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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30화 (30/148)

30화

임페리얼 섀도 나이트의 단장 레이하임은 황제의 혜안에 혀를 내둘렀다.

황후가 찾아냈다며 내민 그 2월 29일의 기록지에 유일하게 찾지 못한 북문의 출입 기록. 그 사실을 보고받자마자 황제는 그날 북문에서 근무한 기사를 알아내라 지시했다. 그리고 명령했다.

“그 근위 기사를 밀착, 보호 감시해라. 적어도 너희들 셋 정도는 붙어야겠지.”

처음에는 임페리얼 섀도 나이트를 셋이나 붙이라니 너무 과하지 않은가 싶었으나, 지금 보니 황제의 혜안이 틀림없었다.

세상에, 암살자가 넷이나 붙다니! 황제는 이를 예견했던 것일까?

물론 황궁 기사쯤 되는 자를 암살하려면 암살자 하나만 가지고는 힘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술에 취한 무방비 상태의 사람을 죽이는 데 뭔 암살자가 넷이나 붙는단 말인가.

‘한 번에 확실하게 제거하겠다는 건가? 그만큼 황후에게 위험한 무언가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겠지.’

굳이 급소를 찌르지 않고 뒤에서 목을 조른 이유는 아마 목을 매달아 자살로 위장하려 했던 것일 터다. 그래 놓고 키옌은 그가 자살한 이유가 황제의 압박 수사 때문이라며 황제 폐하를 공격했겠지.

레이하임은 암살자들의 처리는 함께 온 두 명의 섀도 나이트에게 맡긴 채 제이의 목을 조르던 암살자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뒤집었다.

‘죽었군.’

칼은 정확히 오른쪽 어깨 관절에 찍혔다가 뽑혔다. 혈관을 교묘하게 피해서. 그러나 정작 사인은 입안에 숨긴 맹독을 깨물어 자결한 것이었다.

그는 뒤돌아 자신의 두 부하와 암살자들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중 그의 시선이 꽂힌 곳은 덩치가 더 작은 쪽의 섀도 나이트였다.

제이가 목이 졸리는 광경을 발견하고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암살자의 어깨 관절을 찍어 버린 놈. 그러면서도 동맥은 교묘하게 피해 치명상을 입힌 건 아니었다.

‘저 괴물 같은 꼬맹이,’

그의 손속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그저 신속하고 정확하게 효율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황제의 또 다른 명령이 떠올랐다.

“배후를 밝혀야 한다. 암살자는 하나라도 좋으니 생포해.”

생포라니 여간 까다로운 요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황명이다.

레이하임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아 검신이 잠시 빛났다. 그리고 이내 칠흑 속에 파묻혔다.

그는 번개처럼 앞으로 나서 암살자 하나를 베었다. 레이하임은 암살자가 비틀한 틈을 타서 그의 옆구리에 검을 찍어 넣은 다음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러면서 왼손으로는 암살자의 양 볼을 힘껏 눌러 잡았다. 입속에 든 독주머니를 뱉어 내게 하기 위해서였다.

“커억!”

순식간에 암살자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변하더니 검게 죽은 코피를 쏟으며 늘어졌다. 사체의 입에서 초록빛 액체가 주르륵 새어 나왔다.

‘이런, 벌써 자결하다니. 내가 한 박자 늦었군.’

왼쪽을 돌아보니 자신의 부하 중 한 녀석 역시 암살자를 생포하려다 실패한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암살자가 자결했습니다.”

“괜찮다. 아직 하나 살아 있어. 너는 제이를 챙기고 있어. 곧 다른 섀도 나이트들이 올 거다. 제이를 데리고 궁으로 돌아가. 중요한 증인이다.”

“예.”

그러는 사이에 암살자 하나가 도망쳤고 나머지 섀도 나이트가 그 암살자를 추격하고 있다. 레이하임은 현장을 뒤로하고 암살자 추격에 합류했다.

