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황후가 네게 저 어린 기사를 붙여 무얼 하려 할지 모르지만, 어차피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닐 거란다. 걱정하지 말렴.”
그러면서 신문을 한 장 더 넘겼다. 고모님이 들고 계신 신문에서 내가 볼 수 있는 부분은 다 읽었을 즈음이었다. 분수대 쪽으로 눈길을 돌리자 페일이 낭독꾼에게 은화를 내밀고 있었다. 낭독꾼이 은화를 챙기는 것을 확인한 페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근처로 돌아왔다.
잠시 후, 낭독꾼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난 ×월……. 이들은 평소 황자 전하와의 친분을 과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세간에 충격을……. 해당 건물 지하창고에서는 다량의 드림 퍼퓸과 미약이 발견되었다. 일각에서는 이 정도 양은 개인이 암시장에 유통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며, 배후 세력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건물의 소유주는 수페니아 자작이며…….”
신문을 내려놓은 고모님은 낭독꾼을 힐끔 돌아보더니 의외라는 듯 입술을 모았다.
“호오, 그 건물이 수페니아 자작의 것인 줄은 몰랐군. 수페니아 자작에게 전부 뒤집어씌우려나?”
나는 고모님의 말씀을 듣고는 왜 우리가 여기까지 나와 한가롭게 음료나 마시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날 데리고 놀러 나온다는 핑계가 아니라 정말로 잠행이었다.
대부분 시녀들은 문제의 그 클럽의 주인이 누군지 건물주는 누구인지까지 상세히 알려 주지 않는다. 중요한 정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 백작가의 영윤이 이러저러한 경위로 체포되었다더라’까지만 전한다.
하지만 신문 기사는 달랐다.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것까지 아주 집요하게 파고든 흔적이 있었다.
잠시 후 다른 낭독꾼이 반대편에 자리를 잡고 앉자 고모님은 또 은화 한 닢을 꺼내 페일에게 쥐여 주었다.
“저자에게는 이 부분을 읽으라고 하렴.”
페일이 사라지고 내가 물었다.
“고모, 고모는 신문도 사서 읽었는데 왜 굳이 돈을 주면서 이 부분을 읽어 달라고 하는 건가요?”
“음…… 궁으로 돌아갈 때 즈음 되면 알게 될 거란다.”
그리고 고모님의 말대로 우리가 황궁으로 돌아갈 때 즈음, 사람들은 남녀노소,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가면 클럽과 두 백작 영윤, 귀족들의 마약 파티, 황자와의 관계에 대해 수군대고 있었다.
***
내 방에 딸린 드레스룸, 불 꺼진 방을 손으로 더듬어 가장 안쪽 전신거울 앞까지 갔다. 손가락 감각에 의존해 숨겨진 문을 찾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며칠째 실망의 연속이라 이젠 있을 거라고 기대도 안 하고 있지만 습관이 된 걸까? 아니면 그저 알 수 없는 불안 때문이었을까.
문을 아주 살짝 열었을 때였다.
“저하.”
나는 슬며시 열던 거울을 벌컥 젖혔다. 거의 일주일이 넘어서 보는 얼굴에 나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나는 문 앞에 선 아르를 통로 안쪽으로 꾹 밀었다. 그는 내가 밀면 밀리는 대로 순순히 뒷걸음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통로 안쪽으로 발을 딛자마자 거울을 급하게 닫았다.
“뭐 하다가 이제 오는 거야!”
하고 싶었던 말보다 채근하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내가 화를 내도 그는 교과서적으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하실 말씀이 있었습니까? 급한 일이셨는지요?”
사실 급한 일은 아니었다. 3~4일 간격으로 찾아오던 사람이 갑자기 일주일 넘게 나타나지 않아 불안했을 뿐.
하지만 그에게 불안했다는 약한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이번 생에서만큼은 군주의 면모만 보여 주고 싶었다. 그것이 그의 원동력이 될 테니까. 그것만이 그의 충정에 내가 보답할 수 있는 길이었다.
그가 내게 바라는 모습은 장차 황제가 될 제국의 황태손이지 연약한 레이디가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대답할 말을 찾아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엔 또다시 화를 내고 말았다.
