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31화 (31/148)

31화

나는 크로이젠 공작 부인께 배운(사실은 전부터 알고 있던) 식사 예절을 하나하나 할바마마께 자랑하듯 설명하면서 훈제연어를 씹어 먹었다.

“저기 제일 조그만 나이프는 버터나이프고요. 이 포크는 샐러드 포크인데요, 이 포크로는 고기나 생선을 먹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오오오! 우리 멜리가 할애비보다 똑똑하구나.”

그러다 마지막으로 푸딩이 후식으로 나왔을 때 나는 본론을 슬슬 꺼냈다.

“아, 할바마마! 삼촌 혹시 혼났어요?”

“응? 볼테르가 왜 혼나느냐?”

“고모가 삼촌이 황궁 밖으로 들락날락한다고 황후 마마한테 일렀잖아요.”

나는 최대한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 열심히 텔레파시를 보냈다.

‘고모님이 황후한테 일부러 알려 준 거예요, 할바마마!’

그리고 곧 할바마마한테서 시큰둥한 대답이 들려왔다.

“아아, 알고 있단다. 볼테르 일은 황후가 알아서 했겠지. 신경 쓰지 말려무나.”

이것은 분명 할바마마가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다는 신호렷다!

나는 가슴속에서 차오르는 뿌듯함에 감격의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갑자기 묘한 위화감이 엄습했다. 너무 남의 일을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야 볼테르 숙부도 키옌 황후도 원수이고, 고모님의 입장에서도 배다른 남매라는 건 자신의 황위에 많은 위협이 되는 정적이니까 적대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 왔다.

그래서 할바마마가 볼테르 숙부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때로는 모질게 대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하니 이상하잖아. 볼테르 숙부가 아무리 그래도 할바마마한테는 아들 아냐? 그것도 남들은 오냐오냐 응석받이로 키운다는 늦둥이 막내.

후계자를 선정하는 데에 할바마마가 냉정하다는 건 분명 황제로서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자식에 대한 애정의 차별로 이어진다는 건 조금 이상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식 일인데 “황후가 알아서 했겠지.”라니, 이건 아버지로서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

나는 찝찝한 기분으로 푸딩을 전부 먹어 치운 후에야 내 라벤더궁으로 돌아왔다.

***

키옌 황후가 볼테르의 벚꽃궁을 한바탕 휘저어 놓고 돌아간 지 벌써 나흘째.

볼테르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한 방울씩 아끼고 아껴서 쓰던 수면제를 황후가 모조리 빼앗아 갔기 때문이었다. 며칠 잠들지 못한 눈이 붉게 충혈되었고 눈 밑은 시커멓게 그늘이 져서 미세하게 파르르 떨린다.

그렇게 난리를 치고 간 황후는 이틀이 지나도록 볼테르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것이 더 무서웠다. 차라리 빨리 혼나고 싶었다.

기절할 듯 까무룩 잠이 들어도 채 30분도 잠들지 못한 채 금방 깨어나기 일쑤였다. 꿈속에서는 키옌 황후가 찾아왔다. 꿈속에서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아드님이 무슨 짓을 저지른 줄 아십니까? 황자가 벌인 짓이 바깥에 알려진다면 이 어미는 그만 콱 죽고 말 겁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황자. 이 어미가 아무도 모르게 처리할 테니.”

그리 말한 황후의 뒤로 갑자기 사교 클럽에서 만난 영윤들이 나타났다. 황후가 무심하게 손짓하자 어디선가 나타난 낯선 사람이 그들을 모조리 죽였다. 볼테르는 그들의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허우적거리다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아악! 으아아아아!”

“황자 전하!”

시종이 달려 들어와 볼테르에게 물잔을 내밀며 물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 잠을 자지 못해서인지 그 무서운 꿈을 꾸고도 정신이 들기는커녕 몹시 몽롱하다.

“내가 몇 시간을 잤느냐?”

