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키옌은 대회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와 시녀들을 닦달했다.
“대체 너희들은 뭘 하기에 황자가 궁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것도 몰라!”
시녀들은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물었다.
“무능한 것들 같으니!”
황후가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녀들이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그래도 그녀들은 그나마 이만한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오늘 황후가 점찍어 두었던 그 견습 기사가 황태손의 호위기사 선발전에서 우승하지 못했더라면, 그녀들 중 누구 하나는 볼테르의 철딱서니 없는 행태 때문에 사표를 써야 했으리라.
“어휴! 답답해. 이거나 풀어.”
황후가 뒤로 돌자 시녀들이 재빠르게 거추장스러운 장신구를 벗기고 드레스 끈을 풀었다.
“이번 주 안으로 황자가 언제 나갔는지, 어디로 가는지, 왜 그러는지, 나가서 뭘 하는지! 낱낱이 조사해 와!”
그녀는 엄포를 놓고는 욕실로 직행했다. 뜻하지 않은 소식 때문에 정신이 혼미했다. 이럴 때는 따뜻한 물로 목욕하며 마사지를 받아야 한다.
그렇게 얼마나 몸을 담그고 있었을까. 별안간 욕실로 시녀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큰일, 큰일 났습니다! 황후 폐하아아아!”
황자의 일탈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으려고. 모처럼 나른하게 입욕을 즐기니 기분이 조금은 나아질 것 같았는데 거기에 초를 치다니!
들어서 별일이 아니라면 기분을 잡치게 한 저 시녀를 벌하리라. 그렇게 마음을 먹으며 키옌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시녀의 말에 키옌은 그만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폐하께서 갑자기 황궁 근위 기사단의 감찰대를 이끌고 와서는 3년 전의 2월 29일 출입 기록을 내놓으라고 하시면서…….”
그녀는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 욕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벌컥!
“이, 이 황제가! 정녕 나와 싸우자는 게로구나!”
키옌은 서둘러 옷을 입고 물기가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말리지도 못한 채 방 밖으로 나섰다. 복도를 걷는 키옌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녀는 빠르게 걸으며 시녀의 보고를 들었다.
“그래서 그걸 왜 내놓으라는 건데!”
“그…… 그게…… 갑자기 들어와서 기록실을 뒤졌는데 그날 하루의 기록이 없었습니다. 당장 그날 일지를 내놓으라 하시면서…….”
“그게 왜 없…….”
왜 없냐고 소리를 지르려던 키옌이 돌연 걸음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3년 전. 3년 전 2월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생각이 날 듯 말 듯 했다.
그때 늙은 시녀 하나가 키옌의 귀에 귓속말을 했다.
“리만이 왔던 날 같습니다.”
그게 들킨다고? 대체 어떻게 눈치를 챈 것일까. 황제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그날의 근무일지는 그녀가 직접 없앴다. 별로 익숙하지도 않은 2월 29일. 하루쯤 빠져도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자그마치 3년을 준비한 계획인데 이대로 물거품이 되게 할 순 없어.’
키옌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
깊은 밤. 모두가 잠든 깜깜한 시각에 나는 오늘도 몰래 자리에서 일어나 비밀 문이 있는 거울로 향했다.
그날 이후 습관처럼 매일 그곳을 확인했다. 그러면 사나흘에 한 번쯤 그가 와 있다.
달칵!
거울 뒤로 들어서자 습하고 냉한 동굴 특유의 기운이 훅 끼쳤다.
“읏!”
부르르 어깨를 떨며 몸을 움츠리는데 어깨에 보드라운 천이 닿았다.
“아직은 밤에 날이 찹니다. 저하.”
“그러네.”
나는 그가 걸쳐 준 천을 앞으로 끌어당겨 여몄다. 촉감과 앞부분의 단추를 보아하니 봄가을에 얇게 걸치는 팔이 긴 셔츠였다. 품이 큰 셔츠의 목깃에서는 은은한 들풀 냄새가 났다.
나는 옷깃을 들어 입 앞까지 꼭 여민 다음 그곳에 코를 묻었다. 오래전 냉궁에서 내게 걸쳐 주었던 그의 기사단 제복에서 나던 그 향과 꼭 같았다.
잠시 눈을 감고 볼을 부비다가 고개를 들자 그가 고개를 완전히 반대로 돌린 채 서 있었다.
“어디 봐?”
“아, 아닙니다.”
“그래?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너 빨랫비누 뭐 써?”
내 질문이 이상했던 걸까. 그는 잠시 내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 그냥 기사단에서 지급하는 건데…….”
“아아, 그렇구나.”
그럼 이 냄새는 그의 체향인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자 그도 마지못해 내 옆에 앉았다.
“왜 왔어?”
“3년 전…….”
역시나 오늘도 그는 내게 보고를 하러 왔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가 바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가끔은 아무 이유 없이 불쑥 찾아와 줬으면 싶었지만 그는 그런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말이 불퉁하게 나가고 말았다.
“2월 29일. 황후궁 출입 기록지가 없어졌다며. 얘기 들었어. 할바마마 보고받을 때 옆에서 있다가.”
“그럼 다음. 볼테르 황자의…….”
“밖으로 몰래 나가는 거?”
“그것도 알고 계셨군요. 그럼 무언가 알아내는 족족 저하께도 따로 보고 올리겠습니다. 밤이 늦었습니다. 이만 주무십시오.”
