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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27화 (27/148)

27화

4. 정말로 기억해야 했던 것

키옌은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황제 쪽에서는 벌써 수개월째 비어 있는 황후궁 출입 기록지를 내놓으라 볶아대고, 딱 하나 있는 아들놈은 요즘 한창 반항이 극에 달했다. 사춘기 때에도 고분고분하던 놈이 뒤늦게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게다가 에오넬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황자가 밖으로 나돈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알려 주었다. 키옌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라면 분명 적당히 숨기다가 상대가 수습하기도 전에 와장창 사건을 터뜨려 줄 테니까.

‘그 독사 같은 계집애가 나한테 이걸 알려 주어 뭘 어쩌려는 거지? 대체 무슨 꿍꿍이람?’

키옌은 흔들의자에 앉아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설렁줄을 당겨 시녀를 불렀다. 그러자 곧 황후궁의 시녀장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그날…….”

황후가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시녀장은 오랜 눈칫밥으로 알아들었다. 3년 전 2월 29일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날 리만을 들여보낸 근위 기사, 황제보다 먼저 손 써서 처리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라는 뜻이다. 키옌은 금화가 가득 든 주머니를 시녀장에게 건넸다.

“알겠습니다.”

***

지난 늦가을, 사냥 행사 때 아르를 보고는 할바마마께 호위기사를 뽑아 달라 조르던 것이 엊그제 같았다. 그런데 벌써 내 호위기사가 뽑히고 그에 맞추어 기사단의 인사이동이 완료되었고 그러는 사이에 한 해가 넘어가고 봄까지 왔다.

오늘은 내 새로운 호위기사들과 정식으로 첫 만남이 있는 날.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오후, 나는 할바마마 옆에 앉아 디저트로 초콜릿이 묵직하게 들어간 케이크와 새콤한 보리수 에이드를 오물거렸다.

시녀들이 솜씨 좋게 묶어 준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구불거렸다. 그 위로 오로지 직계 황족에게만 허락된 은빛 티아라를 씌워 핀으로 단단히 고정했다. 맞은편 장식장에 비친 그 자태가 반짝반짝 빛났다.

황가의 직계 황녀들에게 티아라는 황제의 크라운과도 같아서 평소에는 잘 하지 않지만, 특별히 황족의 상징성을 남들 앞에 드러내야 할 때만 썼다. 오늘처럼 호위기사들을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에서 티아라를 쓰는 이유가 그런 상징성 때문이었다.

그들은 기사로서 황태손의 티아라에 충성을 바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들을 오롯이 사람 대 사람으로서 내 편으로 만들어 내는 건 나의 몫이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폐하, 도착했습니다.”

밖에서 시종이 아뢰는 소리가 들리고 곧 문이 열렸다. 나는 여전히 케이크를 오물오물 씹으며 기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와아, 눈 호강이다! 저 눈부시게 새하얀 제복!

실용성은 밥 말아 먹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어차피 황궁 안에서 입는 보여 주기식 제복과 달리 밖에서 진짜 기사의 검이 필요할 때 입는 갑옷은 또 따로 있다.

목 아래로 온몸을 제복으로 감싸고 심지어 장갑까지 껴서 손가락조차 보이지 않지만, 떡 벌어진 어깨, 일자로 쭉 뻗은 허리와 굵은 허벅지가 제복 안에 숨은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와아아……!”

나는 케이크를 씹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절도 있게 들어와 늘어선 기사들이 나와 할바마마를 향해 섰다.

“폐하를 뵙습니다. 저하를 뵙습니다. 제국에 영광을!”

크으으! 심장에 무리가 온다.

비록 할바마마가 중간에서 빼돌려서 아르를 얻어 내지는 못했지만, 이 멋있는 기사님들을 내 호위로 붙여 준다니. 할바마마에 대한 서운함이 조금은 사라질 것 같다.

기존에 있던 호위기사들은 모두 마흔이 넘은 아저씨들이었는데 이번에 추가로 뽑은 호위기사들은 여섯 명 중 네 명이 20대였고 한 명은 이제 막 견습을 뗀 10대였다.

아르가 분석을 해주기로는 호위기사들을 자칫 모두 노련한 중장년층으로 선발하게 되면 그들이 정년 퇴임을 하고 세대교체를 할 때 충성도가 떨어지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라나? 그걸 대비하기 위해서 나이 대를 골고루 선발해 두는 거라고 했다.

내가 기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말똥말똥 관찰하는 사이에 할바마마께서 그들의 비어 있는 어깨에 손수 견장을 달아 주었다.

“앞으로 자네들이 충성을 바칠 대상은 황실이 아니고 황제인 나도 아니라 아멜리아 플라티나 체르무트다.”

“예!”

그들의 어깨에 새로이 달린 견장은 노란 바탕에 황족의 호위기사단을 상징하는 자색으로 각기 계급이 수놓여 찬란하게 빛났다.

***

“그래서 오늘 호위기사들이 잔뜩 생겼어.”

모두가 잠든 밤 12시. 나는 거울 뒤로 넘어와 오랜만에 아르를 만났다.

“다행입니다. 저하를 지켜 줄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눌러 담겨 있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것이 그냥 눌린 것이 아니라 억눌린 것 같다는 느낌이 희미하게 들어 위화감이 일었다.