빠르게 달리면서도 발소리가 나지 않는다. 고도로 숙련된 암살자의 향취가 느껴진다. 그건 레이하임과 그의 앞에서 먼저 암살자를 추격하던 녀석, 아르도 마찬가지였다.

“아르, 저놈은 무조건 생포해. 나머지는 전부 자결했다.”

“예.”

레이하임과 아르는 암살자가 위협을 느끼고 자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와 적당히 거리를 유지했다. 벌써 거리를 좁혀 암살자에게 심리적 불안을 주면 손을 쓸 새도 없이 냅다 자결부터 할지 몰랐다.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다 적당히 암살자가 힘이 빠질 즈음이었다. 지금이 타이밍이라고 느낀 순간 아르는 순식간에 암살자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러고는 단도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손가락만 한 은장도로 암살자의 어금니 부근의 볼을 찍어 비틀었다. 이제 턱을 움직일 수 없으니 독주머니를 씹지 못한다.

“크억!”

암살자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아르는 그대로 암살자를 바닥에 엎어누른 다음 그의 목, 정확히는 성대가 있는 곳을 엄지와 검지로 있는 힘껏 잡았다. 숨소리 외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레이하임이 다가와 암살자의 입속에 손을 집어넣어 독주머니를 빼냈다. 독주머니를 분석하면 어느 암살단 소속인지도 알 수 있을 거다.

사람들은 으레 암살자들이 자신의 소속을 나타내기 위해서 몸에 문신 같은 것을 새기는 줄 착각하는데 암살단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자신들의 흔적을 남길 리가 없다. 혹여 임무에 실패해 죽는 바람에 타깃에게 시체를 내주게 되면 그 문신의 흔적이 자신들의 목을 조를 테니까.

그러므로 암살단의 소속을 알기 위해서는 독주머니를 분석해야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암살단마다 독의 성분도 독주머니의 재질도 모두 다르니까. 암살단원들에게 일괄 지급하는 독주머니마저 개인별로 다 다르지는 않겠지.

레이하임은 독주머니를 조심스레 자신의 가슴 주머니 속에 챙겼다.

그러는 사이에 아르는 암살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팔목과 발목의 힘줄을 끊어 놓았다. 그 깔끔한 손속은 잔인하다기보다 기계 같다는 느낌이 더 짙었다.

황제가 저 녀석을 처음 섀도 나이트에 데려왔을 때 저 녀석의 나이는 고작 일곱, 정확히는 만으로 일곱 살 반 즈음이었다.

“섀도 나이트에 들어오고 싶대. 네가 가르쳐 봐.”

도대체 저 녀석이 어떻게 황제를 만나서 섀도 나이트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굳이 알 필요도 없다. 이 임페리얼 섀도 나이트에 들어오는 경로들은 다들 특이하니까. 물론 황제가 직접 데려오는 케이스는 레이하임도 처음 보았지만.

어쨌든 레이하임이 아르와 처음 만나던 날 몇 가지 물었을 때, 아르는 다섯에 처음으로 목검을 잡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고작 목검으로 검술을 2년 한 어린애 솜씨라기에는 가르칠수록 꽤 깊이가 있었다. 재능의 차이일까.

그리고 묘하게 정석적인 검술의 느낌이 났다. 우연히 검을 잡아 아무한테나 막 배운 솜씨는 아니었다. 적어도 그의 스승은 황실 혹은 공작가나 후작가의 기사단 이상의 실력자인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의 밑에서 배운 흔적이 있었다.

그 증거로 지금 아르가 가진 암살 기술은 모두 레이하임의 것이었으나, 나머지 기술들은 단 한 번도 그가 가르쳐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레이하임은 거기까지 생각하곤 고개를 저었다.

‘너무 과한 호기심은 좋지 않지. 우리끼리 서로의 출신과 각자의 기술의 뿌리에 대해 알 필요도 없을 테고.’

“임무 종료한다. 복귀하자.”

***

고모님의 독서 모임에서 볼테르와 민티아에게 치욕을 안겨 준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핫초코를 꿀꺽꿀꺽 마셨다.

