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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29화 (29/148)

29화

황후는 초조하게 에오넬의 독서 모임 소식을 기다렸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민티아를 데리고 참석하고 싶었으나 황후라는 자리가 그걸 어렵게 했다. 그래서 볼테르를 보냈다.

중립 귀족들도 자주 참석하는 황태녀의 독서회에서 그들에게 볼테르를 눈도장도 찍을 겸, 겸사겸사. 이날을 위해서 그토록 싫어하는 황녀에게 자존심을 접고 민티아 몫의 초대장을 얻어 내지 않았던가!

과연 잘 해낼까 불안했지만 황후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시녀들이 옆에서 그녀의 속마음을 대신하여 조잘댈 뿐이었다.

“아가씨께서 잘하실 수 있겠지요? 전 너무 긴장돼요, 황후 폐하.”

“걱정하지 마렴.”

‘그래,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오늘을 위해서 일부러 책도 손수 골라 보냈는걸.’ 그녀는 민티아에게 책을 골라 주어 읽게 하고 책에 대해서 해야 할 말도 반복해서 연습시켰다. 책 내용을 거의 외우다시피 할 때까지 예리하게 질문하고 질문에 답하게 했다.

황후의 사교계 대리인 민티아는 모든 것이 완벽해야 했으므로.

그때 염탐을 보냈던 시녀가 돌아왔다.

“왜 벌써 오는 것이냐?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을 텐데?”

“그, 그것이…… 송구하오나, 황자 전하와 아가씨께서 중간에 나오셔서…….”

중간에 나오다니 왜? 게다가 모임에 참석하자마자 이렇게 빠져나오는 건 꽤 큰 결례가 아닌가.

시녀가 이야기를 이어 나갈수록 황후의 손도 점점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애써 꾹 참았던 화는 시녀가 이야기를 마치고 나가자마자 그대로 터져 나왔다.

황후는 손에 잡히는 물건을 아무거나 집어 던졌다.

쨍그랑!

탁자 위의 오르골이 벽에 맞고 깨졌다.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고 안에 있던 태엽이 떼구루루 굴러 나왔다.

“이런 멍청한 것들! 황손과 책이 겹쳤으면 겹치는 대로 그냥 할 것이지! 아니면 읽었던 책이 그것 하나도 아니고, 아무거나 전에 읽었던 것으로 하면 될 일이 아니야?”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질질 짤 건 또 뭐람. 게다가 중립 귀족들에게 눈도장 잘 찍고 오라며 보냈던 볼테르는 눈도장을 받기는커녕 비웃음이나 실컷 샀겠지.

그때 다른 시녀가 밖에서 또 기별을 해 왔다. 황후는 마침 깨진 유리를 치울 하녀도 필요했으므로 시녀들 들여보냈다.

“이따 저거나 치워. 그리고 무슨 일이지?”

“황자 전하가 황궁 밖으로 나가서 다니는 장소를 알아 왔습니다. 그곳에서 무엇을 하는지도요.”

***

결국 볼테르가 아닌, 민티아의 유모가 황태녀의 수정궁 외곽에서 아이를 어르고 달래 간신히 독서 모임에 돌려보냈다. 그 모습을 본 많은 이들은 속으로 비웃음을 삼키고는 아직 어리니 그럴 수 있다며 민티아에게 다정히 대해 주었다.

그렇게 독서 모임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는 그때.

볼테르 황자의 궁인 벚꽃궁, 아직 꽃철은 이른지라 왕벚나무에는 새순이 잔뜩 달려 있다. 연둣빛 새순 돋은 나무 사이로 반듯하게 난 길을 따라 황후가 바쁜 걸음을 놀렸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성큼성큼 분노가 서려 있었다. 황후의 시녀들도 잔뜩 굳은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예고 없는 황후의 기습에 주인이 자리를 비운 궁의 시종들이 깜짝 놀라며 달려 나왔다.

“황후 폐하, 이곳까지는 어쩐 일…….”

황자의 시종장은 말을 마칠 수 없었다. 황후가 돌연 시종장의 따귀를 날린 것이었다.

짜악!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빨갛게 부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무슨 일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황후가 일갈했다.

“어쩐 일? 몰라서 묻는 게냐? 황자가 벌써 수개월 전부터 밤마다 어딜 싸돌아다니는지, 시종장이라는 게 알지도 못해?”

“그, 그게 무슨?”

황후는 대답도 하지 않고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시종들은 황급히 길을 텄고 누군가는 볼테르에게 이 사실을 전하러 독서 모임이 진행 중인 황태녀궁으로 갔다.

아들의 방에 도착한 황후가 명령했다.

“싹 다 뒤져라.”

황후의 명령에 시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책장의 책을 모조리 꺼내 낱장 사이사이를 뒤졌다. 침대에서 이불을 끌어내고 침대 커버와 베갯속, 이불솜까지 전부 뜯어냈다.

“저 소파도 확인해라. 카펫도 걷어.”

온 방이 난장판이 되었다. 시종장은 영문도 모른 채 당한 이 엄청난 사태에 얼이 빠지고 말았다. 그가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황후에게 아뢰었다.

“황후 폐하, 대체 무슨 일인지라도 말씀 좀 해주십시오.”

“닥치거라!”

그때 시녀 하나가 도톰하게 접힌 캔버스를 여러 장 들고 왔다.

‘이건 또 뭐야?’

수상한 약병만, 드림 퍼퓸인지 뭔지 하는 수면제만 찾으면 될 일이었는데 카펫 밑에서 수상한 것들이 튀어나왔다. 황후는 그것 중 하나를 받아 던지듯이 펼쳤다.