“내가 궁에서 다른 연줄 만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무슨 말씀이신지?”
발뺌하는 목소리가 언제나처럼 평온하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하는 기색도 없었으며 당황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로이드랑 무슨 관계야?”
“그냥 아는 사입니다.”
“그냥 아는 사이인데 로이드한테 내 얘기를 해?”
그가 곤란한 듯 숨을 내쉬었다.
“그쪽에서 먼저 묻던가요?”
“그럼 그쪽에서 말하니까 알았지. 내가 먼저 말했겠니?”
“그가 저하께 직접 여쭐 줄은 몰랐습니다. 곤란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나는 곧바로 대답하려다 멈칫했다. 어쩐지 은근슬쩍 대화의 주도권을 뺏기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꾸 내 말 돌리지 말고 너는 로이드랑 무슨 사인데?”
“그건 개인적인 친분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 주시면…….”
“싫어! 내가 너 처음 불러냈을 때 개인적으로 친분 만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기분이 이상하다. 이 알 수 없는 감정은 대체 뭘까. 그가 내게 알린 것 이외에도 또 다른 비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듣자 몹시 자존심이 상했다.
“그 전부터 알던 사이입니다.”
“다음 생에서는 나한테 비밀 같은 거 안 만들겠다며!”
“제 기억에는 없는 약속입니다. 더구나 제 개인적 친분은 사생활입니다. 저하께서 신경 쓰실 영역이 아니십니다.”
그가 드물게 으르렁거렸다. 내가 놀라 주춤 뒤로 물러나자 그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죄송합니다. 소신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제 사생활이 저하께 누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걸 걱정한 게 아니야. 그냥…….”
나보다 먼저 너를 알고 지낸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나보다도 너를 더 잘 아는 누군가가 있는 것이 싫다. 이번 생에서는 그럴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네가 내게 아직도 비밀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화가 난다. 그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아니다. 내가 너를 억지로 찾아냈듯이 너도 이번 생에서 그와 연을 만든 이유가 있겠지. 내가 경솔했다. 경에게 사과하겠다.”
그렇게 말하는 입안이 너무나 썼다. 비틀어진 독점욕이라는 걸 알고 있다. 몸이 어려지니 생각마저 어려지는 걸까. 그의 얼굴을 지금은 마주 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아까 그의 질문에 뒤늦은 대답을 해주었다.
“그나저나 로이드가 너에 대해서 뭘 얼마나 아는 줄 알고 내가 대답을 해? 모른다고 잡아뗐지.”
“정적들에게 휘둘리기 딱 좋은 행동 패턴이시군요.”
뜨끔!
도대체 왜 이런지 모르겠지만 그의 한숨 섞인 말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 그건…….”
“저였다면 ‘그대가 말하는 아르가 대체 누구냐?’라고 물었을 겁니다. ‘아르가 누구인지 모른다’라는 건지, 아니면 ‘너는 어디까지 아는지 네 정보를 먼저 까보라’라는 것인지 애매한 어조로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내가 로이드에게 보였던 반응은 아르가 말해 준 것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 초라했다. 정말 형편없었다.
처음에는 부끄러웠으나 나중에는 점점 화가 치밀었다. 그렇다고 ‘정적에게 휘둘리기 딱 좋다’라니 신하가 주군에게 할 소린 아니지 않나?
그렇게 뾰로통해 있는데 그가 내 시선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하, 저하께는 로이드가 필요합니다. 저하께서는 정쟁과 어울리지 않아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붙임성 좋으면서 능구렁이 같은 로이드와 크로이젠 공작가라는 배경은 저하의 정치 파트너로 손색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를 경계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걸려 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씁쓸해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치 철이 덜 든 동생을 쳐다보는 것 같은 얼굴이다.
이 역시 신하가 주군에게 지어 보일 표정은 아니지 않은가?
***
에오넬은 머릿속에 큰 그림을 그리며 지금까지 해온 일과 앞으로 할 일들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글로 적으면 좀 더 편하겠지만 언제 누가 우연히 볼지 모르니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크로이젠 공작가에서 이렇게 끼어들 줄은 몰랐어.’