모임이 끝나고 다들 돌아간 이후, 내 외할아버지, 세르피스 후작은 남아서 에오넬 고모님과 이것저것 대화를 했다. 대화의 핵심은 볼테르 숙부의 밤놀이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나 볼테르와 함께 어울리는 무리에 어느 가문의 영윤들이 있는 것인지를 조사했던 내 외할아버님의 정보가 고모님께는 많이 유용했던 모양이다.

역시 연결해 주길 잘했다. 뿌듯하군!

나는 고모님과 외할아버님이 어린아이 눈치 보느라 말조심할 필요도 없도록 자리를 비켜 드렸다. 어린애 앞에서 술을 비롯하여 몇몇 불법적인 것을 파는 비밀 사교 클럽 이야기를 대놓고 할 순 없을 테니까.

“다 먹었다. 나 이제 갈래요.”

나는 두 분께 인사를 하고 유모와 시녀들과 함께 수정궁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할바마마가 계시는 황제의 황금궁으로 향했다.

핑계는 저녁을 할바마마와 먹고 싶다는 것! 그러나 실제 목적은 볼테르의 밤놀이를 할바마마가 들쑤시지 않고 가만히 고모님께 맡기도록 종용하는 것.

“할바마마한테 가자.”

내가 할바마마의 궁으로 발걸음을 돌리자 유모도 잔느도 별다른 잔소리 없이 황제 폐하의 궁으로 향했다.

원래는 아무리 황족이라도 예고도 없이 황제를 알현하러 찾아가는 건 무례에 속했지만 난 예외였다. 할바마마가 나에게만큼은 오고 싶으면 온다고 말을 전할 시종 시녀를 보낼 시간에 그냥 얼른 준비하고 오라고 했거든!

내가 할바마마의 집무실에 도착하자 시종이 익숙한 듯 안에 기별을 고했고 할바마마는 마치 문 앞에 서 있었던 것처럼 달려 나와 허리를 숙여 나를 끌어안았다.

“어이구! 우리 멜리이이이이이!”

“저 오늘은 할바마마랑 식사를 하고 싶어요. 저 크로이젠 공작 부인께 식사 예법을 배우는 중이거든요. 공작 부인께서 저한테 엄청 잘한다고 했어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할바마마가 벌떡 일어났다.

“오늘 저녁 식사는 좀 일찍 하자. 지금 먹을 수 있나? 아직 준비가 안 되었을까?”

마론 백작이 그런 할바마마를 뜯어말렸다.

“이거 다 처리하시면요. 몇 장 안 남았습니다.”

“이거랑 밥이 다 되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지금 바로 먹을 수 있으면 먹고 와서 하자.”

“저도 집에 가서 저녁 먹고 싶습니다! 저도 칼퇴근하고 집에 가서 처자식하고 밥 먹을 겁니다! 제. 집. 에. 서!”

단언컨대 황제 앞에서 저렇게 당당하게 자신의 칼퇴근을 주장하는 신하는 마론 백작뿐일 거다. 할바마마는 잔뜩 심통이 난 표정으로 책상에 도로 앉았다.

“이것만 정말 하면 되나? 오늘은 더 없는 게지?”

“예. 폐하!”

백작이 힘주어 말하자 할바마마는 장난을 모의하는 악동처럼 씨익 웃더니 무서운 속도로 옥새를 찍기 시작했다.

“아앗! 폐하, 잠깐만요. 이거 뭔지는 아세요? 읽어는 보셔야죠. 아니, 읽는 것 바라지도 않으니까 읽는 척이라도 하세요! 폐하아아아!”

“아아, 그거 백작이 알아서 분류해서 내일 업무로 달아 놔.”

그렇게 국가 정책들이 그득 담긴 서류의 내용이 뭔지 읽지도 않고 모든 일을 끝마친 폐하께서는 절규하는 마론 백작을 뒤로하고 나와 함께 황제궁의 식당으로 향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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