“세 시간 정도 뒤척이셨고 잠드신 건 15분 정도 같습니다.”

그때 다른 시종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큰일 났습니다!”

시종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볼테르는 여전히 머리가 멍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시종의 말을 듣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랜 백작의 장남과 트로이카 백작의 차남이 드림 퍼퓸을 밀거래를 한 정황이 포착되어 황실에서 조사 중이라고 합니다.”

“뭐? 어쩌다 걸렸다더냐?”

시종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했다. ‘어찌 된 일이냐’가 아니라 ‘어쩌다 걸렸냐’라니, 마치 이미 알고 있던 일처럼 들렸다. 하지만 시종은 그걸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로크스 거리에 있는 가면 클럽 앞에서 크로이젠 공작가의 차남과 길을 걷다 부딪쳐 시비가 붙었는데, 그때 그분들 몸에서 드림 퍼퓸이 바닥으로 떨어져서 현장 체포 됐다고 합니다.”

***

잔느는 아침에 내가 일어나자마자 간밤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나는 식사를 하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그랜 백작가와 트로이카 백작가가 발칵 뒤집혔다고 합니다.”

그들이 자식을 버리고 가문을 택할까? 이번 사건을 묻으려 할까?

그들은 황후의 세력에 속한 귀족이다. 꽤 영향력이 큰 가문이지만 볼테르가 이 사건에 연루된 이상 꼬리를 밟히지 않기 위해서 황후는 그들에게 자식을 버릴 것을 종용할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가문이 망하겠지.

“두 백작가의 동태는 파악했느냐?”

“아무래도 발뺌을 하려는 모양입니다.”

자식을 버리는 쪽인가? 마음 같아서는 그들이 가문째 풍비박산 나면 더 좋겠지만 어쩔 수 없지. 예상했던 바다.

“그래? 어느 쪽이든 우리가 손해를 볼 건 없지.”

오늘의 대전 회의가 볼만하겠군. 장담컨대 오늘처럼 굵직한 사건이 터진 날의 대전 회의는 평민들이 즐겨 본다는 어느 길거리 광대 쇼보다도 재미날 것이 틀림없다.

이런 날에는 세 살 때가 그리웠다. 그때는 할바마마가 이따금 대전 회의에 나를 안고 들어가곤 했었다. 그러나 내가 어느 정도 머리가 크자 그것은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그 사태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린 사람은? 고모님과 파피란 공작가? 아니면 세르피스 후작가?”

“아뇨, 크로이젠의 로이드 공자님이십니다.”

나는 아침 식사를 하던 손을 멈추었다.

크로이젠 공작가가 그 사건을 어떻게 알고 어째서 끼어든 거지? 게다가 내가 아직 로이드와 정식으로 약혼을 한 것도 아닌지라 그들에게는 이 사건을 들쑤셔서 득이 될 것이 그리 많지도 않을 거다.

잠시 생각을 더듬던 나는 곧 며칠 전 아르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로이드에게 제가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그가 저 대신 클럽에 잠입했고요.”

할바마마는 이미 섀도 나이트를 움직이고 계셨어. 아르가 할바마마의 명령을 받고 조사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크로이젠 공작가가 움직인 게 아니라 아르의 부탁을 받고 로이드가 개인적으로 움직였다는 가설에 더 무게가 실린다.

“로이드 공자님을 뵙고 싶은데.”

“그러잖아도 저하께 알현 요청이 있었습니다. 내일 방문해도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밖에 편지를 전한 공작가의 하인이 답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뭐라고 전할까요?”

“당장 입궁하라고 해. 명분은…….”

아마 이번 일로 인해 로이드에게도 이목이 쏠릴 터다. 사고가 터진 두 백작가만큼이야 쏠리겠느냐마는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잔느가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오늘 예법 수업은 평소와 다르게 무도회 왈츠를 배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로이드 공자가 공작 부인과 함께 마차를 타고 입궁하면 보는 눈이 많지 않을 겁니다.”

