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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32화 (32/148)

32화

“음…… 혹시 제가 엎드려 절 받은 거 아니죠? 후후.”

로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편지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를 봉인한 실링 왁스 위에는 공작가의 인장이 아닌 낯선 인장이 편지 봉투와 반쯤 겹쳐 찍혀 있었다. 이는 보내는 이가 누군지 알 수 없도록 하는 동시에 중간에 전달자가 몰래 뜯어 볼 수도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밀서.’

“황태녀 전하께 전해 주시겠어요? 제가 저하를 뵐 명분은 충분하지만 황태녀 전하를 뵐 명분이 없는 터라.”

나는 그가 내민 봉투를 조심스레 받았다. 이 편지는 로이드의 편지일까? 크로이젠 공작의 편지일까. 그러나 공작의 편지라면 지금처럼 나를 거칠 것도 없었을 거다. 그저 내 예법 교육 상담을 명목으로 고모님을 만나 공작 부인이 바로 전달해도 되었을 터.

“누가 보낸 건데요?”

“그건 황태녀 전하께서 편지를 읽어 보시면 아시겠죠.”

그러니까 발신인이 누구인지는 고모님만 알면 되니까 나는 궁금해하지 마라, 이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다. 고모님께 전달할 때 슬쩍 여쭤봐야지.

내가 편지를 잘 챙기는 걸 확인한 로이드가 싱긋 웃으며 홍차를 한 모금 삼켰다. 나도 그를 따라서 주스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질 것 같았다. 내가 주스를 삼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로이드가 입을 열었다.

“주스 다 마셨나요?”

내가 입안에 조금 남은 주스를 무시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음료를 삼키려던 참이었다.

“저하는 아르랑 무슨 사이세요?”

푸우웁!

나는 그만 로이드 앞에서 주스를 뿜고 말았다.

***

한 번에 두 가지 일이 동시에 터지니 키옌은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3년이나 지난 일이 지금 와서 터진 것도 짜증이 나 죽겠는데 볼테르까지 사고를 거하게 쳐서 양쪽 다 수습하는 데 여간 애먹는 게 아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황후는 시녀들에게 오늘의 일정과 함께 이번 분기의 황실 자선 사업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귀에 담지 않고 대강 흘려버렸다. 어차피 하루 일정은 거의 비슷했고 자선 사업도 해마다 황후로서 해온 일이라 특별할 것도 없다. 가서 얼굴이나 비춰 주면 되는 일이니까.

정작 그녀가 지금 당장 듣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시녀장을 제외한 모두를 바깥으로 물렸다.

“볼테르는?”

“여전히 잠을 설치신다고 합니다. 살이 급격하게 빠지고 있다는데 아무래도 의원에게 보이는 것이…….”

“안 돼! 드림 퍼퓸 중독이라는 걸 궁의에게 들키는 날엔…….”

“하오나……! 알겠습니다.”

시녀장은 말을 더 하려다 키옌의 독기 어린 눈빛을 보곤 알겠다고 답했다.

그녀의 생각엔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가 아무리 에오넬 황태녀에게 힘을 실어 주고 싶어 한다고 해도 설마 제 아들을 버리는 짓까지는 할 것 같지 않았다. 그녀가 황후와 황제 사이의 비밀을 모르는 이였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키옌은 그녀가 황제를 사냥 행사 때에 죽이려 시도했었던 이후로 황제가 자신을 폐위시킬 타이밍을 재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이럴 때 볼테르에 관해 황제가 증거를 물게 되면 절대 놓아주지 않을 터다.

“그랜 백작과 트로이카 백작의 두 아들이 입을 열지 못하게 해야지. 엮여 있는 우리 측 귀족 가문이 한둘이 아닌데 다 같이 죽을 순 없잖아?”

키옌은 볼테르도 사건에 얽혀 있다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시녀장도 그걸 지적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어차피 당사자들이 주절대지 않는 이상 아무도 모를 테니까.

만일 그놈들 입에서 볼테르의 이름이 나오기라도 한다면 그 순간 적어도 냉궁행, 까딱 잘못하다간 폐비다. 그러니 적당히 다른 귀족들 핑계를 대면서 입을 막아 버리는 것이 낫다.

“트로이카의 차남은 어차피 후계자도 아니었고, 그랜 백작가는 장남보다 차남이 머리가 좋다지? 이참에 사고 친 장남은 지방으로 보내 버리고 차남에게 승계하면 가문에도 이득이 되겠네.”

“두 분 백작들께 그리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더불어 두 영윤들이 벗에 대한 의리를 지켜 준다면 내가 감동할지도 모르겠어.”

황후가 길게 이야기했지만 결국 요지는 ‘살고 싶거든 아들은 포기해라’였다.

“그럼 이 건은 일단 되었고. 그날 북문에 있던 기사는?”

“그 근위 기사는 행방불명되었다고 합니다.”

“후후, 그래야지.”

그럼, 그 큰돈을 주고 암살자를 넷이나 썼는데 깔끔하게 처리가 되어야지. 이제는 그의 목매단 시신이 우연히 발견되는 일만 남았다. 황제가 지나치게 압박 수사를 한 탓이라며 몰아간다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잠시 묻어 둘 수 있다.

‘그럼 급한 불은 일단 껐지만 이게 끝이 아니야. 황제가 황궁 출입 기록을 뒤지고 있는 걸 보면 볼테르의 출생을 밝히려고 하는 것 같은데, 황제는 어떻게 처리한담?’

황제를 죽이는 것은 안타깝게도 실패했다. 그때 사냥터에서 죽였다면 진실도 영원히 묻어 버리고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에오넬을 몰아내기도 쉬웠으리라.