자칫 제 아들의 명예마저 위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황실과의 동맹을 믿는다는 걸까? 그녀가 로이드를 수면 위로 끌고 올라오지 않을 거라는 믿음. 아직 로이드와 멜리가 제대로 약혼식도 치르지 않았는데도 그런 것치고는 대범한 도박이었다.
사실은 로이드가 개인적으로 끼어든 일을 공작이 뒷수습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에오넬은 모르는 일이었다. 공작 입장에서도 이미 아들놈이 멋대로 벌여 버린 일, 그는 구태여 덮어 버리는 대신 로이드와 아멜리아를 이용해 에오넬에게 밀서를 보냈다. 그 후 대놓고 그녀에게 붙는 쪽을 택했다.
‘세르피스 후작도 멜리를 통해서 나한테 직접 접근할 줄은 몰랐고.’
아멜리아 덕분에 마냥 어색하기만 했던 세르피스 후작과의 관계가 요즘 꽤 부드러워졌다. 서로가 공동의 적을 앞에 둔 아군임은 알고 있었지만 데면데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에오넬은 후작이 먼저 자신에게 접근해 온 것이 내심 고맙기도 했다.
아멜리아가 일부러 둘을 만나게 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에오넬도 세르피스 후작처럼 서로가 자신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며 착각은 깊어 가고 있었다.
‘세르피스 후작이 준 정보가 꽤 큰 도움이 되었어.’
아들 부자인 세르피스 후작은 미혼 영윤들이 정기적으로 가지는 크고 작은 모임들을 줄줄 꿰고 있었다. 심지어 어떻게 알아낸 건지 음지에서 일어나는 모임까지도 말이다. 그 정보 중에는 문제의 그, 황후파 가문의 영윤들이 마약을 즐기는 모임까지 있었다. 아마 후작이 알아낸 게 아니라 손자들을 통해서 알아냈을 거다.
멜리의 사촌, 육촌 오빠들. 멜리를 몹시 아끼는 그들을 떠올리자 에오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세르피스 후작의 핏줄 중 여자아이라곤 아멜리아, 딱 하나뿐이니 그들은 훗날 멜리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거다.
어쨌든, 에오넬이 세르피스 후작이 가져온 정보로 그랜 백작가의 장남을 타깃으로 삼고 작업에 착수할 즈음에 크로이젠 공작이 어떻게 알았는지 기다렸다는 듯 제 아들을 이용해 그랜 백작과 트로이카 백작가를 궁지에 몰았다.
그리고 파피란 공작가는 그동안 쌓아 왔던 언론계의 인맥을 동원해 준비했던 신문 기사를 풀었다.
덕분에 계획을 생각보다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에오넬은 설렁줄을 당겼다. 곧 시녀가 들어와 다소곳하게 그녀 앞에 섰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다음 계획 진행하고. 신문 낭독꾼들이 요즘 많아졌다지?”
“예. 아무래도 저하께서 시중에 풀어 버린 은화는 신문 낭독 수고비로는 너무 큰돈인지라 글을 조금만 알아도 평민들이 나와서 읽고 있답니다. 소문은 충분히 낸 듯한데 어째서 계속…….”
에오넬이 급하게 손바닥을 들어 올리자 시녀가 입을 다물었다. 에오넬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 낭독꾼들이 자리를 가지고 싸우지 않던?”
“예. 그것 때문에 치안에도 문제가 생기고 있답니다.”
에오넬은 눈꼬리를 살포시 접었다. 시녀는 제 주군의 의중을 쉽사리 파악할 수가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전하?”
“그렇담 슬럼가에 가서도 신문을 읽게 해.”
에오넬이 은화 주머니를 건넸다.
“이미 충분히 소문은 났는걸요?
이미 평민 중산층은 물론이고 서민층 사이에서까지 황자도 이 일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파다했다. 에오넬이 의도한 바였고 사실 그들이 떠드는 내용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을 뿐 진실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합리적 의심이라고 부르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진실만으로는 황후를 동요하게 할 수 없다. 황후도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을 테니까.
‘너희가 수페니아 자작에게 뒤집어씌우게 하고 끝낼 것 같으냐? 내가 원하는 건 황후의 목이야.’
“슬럼가에서는 앞으로 어떤 소문이 돌지 벌써 기대되는구나.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