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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26화 (26/148)

26화

노을이 지는 저녁. 황궁의 동문에는 퇴근하는 궁인들의 줄이 길게 섰다. 그 가운데에는 암갈색 가발을 쓴 볼테르도 있었다.

볼테르는 이러한 일이 익숙한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근위 기사에게 황궁 출입증을 내밀었다.

“데이비드? 황자 전하 궁의 주방보조……. 자주 보는 것 같은데 왜 가까운 남문으로 안 지나가고 동문으로 나가지?”

“시장에 들러야 해서…….”

“통과.”

밖으로 나온 볼테르는 황궁 입구가 보이지 않을 즈음, 인적 드문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막다른 길 끝에 다다르자 어깨에 멘 가방에서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순식간에 어느 귀족 집 도련님처럼 보이게 되었다.

볼테르는 골목에서 나와 북쪽으로 걸었다. 그렇게 10분 정도 걷다 보면 귀족들과 거상들이 주로 찾는 고급 주점과 사교 클럽들이 즐비한 로크스 거리가 나온다.

유명 소믈리에의 와인바, 유명 셰프가 만드는 안주가 일품인 술집, 여성 귀족들에게 인기 절정인 칵테일 바 등등.

볼테르는 그중 가면을 쓴 사람들이 줄을 선 어느 클럽 앞에 멈추었다. 볼테르 역시 어느새 가면을 쓰고는 줄을 서서 들어가는 사람들 앞으로 끼어들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금색으로 번쩍이는 얇고 빳빳한 패를 꺼내 문 앞에 선 직원에게 보여 주었다. 패에는 VVIP라고 쓰여 있다. 직원은 그 패를 보자 길게 늘어선 줄을 무시하고 곧바로 볼테르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긴 복도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홀이 나왔다. 모두 가면을 쓴 사람들이 술잔을 들고 다니며 이야기를 나누고 춤을 췄다. 테이블에는 안주들이 그득했다. 홀의 가장 앞에는 무대가 있었는데 화려하게 꾸민 디바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볼테르는 힐끔 홀을 둘러보고는 곧장 5번이라고 적힌 룸으로 들어섰다.

“앗! 오셨군요!”

룸 안에는 볼테르 또래의 갓 성인이 된 듯한 남자 일곱 명이 있었다. 이미 알딸딸하게 술에 취한 그들은 다들 내로라하는 귀족 가문의 도련님들이었으며 볼테르 황자파의 세력에 속해 있는 귀족이었다.

방문을 닫고 볼테르는 가면을 벗었다. 그러자 누군가 볼테르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오늘은 좀 늦으셨군요. 안 오실 줄 알았습니다.”

볼테르는 술잔을 받아 마시고는 대답했다.

“아, 어마마마께서 눈치채셔서 조심스러웠거든. 아마 다음 모임에는 못 올 것 같아.”

“이런. 황자 전하께서 성년이 되신 지 한참인데요?”

“황후 마마께서 좀 깐깐하시잖습니까. 에휴, 우리같이 젊을 때 즐기셔야 하는데……!”

“내 말이 그 말이다. 어마마마는 너무 꽉 막혔어.”

볼테르는 의자에 털썩 앉더니 테이블에서 치즈와 토마토가 올려진 크래커를 집어 먹었다.

“그거 주문해 놨겠지?”

“곧 올 때가 됐는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누군가 문밖에서 노크했다.

똑똑!

다들 황급히 자신의 가면을 찾아 썼다.

“들어와!”

곧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은 주점의 점원이 갈색 상자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

“주문하신 향수입니다.”

각각의 상자를 열자 나온 건 맑은 분홍빛과 보랏빛 액체가 든 손가락 크기의 향수병 여러 개였다.

누군가 그 자리에서 금화가 든 주머니 하나를 점원에게 건네고 향수 두 병을 챙겨 품에 넣었다. 그러자 너도나도 두세 병씩 사들였다.

“나도 세 병.”