“좋아.”

어차피 리엘라와 함께 1 대 2 예법 수업을 받는 이상, 춤 상대를 연습해 줄 사람이 한 명 더 필요하긴 했다. 좋은 명분이었다.

***

우리는 황궁 교향악단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하는 왈츠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공작 부인은 리엘라 양의 파트너가 되었고 내 파트너는 로이드였다.

왈츠를 처음 배우는 연습인 만큼 연주는 무도회에서 실제로 연주되는 속도보다 다소 느린 편이었다.

왈츠치고는 느긋한 박자에 맞추어 로이드가 능숙하게 나를 리드했다. 나는 왈츠를 처음 배우는 것처럼 연기하기 위해서 내 발 움직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였다.

“저하께서는 춤을 처음 배우는 게 맞나요?”

머리 위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그가 싱긋 미소 지었다. 그는 춤을 출 때 고개를 들어 상대방과 눈을 마주쳐야 한다는 말을 하는 대신 이렇게 내게 말을 걸어 자연스레 눈을 마주치게 했다.

“네, 처음이에요.”

“처음치고 잘 추시네요.”

뜨끔!

“어라? 칭찬인데,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돼요.”

로이드의 은은한 미소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자꾸만 아르가 생각났다. 둘이 무슨 사이냐고 어떻게 알고 있는 사이냐고 목구멍까지 질문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벌써 닷새 넘게 아르를 보지 못해 내 궁금증은 더욱 커져 갔다.

하지만 물어볼 수 없다. 아르와 나의 관계는 평생, 죽을 때까지 비밀이니까. 그리고 아르와 나는 사냥 행사에서 있었던 와이번 습격 사건 때 우연히 마주친 일 말고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이여야 하니까.

내가 다른 생각을 하다 박자를 놓치자 로이드가 자연스럽게 박자를 세주었다.

“하나, 둘, 셋, 둘, 둘, 셋…….”

슬슬 다리가 아프기 시작할 무렵, 수업이 끝이 났다. 드레스를 갖춰 입고 뱅글뱅글 돌았더니 머리까지 어지러웠다.

공작 부인과 리엘라는 먼저 공작저로 돌아갔고 로이드는 남았다. 공작 부인은 들어오는 것은 함께 들어왔으니 나가는 것 정도는 따로 나가도 괜찮을 거라고 했다. 어차피 몇 년 후에는 우리의 약혼 이야기가 오갈 거라고 모든 귀족이 알고 있는 사이기도 했고.

그래서 우리는 내 침실 옆에 딸린 응접실에 단둘이 남았다. 나는 과일주스를, 로이드는 홍차를 마셨다.

“공자님이 저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뭔가요?”

“우리 주기적으로 만났으면 좋겠어요.”

어, 그러니까 이건 데이트 신청? 고백? 아니, 그보다 난 아직 만으로 아홉 살인데? 우리 나이 차이가 얼마였죠, 아조씨? 우리 나이 차이가 일곱인 건 아시는지……. 댁은 열여덟입니다만?

“어…… 공자님, 그게 그러니까…… 네?”

“음, 저하께서 이해하시기 조금 어려울 수도 있는 정치적인 목적이라. 정확히는 저와 저하가 만나는 게 아니라 황태손과 크로이젠 공자가 만나는 것 정도로 해야겠죠?”

그러니까 남들에게 크로이젠 공작가와 나의 친분을 과시해라 이거였다.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이므로 이렇게 대답했다.

“로이드 님이 크로이젠 공자잖아요. 뭐가 다른 거예요?”

그는 내 순진한 반응을 보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다를 거 없어요. 아직도 제가 못생겼나요? 이 정도면 잘생긴 건 줄 알았는데.”

불현듯 로이드를 변호하던 아르가 떠올랐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뇨. 잘생기셨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