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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28화 (28/148)

28화

세르피스 후작은 자신의 외손녀이자 제국의 황위 계승 서열 2위인 황태손 아멜리아가 보낸 편지를 손에 쥐고 입궁하고 있었다.

마차 안에서 읽고 또 읽어도 ‘아홉 살이 아니야…….’라는 생각뿐이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에오넬 고모님이 황후 마마도 듣는 자리에서 볼테르 숙부님의 가출에 대해 말씀하신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에오넬 고모님이 정기적으로 주최하는 독서 모임의 비정규 멤버를 위한 초대장도 함께 보낼게요! 거기서 할아버지랑 동화책이 읽고 싶어요. 할아버지의 귀여운 외손녀 멜리 드림.」

멜리의 시녀가 며칠 전 들고 온 이 편지는 어린아이의 솜씨라기에는 제법 야무지게 황실의 황금색 실링 왁스가 발려 있었고 그 위에는 황가의 문양으로 인장이 찍혀 있었다.

후작은 함께 동봉되어 있던 초대장을 떠올렸다. 독서 모임의 이번 주제는 ‘동심’. 황태녀 에오넬이 멜리를 양녀로 들이자마자 독서 모임의 주제를 그렇게 선택한 이유는 자잘한 행사에 은근슬쩍 아멜리아를 내보이면서 멜리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함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멜리는 그 자리를 이용해 나와 황태녀를 연결해 주려는 것 같은데…….’

아니, 이건 고작 아홉 먹은 어린애의 심계에서 나올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건 필시 황태녀가 멜리를 위해서 멜리의 외가인 세르피스 후작가와 관계를 돈독히 해두기 위함일 터다.

그렇게 후작의 오해가 싹트기 시작했다.

***

나는 황궁 도서관에서 빌린 동화책을 가지고 고모님의 궁으로 보무도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햇살이 참 말간 날이라 오래간만에 걷고 싶어서 마차도 타지 않았다.

대리석 조각상으로 장식된 후원에서는 하인들이 거대한 차양을 치고 테이블과 의자를 옮기고 있었고 하녀들은 주방에서 부지런히 다과를 날랐다. 시녀들은 빠진 것이 없는지 꼼꼼하게 체크하느라 바빴다.

고모님은 날라 온 다과를 종류별로 한 입씩 시식하며 테이블에 준비할 것과 뺄 것들을 골라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고모님 품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안겼다.

“고모오오!”

“멜리, 어서 오너라.”

고모님은 자신의 드레스 자락에 매달린 나를 부드럽게 떼어 내고는 바로 옆의 쿠키 접시에서 밀푀유를 집어 내 입에 쑥 넣었다. 밀푀유는 안에서 가루처럼 바스라지더니 얇고 켜켜이 쌓여 있던 틈 사이에서 쫀득한 잼을 터뜨렸다.

“와아!”

때마침 출출했던 터라 나는 입 안 가득 들어온 달콤한 밀푀유를 우물우물 입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처 입속에 다 들어가지 못한 과자 부스러기가 폴폴 날아가 고모님의 드레스에 달라붙었다.

“앗!”

사람들이 모이기까지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드레스 자락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어서 고모님께 죄송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하지만 벌써 볼 안쪽을 빵빵하게 채운 밀푀유를 씹는 것도 벅차 말을 할 수 없었다. 얼른 씹어 삼켜야지. 내가 숨까지 참으며 밀푀유를 씹자 고모님이 드레스 자락을 손바닥으로 탁탁 털며 밀푀유가 담긴 쿠키 접시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건 빼. 아이들이 책을 읽으면서 먹기에는 너무 크고 부스러기도 많이 날리는군.”

“예, 전하.”

“손에 묻지 않고 가루도 날리지 않으면서 금방 삼킬 수 있는 것이 좋겠어.”

나는 고모님께서 모임을 준비하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고모님은 여전히 궁인들이 일하는 모습을 날카롭게 지켜보시면서도 검지로 무심하게 내 입술에 묻은 과자 가루를 훑어 냈다.

차갑고 길쭉한 손가락이 부드럽게 입술을 간질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고모님을 쳐다보고 히죽 웃었다. 마주친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이런 분이었는데 나는 어째서 지난 삶에서 내 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오른손을 들어 왼쪽 가슴에 올리자 심장이 쿵쾅거렸다. 오후의 봄 햇볕 때문인 걸까? 따뜻했다.

“고모.”

“응?”

“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오해해서 고모를 죽였었다고, 숙부의 꾐에 빠져 당신을 배신했었다고 잘못했었다고. 차마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어서 나는 잠시 할 말을 찾아 고민했다. 그러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대리석 조각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날씨가 너무 좋아요!”

그러는 사이에 모든 준비가 끝나고 이내 오늘 모임의 참석자 중 첫 번째 등장인물이 수정궁의 후원에 들어왔다.

“누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태녀 전하를 뵙습니다. 제국에 영광을…….”

볼테르와 그의 사촌, 민티아였다.

민티아와는 이로써 두 번째 만남. 그녀는 과연 우리의 어린 시절 서로 따귀를 날렸던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벌써 6년 전의 일이었다. 그녀에겐 다섯 살 때의 일이다.

대부분의 기억은 없을 나이지만 그래도 충격적인 사건의 윤곽 정도는 어렴풋이 기억할 수도 있을 나이.

나는 화사하게 웃으며 고모님의 손을 붙잡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나는 크로이젠 공작 부인에게 배운 예법에 맞게 볼테르 숙부에게 인사를 한 다음 민티아 앞으로 갔다.

민티아가 흠칫하면서도 조심스레 예를 갖추었다. 저 긴장하는 몸짓은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그런 걸까, 아니면 초면인 황족의 앞에 선 탓일까?