‘아깝군.’

황제를 다시 죽일 기회는 있으나 그렇게 된다면 다음 황제는 에오넬이 되어 버린다. 그건 절대로 안 된다. 그러므로 아직은 황제가 더 살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방법은 딱 하나다.

‘에오넬에게 반역만 뒤집어씌울 수 있다면…….’

***

로이드가 부탁한 밀서를 전하기 위해서 고모님께 놀러 가고 싶다고 기별을 넣었다. 그러자 곧장 이튿날 아침부터 고모님이 나를 불렀다.

어쩐 일인지 수수한 나들이옷을 입고 나오라는 말씀도 하셨다. 나는 프릴 한 겹짜리 연녹색 원피스를 꿰어 입고 작은 크로스 백을 메고 나왔다.

고모님도 단출하지만 깔끔한 차림이었다. 이런 차림으로 대체 무얼 한단 말이지? 마차에서 고모님과 마주 앉아 무작정 어디론가 향하는 것이 지칠 즈음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고모, 우리 뭐 해요?”

“지난번에 궁 밖이 궁금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나는 내가 고모님께 무슨 말을 했었던 건지 곰곰이 기억을 되짚었다.

볼테르가 밤놀이를 감행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를 확인사살 하기 위해서 넌지시 던졌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삼촌, 궁 밖에 재밌어요?”

거기에 쐐기를 박듯 고모님이 무심하게 말씀하셨다.

“나가고 싶거든 이 고모에게 말하렴. 괜히 삼촌을 곤란하게 하지 말고.”

“네.”

그렇게 대답하고 바깥이 웅성거려 보니 정말로 마차가 황궁의 정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유모도 시녀들도 모두 떼어 놓고 왔는데 마차 옆에는 고모님과 내 호위기사 둘뿐이다.

“우리만 나가나요?”

“잠행이란 원래 그런 거란다. 주렁주렁 데리고 다닐 필요 없지.”

잠행! 사실 거창할 것 없는 일이지만 몹시도 설레는 단어였다. 심장이 쫄깃해졌다.

그렇게 우리가 향한 곳은…… 노상 카페. 나는 귤청을 넣은 소다를 마셨고 고모님은 커피를 마셨다.

황도 중산층의 거주구역과 인접한 광장이었다. 수수하면서도 말끔한 차림의 평민들이 활발히 움직였다. 아침 햇살이 비추는 분수대의 풍경과 사람들 떠드는 소리는 생동감이 넘쳤다.

“와아!”

지난 삶에서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황궁의 화려한 샹들리에보다 어쩐지 저 분수대의 맑은 물방울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내 또래의 남자애 하나가 옆구리에 가득 회색 종이를 끼고 우리 곁을 지났다.

“신문이요! 신문! 특보예요!”

고모님이 그 아이를 불러 세우더니 금화 한 닢을 건넸다.

“하나 다오.”

“아…… 저 거슬러 드릴 잔돈이…….”

“그냥 가지렴.”

그의 눈이 동그랗게 뜨이더니 연신 감사하다고 외치며 멀리 사라졌다. 고모님이 신문을 펼쳤다. 신문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황궁에서는 중요한 정보를 언제나 아침에 시녀들이 정리해서 보고해 주었다.

그런데 대체 고모님은 왜 저걸 여기서 굳이 읽고 있는 것일까?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고모님은 슬쩍 신문을 내려 나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왜?”

“굳이 그걸 읽을 필요가 있나요? 아침에 시녀들이…….”

“아아, 그렇게 듣는 내용과 여기서 보는 내용은 또 다를 수도 있단다. 시각의 차이랄까? 아직은 네게 너무 어려운 내용이니 나중에 제왕학을 배울 때나 알려 줄게.”

고모님이 내 맞은편에서 신문을 세워 놓고 있는 덕에 나는 앉은 자리에서 신문의 1면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자극적인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부패 귀족의 사치와 향락, 그 끝은 어디인가!」

「그랜 백작가 후계자의 몰락!」

「로크스 거리 가면 클럽이란 어떤 곳인가?」

제목만 보고도 무엇을 다룬 이야기인지 알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저렇게 기사를 쓰다가 성깔 더러운 귀족을 잘못 건드리면 기자가 암살당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잠시, 곧 광장 분수대 앞에 앉아 신문을 읽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앞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내용을 듣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저 사람들은 뭐 하는 거예요?”

내가 그들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며 묻자 고모님이 힐끗 그곳을 곁눈질했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신문을 읽어 주는 거란다. 평민 중에서는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좀 있거든. 뭐, 이 동네는 글을 몰라서라기보다는 신문값보다 신문 읽어 주는 사람이 더 싸기 때문에 애용하는 거지만. 여기 말고 슬럼가에 가면 대부분이 글을 모른단다.”

그때 고모님이 주머니에서 은화 한 닢을 꺼내 내 호위기사인 페일에게 건네며 말했다.

“신문 낭독값을 주고 이 기사를 큰 소리로 읽어 달라고 하고 오너라.”

페일이 은화를 들고 멀어졌다. 그가 적당히 멀어진 것을 확인한 나는 고모님에게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고모, 제가 다른 호위를 데려올 걸 그랬어요.”

“왜?”

“아무래도 페일이 황후 마마의…….”

나는 뭐라고 말해야 아홉 살다울까 잠시 고민했다.

황후의 끄나풀인 것 같다고 액면 그대로 말해야 하나? 그의 가문이 황후의 세력에 들고 싶어 한다는데 그를 믿을 수가 없다고. 그가 내 호위기사 선발전에서 우승했을 때, 황후가 지었던 묘한 미소가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고.

하지만 고민이 무색하게도 고모님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알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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