“난 각각 두 병씩.”

“나는…… 드림 퍼퓸으로 셋.”

볼테르는 분홍빛 향수를 다섯 병이나 구매했다.

한 방울만 코 밑에 바르고 자도 기분 좋은 꿈을 꿀 수 있었다. 물론 사용하지 않은 날에는 아무리 피곤해도 한숨도 잠이 들 수 없고 몹시 비싸다는 단점이 있지만, 아무렴 어떤가. 저걸 구할 수 있는 권력도 돈도 썩어 넘친다.

수면제와 환각제가 섞인 이 분홍 액체는 진통 효과도 있어서 원래는 통증이 심한 환자를 위해 의료 목적으로 사용되는 약이었다. 이 약은 법으로 제조와 유통, 사용까지 모두 엄격하게 제한되고 있지만, 가끔 이렇게 알 수 없는 경로로 빠져나와 풀리곤 했다. 물론 불법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제국의 지엄한 국법 따위 무섭지 않았다. 오직 무서울 거라곤 부모님이 사실을 알면 화를 낼 거라는 사실뿐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그 정도 야단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이 모임은 스릴 있고 저 향수의 효과는 지대했다.

게다가 이 모임에 황자를 끌어들인 이상 아무리 황실이라도 자신들을 함부로 건드리기 힘들 것이라는 근거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들이 이 모임을 부모에게 들키더라도 어떻게든 이 사건을 덮어 줄 것이다. 마찬가지로 황제도 황자를 위해서 사건을 덮어 주지 않을까? 황자를 끌어들인 일에는 그런 계산도 깔려 있었다.

볼테르는 향수병을 숨긴 가슴 주머니 근처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얇은 천 위로 손가락만 한 병들의 볼록한 양감이 느껴졌다.

‘앞으로 어마마마의 감시가 심해져서 여길 오지 못하면 언제 다시 이걸 구할 수 있을지 몰라.’

처음 이 모임에 들어왔을 때 볼테르는 숙면에 도움을 주는 향수라는 말에 혹하여 한 병을 샀다. 그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향수가 다 떨어지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키옌 황후의 목소리가 밤새 들렸다. 닦달하고 채근하며 숨통을 조이는 소리였다. 결국은 다음 모임에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알면 또 뭐라고 할까? 아바마마는 뭐라고 하실까.’

아무렴 상관없을 것 같았다. 여기서 어머니의 잔소리가 하나쯤 더 늘어난다고 해도 달라질 것도 없을 것 같고. 아바마마는 원래 자신에게 무관심했다.

다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각, 에오넬 황태녀의 수정궁 정원에서 에오넬과 파피란 공작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파피란은 서거한 전 황후의 친정이었으므로 에오넬에게는 외가 되는 가문이라 퍽 왕래가 잦았다. 지금의 파피란 공작은 에오넬에게는 사촌 오빠였다.

“저번에 제가 황후파 귀족가의 영윤들이 비밀 사교 클럽에서 불법적인 것을 거래하는 것 같다고 했잖습니까. 그거 언제 터뜨릴까요, 전하?”

공작이 비밀 이야기를 하듯 작은 목소리로 에오넬에게 물었다. 그러나 에오넬은 비밀스러울 것 없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황후에게 볼테르가 밖으로 나다닌다고는 이미 말했어요.”

에오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작이 마시던 홍차를 뿜을 뻔했다. 다행히도 황태녀의 면전에 차를 뿜는 불상사는 면했지만 공작은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켁켁! 아, 아니! 쿨럭! 야, 그걸 왜 알려 줘?”

공작은 저도 모르게 어릴 때처럼 황태녀에게 반말을 날렸다.

“황후는 분명 사건을 묻으려 할 테니까.”

“그럼 더더욱 알리면 안 되지!”

“볼테르 같은 잡스러운 거나 잡자고 내가 오빠한테 이런 부탁 한 거 아니야.”

공작이 기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위 계승 서열 2위인 황자가 잡스럽냐?”