“황태손 저하를 뵙습니다. 제국에 영광을. 체리에의 민티아입니다.”

그녀가 드레스 자락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조금만 떠볼까? 나는 마치 5년 전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처럼 마주 인사했다. 뭐, 애초에 세 살 때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마는.

“처음 뵙겠어요, 체리에 양. 아멜리아 플라티나 체르무트예요.”

내가 황족이라서 인사할 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있다는 건 꽤 좋았다. 빳빳하게 쳐든 눈 그대로 민티아의 반응을 관찰할 수 있었으니까. 드레스 자락을 쥔 민티아의 손등이 하얗게 도드라졌다.

적어도 나를 마냥 편하게 여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좋은 현상이다. 이 첫인상만 그대로 유지한다면 기 싸움에서는 내가 한참이나 먹고 들어가는 거나 다름없다.

잠시 후 내 외할아버지인 세르피스 후작께서 도착하자 고모님은 나를 외할아버지께 맡기고는 모임의 주최자로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모임의 주제가 ‘동심’인 만큼 아직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아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마지막으로 크로이젠 공작 부인과 그녀의 조카이자 내 예동인 리엘라까지 도착하고 본격적인 독서 모임이 시작되었다. 커다란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아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책 내용을 제 자랑 하듯 이야기했고, 어른들은 동심의 세계로 돌아갔다.

“역시 아이들은 어른이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것을 생각해 내곤 하는군요!”

“저는 노안이 와서 늘 시녀가 옆에서 책을 읽어 주었는데, 이리 큼지막한 글씨를 보니 오랜만에 책을 읽는 느낌이 나네요.”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황태손께서는 요즘 어떤 책을 읽으시나요?”

드디어 내 차례가 오고 나는 가져온 책을 꺼냈다. 황궁 도서관에서 빌려 전부 읽고 또 읽었다. 바로 오늘을 위해서!

이 책은 지난 삶에서 바로 오늘 민티아가 들고 왔던 책이다. 그리고 그녀의 가방 안에 지금 들어 있을 책이기도 하고.

지난 삶에서는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실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민티아가 들고 왔던 책의 제목은 기억한다.

<어린 공주>라고, 동화책치고는 꽤 어려운 편이라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불리는 책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민티아의 책에 대한 해석도 어렸던 내게는 몹시 난해했다. 기껏해야 나보다 한두 살 더 많아 보일 뿐인데, 민티아의 말은 어른들의 것처럼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 사실이 내게는 꽤 충격적으로 다가와서 다른 건 몰라도 이 책에 대해서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꺼낸 책의 표지를 본 이들이 의외라는 듯 입가를 가리고 소곤거렸다.

“저하가 올해 아홉 살이 아닌가요?”

“저하보단 좀 더 큰 아이들이 읽을 법한 동화네요.”

맞은편에 앉은 민티아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갛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파르르 떠는 어깨를 보니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동화의 내용과 감상을 이야기했다. 너무 어른스럽지는 않도록 어려운 부분은 다소 뭉뚱그려 이야기하자 위화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말을 다 마치고 고모님을 쳐다보았다. 주최자인 고모님의 면도 세워 주었고, 함께 참석한 외할아버지의 면도 세워 드렸으며…… 민티아의 기는 꺾어 버렸다.

어느새 차례가 옆으로 옆으로 넘어가면서 순식간에 벌써 반 바퀴나 돌아 민티아의 차례가 다가왔다. 민티아는 책이 들어 있는 자신의 가방 단추를 열어 물끄러미 안을 들여다만 보았다.

그녀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고모님이 가볍게 기침을 하며 주의를 환기했다.

“크흠. 체리에 양?”

고모님이 볼테르 숙부를 향해서 얼른 달래 보라며 고갯짓을 했다. 민티아는 귀까지 발개졌고 민티아를 데려온 볼테르 숙부는 어쩔 줄 모르고 당황했다.

애초에 이런 모임 자리에서 아이 유모들까지 들어와 부대낄 수 없으니 보호자들이 동행했던 것인데 볼테르는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주최자인 고모님이 바쁠 것을 예상하여 보호자로 외할아버님을 모시지 않았던가.

곧 사람들이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고모님도 더는 기다려 줄 수 없는지 볼테르 숙부를 불렀다.

“황자, 체리에 양이 많이 긴장한 모양인데 잠시 산책을 하며 긴장을 풀고 올 수 있을까요?”

“네, 네! 누님.”

볼테르가 기다렸다는 듯 민티아를 안고 벌떡 일어섰다.

“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갔다. 민티아의 품에서 가방이 툭 떨어지면서 나와 똑같은 책이 가방 안에서 미끄러져 밖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한 귀부인께서 주워 들었다.

“저런, 저하와 책이 겹쳐 많이 당황했던 모양이군요.”

이 자리에 민티아를 데리고 나온 인물이 볼테르라 내게는 참 다행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책이 겹치는 것쯤 아무렇지 않다고 다독이며 어떻게든 민티아를 이끌어 주었을 테니까.

서로가 무슨 책을 가지고 나올지 알 수 없었던 만큼 책이 겹치는 일 정도는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었을 거다. 그리고 책이 겹치게 되면 아이들이 당황하거나 속상해할 것 역시도.

그러므로 이번 일로 오늘 모임 자리에 나온 사람들의 머릿속에 볼테르는 스물이 넘어서도 열한 살짜리 사촌 동생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바보 같은 인물이라는 인식이 콱 박혀 버렸을 거다.

이것이 내 진짜 목적이었다. 민티아가 속상해하는 건 그저 사소한 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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