 기뻐해야 마땅한데. 여전히 불안했다. 아니, 불안이라는 단어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조금 더 복잡한 무언가가 목구멍에 맺혀 있다.
‘하지만 약해지면 안 돼.’
이번에는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저 기사를 위해서라도 약한 모습을 보일 수가 없다. 그래선 안 된다.
나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서서 챙모자를 깊이 끌어 내렸다. 크게 숨을 쉬자 조금 진정되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있으니 말이 아까보다는 술술 나왔다.
“그들이 꼬리를 자르려고 해.”
“예.”
“우리는 저 꼬리를 어디까지 자를 수 있을까? 적어도 백작급 이상 딱 셋만 더 저 단두대 위로 올려 보내면 그 정도로도 대승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하…….”
“조금은 짜릿할 줄 알았어.”
그런데 왜지? 하나도 기쁘지 않다. 그저 끔찍했던 그때의 기억이 더욱 선명해질 뿐이다. 분노가 심장을 좀먹는 기분이다.
차라리 얼른 돌아가서 단것을 좀 먹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자.”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아르가 내 앞을 막아서며 모자 끝자락을 살며시 걷었다.
“비켜라. 무엄하다.”
“정말 저것만 보러 나오신 거였습니까?”
“볼 것을 다 보았다.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되었으니 오늘 목표한 바는 이루었어. 시녀들이 알기 전에 돌아가야 해.”
“나온 김에 갈 곳이 더 있습니다.”
갈 곳? 내가 돌아보자 아르가 제 손을 내밀었다. 안내할 테니 그 위에 내 손을 얹으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감히 손바닥을 겹칠 수 없으니 하얀 장갑을 낀 손등이었다. 나는 그 손등을 빤히 보다가 물었다.
“어디?”
“기분이 풀릴 만한 곳, 이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이 시국에? 볼테르도 황후 몰래 밖으로 쏘다니다가 지금 이 사달이 난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와중에 나도 몰래 나와서 놀러 다니라고?
게다가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지금 이 말을 다른 사람이 아니고 아르가 했다는 거다. 당황한 나머지 핑계부터 내뱉었다.
“시녀들 몰래 호위 없이 나온 걸 알면 할바마마가 걱정하실 거다.”
“호위요?”
아르가 반대쪽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켰다.
“웬만한 호위보단 믿을 만할 텐데요. 아니었습니까?”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