나는 애써 이 무거운 기분을 떨쳐 내기 위해 재빨리 본론부터 꺼냈다.

“그래서 알아낸 게 있어?”

“볼테르가 외출하는 목적을 알아냈습니다.”

나는 고개를 번쩍 들며 눈을 빛냈다.

“뭔데?”

“이겁니다.”

그는 품 안에서 손가락만 한 향수병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분홍빛 액체가 담겨 있었고 하나는 보랏빛 액체가 담겨 있었다.

“이게 뭔데?”

“볼테르를 위시한 몇몇 귀족 가문의 영윤들이 일탈을 즐기는 클럽에서 밀거래되는…… 수면제와…….”

“잠깐, 뭔 수면제를 밀거래까지 해? 그냥 궁의를 불러서 처방받으면 되지.”

내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아르와 수면제를 번갈아 쳐다보자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마약입니다. 보라색은 미약이고요.”

이래서 볼테르가 그때 그렇게 놀랐구나. 걸리면 그저 어른들께 혼나고 끝날 일이 아니다. 자칫하면 냉궁으로 쫓겨나 몇 년을 근신할지도 몰랐다. 그런데 고모님은 왜 황후에게 힌트를 주었을까.

나는 아르가 넘긴 두 개의 병을 받아 램프의 불빛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유리병에서 반사된 색상은 몹시도 유혹적인 빛깔이었다. 당장이라도 이 사실을 까발려 볼테르에게 빅똥을 던져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그것을 꾹 억눌렀다. 그리고 결정했다.

“아르, 이건 우리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고모님께서 키옌에게 이 사실에 대해 언질을 준 이유가 분명 있을 거야. 고모님의 계획이 따로 있으실 거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잠시 손을 뗀다. 우리가 끼면 고모님께 변수가 너무 많아져.”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세르피스 후작가를 끌어들이셨다고 하셨잖습니까. 게다가 지금 저를 포함하여 섀도 나이트에서 절반 이상의 인력이 이 사건을 조사하는 것에 투입되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고모님과 외할아버님을 연결해 줄 거야. 할바마마도 내가 알아서 하겠다.”

그리고 뭔가 또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뭐더라……. 생각하는 순간 아르가 손에 든 향수병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말이야. 이걸 넌 어떻게 구했어? 불법 거래 품목이라며. 할바마마의 명령으로 구해 온 거라면 나한테 넘길 수도 없을 거고, 네가 개인적으로 빼돌렸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건…….”

“귀족가 영윤들만의 비밀스러운 유희라면 아무리 섀도 나이트의 봉급이라도 네 돈으로는 못 살 텐데? 출입도 아무나 안 시켜 줄 것 같고 아무한테나 팔지도 않을 것 같고…….”

그때 그의 입에서 놀라운 이름이 흘러나왔다.

“로이드 폰 크로이젠…….”

누구?

“그 바람둥이 새끼가 성년식 한 지 몇 개월이나 됐다고 벌써 거길 다녀? 감히 내 예비 약혼자 타이틀을 달고 미쳤나,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이 똥마차가!

내가 분노로 눈이 뒤집혀 무슨 상스러운 말을 하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벌떡 일어나자 아르가 되레 당황했다.

“바람둥이라뇨?”

뭐냐, 그 듣느니 처음이라는 듯한 뉘앙스는?

“옛날에 레니트 백작 딸인가 뭔가가 나한테 제가 로이드랑 사랑하는 사이니까 헤어져 달라고 해서 네가 로이드 반 죽여 놨었잖아.”

내가 되묻자 그는 아까보다 더욱 당황스러워했다.

“아뇨, 제가 기억하는 시간 축에는 없던 일인데요? 아니, 그보다 로이드가 바람둥이라는 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

응? 이건 또 뭔 소리야? 로이드가 바람을 피운 적이 없다고?

나는 잠시 얘가 말하는 로이드와 내가 말하는 로이드가 다른 인물인가 고민했다.

“로이드 폰 크로이젠 말하는 거 맞지? 크로이젠 공작가의 차남.”

“예. 그렇습니다.”

어…… 그러니까 이건 지금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지?

내가 잠시 멍청하게 아르를 쳐다보고 있자 그가 침착하게 말했다.

“일단 제 기억 속 시간에서 로이드는 바람기를 보인 적이 없습니다. 아니, 그보다 일단 로이드 폰 크로이젠이 그 클럽의 사교모임에 다닌다는 건 오해입니다.”

“그럼 로이드 이름이 여기서 대체 왜 나와?”

“제가 도와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가 저 대신 ‘잠입’해서 저걸 구해다 준 거고요. 제가 제국법상으로는 미성년이라 거길 들어갈 수가 없어서요.”

아르는 제 일이 아님에도 상당히 억울해하며 로이드를 변호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사과를 해야만 할 것 같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 미, 미안. 오해했네.”

나는 그 이후로 장장 30분가량이나 로이드에 대한 그의 변호를 들어 주어야 했다. 그리고 겨우 빠져나와 방으로 돌아온 다음 침대에 누웠을 때, 아까 정신이 없어 미처 묻지 못했던 아주 중요한 사실이 생각나고야 말았다.

‘근데 로이드랑 아르랑 대체 무슨 관계길래 로이드가 귀족들 마약 파티 수사 잠입을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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