“2위라니? 엄연히 황태손인 멜리가 있는데.”

“조카님은 애기니까 아직 계승 서열 따지기는 이르고!”

“걔가 나이가 어려서 그렇지 아바마마의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계승 서열 1위였어. 공작 정도 되었으면 황제의 복심 정도는 꿰뚫어 볼 수 있어야지.”

에오넬이 공작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어쨌든! 그럼 뭘 어쩌려고?”

“볼테르가 벌이는 짓과 더불어 황후가 그 사실을 묻으려는 것까지 까발려야지.”

“그게 말처럼 쉽겠냐?”

“오빠만 믿을게.”

에오넬이 입꼬리만으로 슬쩍 웃어 보였다.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쳐다보며 공작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넌 어째 형님이랑 영 딴판이야.”

“우리 오빠 얘기 하지 마. 난 내 방법을 쓸 거야.”

죽은 전 황태자는 정공법을 좋아했다. 그였다면 아마 황제에게 보고하고 조사단을 꾸린 다음 불시에 기사단을 풀어서 그 비밀 사교 클럽을 급습했을 거다. 그리고 범죄 사실이 입증되면 관계자들을 제국법에 따라 처벌하는 방법을 선택했을 거고.

그러나 에오넬은 달랐다. 황제에게 말도 안 하고 일단 일을 키우거나 증거를 수집한 다음 이야기꾼을 풀어서 귀족들 사이에서 카더라를 돌린다. 그리고 소문이 살짝 죽을 만하면 가끔 한 번씩 장작을 던져 준다.

그렇게 수개월 시간을 들여 적당히 소문을 부풀린다. 그리고 진실이 왜곡되어 그 속에 자연스레 녹아들 즈음, 그동안 모은 증거들을 만천하에 공개한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그녀의 적들을 발가벗기는 방법을 좋아했다. 민심을 이용할 줄도 알았다.

“진짜 잔인하다. 부디 폐하께서 오래오래 강녕하셔서 오래오래 통치하셨으면 좋겠네.”

공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래, 어렸을 때부터 귀여운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촌 동생이었다. 그래도 나쁘진 않다. 군주로서는 죽은 황태자의 방법이 최고일지 몰라도 상대의 멘탈을 좀먹는 데는 에오넬의 방법이 최고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돌고 돌아 생긴 소문에는 진실과 거짓이 뒤엉켜 어느새 진상은 사라지고 자극적인 것만 남을 테니까. 그리고 그녀의 정적들이 어지간히 낯짝이 두껍고 냉정하지 않은 이상은 자신을 둘러싼 치욕적인 소문을 막는 데에 급급해져 바보가 되어 버리겠지.

파피란 공작은 사촌 동생의 악독함에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 어릴 때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사촌 오빠가 그러거나 말거나 에오넬은 입꼬리를 올리며 파피란 공작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서 오빠, 부탁이 더 있는데. 볼테르가 그곳에서 만나는 귀족들이 누군지 알아 와줄래? 증거까지 같이 가져와 주면 좋겠고.”

“왜?”

“볼테르가 만난다는 그 남자애들이 각 가문의 후계자라면 어떻게든 묻으려고 기를 쓰겠지만 후계자가 아니라면 제 자식을 버리고 소문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냥 버틸 놈들도 많아. 권력이란 그런 거니까. 그때를 대비해 놓아야 하지 않겠어?”

공작은 한숨을 내쉬며 잔에 남은 마지막 한 모금의 홍차를 모두 마셨다.

“넌 정말 황제로 모시기 힘들 타입이야.”

“그 말, 아바마마 신하들도 하던데? 원래 황제는 다 그런 거려니 해.”

공작은 ‘원래 황위 계승 서열 1위’였다는 아멜리아 황태손을 떠올렸다. 그는 또 한번 황제 폐하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부디 오래오래 사셔서 황위는 에오넬 황태녀가 아닌 아멜리아 황태손에게 물려주고 돌아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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