촤악!

황후의 손에 들린 캔버스가 활짝 펼쳐지며 살색의 향연이 드러났다.

“꺄악!”

몹시도 외설스러운 장면에 시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황후 역시 얼굴이 희게 질렸다. 시종들은 놀란 눈을 어디 두어야 할지 모른 채로 시선을 피했다.

“헉! 저런 상스러운 것이 왜 저기에…….”

황후는 손에 들린 캔버스를 그대로 시종장을 향해 내던졌다.

“똑똑히 보아라. 이래도 너희들이 황자를 잘 모신다고 할 수 있느냔 말이다! 이런 천박한 것을 감히 궁으로 들여와 숨길 때까지 어떻게 아무도 모를 수가 있어?”

황후는 나머지 캔버스들도 하나하나 펼쳐 황자의 시종들 얼굴에 집어 던졌다.

설마하니 나오라는 드림 퍼퓸은 나오지 않고 저 천박한 그림 쪼가리들만 나오다니. 저런 게 나올 줄 알았다면 좀 더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서 뒤질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야. 혈기 왕성한 사내가 그럴 수도 있다고 둘러댄다면 저런 그림 따위야 어떻게든 해프닝 정도로 묻고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몰라.’

애초에 목적은 볼테르가 궁 밖에서 구매한다는 독한 수면제가 아니던가. 주객이 전도되면 안 된다.

“소파도 마저 뒤져라.”

황후의 명령에 시녀들이 갈 곳 잃은 눈을 내리깔고 소파의 등받이와 의자 틈에 손을 집어넣어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것이 나왔다.

“찾았습니다.”

시녀가 손가락만 한 향수병과 웬 하인의 황궁 출입증을 하나 들고 왔다.

‘이걸로 근위 기사들을 속이고 나갔구나.’

시녀들이 옆 소파를 더 뒤지니 향수가 몇 병 더 나왔다. 모두 합해 빈 병 두 개에, 내용물이 든 병은 세 병이나 되었다.

“이것들이 무엇인지 아느냐?”

시종장이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저희를 죽여 주십시오, 황후 폐하.”

다른 시종들도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모르면 되었다. 내가 확인을 해보면 될 터.”

키옌은 그나마 안심했다. 저게 드림 퍼퓸이라는 중독성 수면제라는 걸 모른다니 다행이었다.

“이만 가자.”

그렇게 한바탕 벚꽃궁을 뒤집어엎은 키옌은 캔버스들을 눈앞에서 모조리 태워 버린 후 노기 서린 얼굴로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

황후궁의 근위 기사 제이는 동료들과 술을 진탕 퍼마셨다.

지난 윤년, 2월 29일, 그는 황후궁 북문에서 근무를 섰다. 아니, 그날 섰는지 사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근무표를 보니 그날 그가 근무를 섰다고 적혀 있었다.

“감봉이 3개월째 되니까 돈 없어서 죽겠다. 징계는 이게 정말 끝이겠지? 설마 다른 곳으로 좌천되는 건 아니겠지?”

“그게 네 실수겠냐? 그 날짜 기록지가 통으로 다 없어졌는데. 기록실의 어떤 머저리가 실수한 거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런데 왜 다른 문 출입 기록지는 다 찾았는데 내가 담당했던 북문만 없는 거냐고!”

울고 싶었다. 한참을 신세를 한탄하며 얼큰하게 취해 눈앞이 어질어질할 즈음, 술자리가 파투나고 제이는 집으로 향했다. 비틀비틀 인적 드문 길에 접어들 즈음이었다.

터덜터덜. 자박자박.

맥없는 자신의 발소리 뒤로 묘하게 겹치는 다른 발소리에 제이는 순간적으로 모골이 송연해졌다.

‘내가 취했나?’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누군가 등 뒤에서 그의 목에 밧줄을 걸고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컥! 으억!”

손을 들어 목을 조이는 밧줄을 잡으려 했지만 취한 탓인지 자꾸 허공만 휘저었다. 가뜩이나 술에 절어 어지럽던 머리에는 끔찍한 두통까지 밀려들었다. 숨이 막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는 죽을힘을 쥐어짜 물었다.

“느, 눅! 눅으윽!”

누구냐고 물어도 대답은 없다. 곧 눈앞이 점멸하고 온몸에서 힘이 빠져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죽는구나, 그런데 난 왜 죽는 걸까. 아, 기억났다. 그날 딱 한 명이 궁에 들어왔지. 중년 남자였어. 황후의 시녀장이 그를 직접 데리고 들어왔고.’

그때 잠깐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누구길래 인적이 드문 북문을 통해서 황후의 시녀장이 직접 사람을 데리고 들어온 걸까.

하지만 당시 신입이었던 그는 궁 안에서는 보고도 못 본 척해야 신상에 이롭다는 선배들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그날 일을 차츰 잊어 가고 있었다.

‘내가 역시 그날 보면 안 될 것을 보았던 걸까. 재수 더럽게 없네.’

그때였다. 갑자기 목을 조르던 밧줄이 풀렸다.

푹!

익숙한 듯한 찍는 소리. 그러나 평소 그가 훈련용 짚단 더미를 썰어 넘기던 그 소리보다 훨씬 더 진득하고 섬찟한 소리. 동시에 순간적으로 숨이 돌아오고 제이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으억!”

무릎을 꿇을 힘도 나지 않았다. 옆으로 쓰러진 제이의 시야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여럿이 뒤엉켜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숨은 돌아왔어도 정신은 여전히 희끄무레했다.

발끝에 사람이, 아니 사람이었던 것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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