이렇게 그냥 간다고? 나는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의 소매를 잡았다. 그리고 그의 팔에 이마를 기대었다.
“잠깐만 이러고 있으면 안 돼?”
아주 잠깐만.
요즘은 이렇게라도 그의 온기를 느끼지 못하면 미래를 바꾸고 싶다는 의지가 무너질 것같이 마음이 위태롭다. 미래를 바꾼다는 것이 너무나 버거운 사명처럼 느껴졌다. 지난 5년 동안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대체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 번째 삶, 그러니까 우리의 두 번째 삶에서 혼자 그것을 어떻게 감내해 냈던 것일까.
“미안해.”
내가 지켜 주지 못해서. 너 혼자 나를 지키게 해서.
그럼에도 오래전 이 세상에 나 혼자 덜렁 남겨져 차가운 냉궁에 버려진 채 모두에게 외면당해도 내 곁을 끝까지 지켜 주었던 그의 어깨가, 등이 몹시 그리웠다.
한편으론 지독히 이기적인 내 감정에 혐오감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멈추기가 힘들었다.
“내가 미안해.”
그의 팔에 움찔 힘이 들어갔다.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그의 숨이 아주 잠시 흔들렸다.
“……저하. 소신이 이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니 주제넘은 건 압니다만. 충언…… 올려도 되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도 그의 시선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귀족들이 여성 정적을 제거할 때, 호위기사와 염문설을 퍼뜨리기도 합니다. 곧 저하의 호위기사가 될 페일을 멀리하십시오. 그의 가문이 체리에 후작가에 지속적으로 뇌물을 바칩니다. 그동안 후작가에서 받아 주질 않았지만 이번을 계기로 그들의 관계가 바뀌겠지요.”
“응.”
“그리고…… 같은 이유로…….”
그는 한참을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말을 고르듯 신중했다.
“지난번처럼 저를 호위로 삼고 싶다 지목하지 마십시오. 정적들에게 이용당하십니다.”
돌연 심장이 무거워졌다. 이유도 모른 채 하염없이 아래로 처박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어깨에 걸친 그의 셔츠 깃에서는 아직 들풀 향이 났다. 그가 계속 말했다.
“저하께서는 장차 제국의 황제가 되실 겁니다. 그 앞길에 저는 한 치의 누도 끼치지 않을 것이며…… 저하께 누가 되는 모든 것을 제가 베어 드릴 겁니다. 그러니…….”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등을 돌렸다.
“그러니 저하께도 저를 저하의 검으로만 이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제 기사도입니다. 저하는 저하의 왕도(王道)를 찾으십시오.”
***
아멜리아가 방으로 돌아가고, 아르는 닫힌 거울 문 뒤에 등을 기대고 그대로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이 말 몇 마디가 대체 뭐라고 여태 그리 주저했던 것인지 허무함이 밀려왔다.
“하…….”
바로 등 뒤. 이 문 너머 맞은편의 침대에서 자고 있을 아멜리아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드디어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각자의 길을 걷자. 나는 기사도를 너는 왕도를.’
이런 아까의 말은 그녀에게 한 말이 아닐지도 몰랐다. 아니, 그녀에게 한 말이 아니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다.
그걸 입 밖으로 꺼내 놓으면 속이 후련할 줄 알았는데,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가 될 줄 알았는데. 그러나 막상 꺼내 놓고 보니 가슴속이 텅 비어 버린 것처럼 공허했다.
아멜리아가 남기고 간 셔츠에서 아직도 온기가 느껴진다. 우리의 겉모습이 어려졌으니 그 감정 역시 퇴색될 줄 알았는데, 자꾸만 지금 아멜리아의 모습에서 열여덟, 냉궁에 있던 그 시절의 모습이 겹쳤다.
‘앞으로 8년…….’
아멜리아가 열여섯이 되기 전에 일을 끝내고, 볼테르와 키옌을 제거하고, 그리고 기사단을 떠날까? 퇴직금을 챙겨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으로, 그리고 황도의 소식이 닿지 못할 정도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면 조금은 괜찮아질까?
***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일어나 눈이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다. 유모는 나를 일으켜 강제로 세수를 시키면서 등을 두들겼다.
“밤새 주무셔 놓고 왜 이렇게 기운이 없으셔요? 열은 없는 것 같은데.”
“못 잤어.”
“왜요? 저하께서 밤잠 설칠 일이 뭐가 있어서요?”
이게 다 아르 그놈이 이상한 소리를 해서 사람 불안하게 만든 탓이로다!
“가만 안 둘 거야.”
“어휴! 잠이 덜 깨셨네. 뭘 가만 안 둬요! 얼른 정신 차려요. 오늘 크로이젠 공작 부인의 예법 수업 첫날이라고요!”
유모의 말이 끝나고 나는 고개를 들어 달력을 보았다.
“앗! 으아아아아! 그걸 왜 이제 말해!”
“어젯밤에도 말씀드렸어요!”
나는 허겁지겁 아침밥을 입에 쑤셔 넣고 수업을 진행하기로 한 방으로 향했다. 방 안에는 벌써 내 예동으로 입궁한 프리체 백작 영애가 와 있었다.
“저하를 뵙습니다. 제국에 영광을! 프리체의 리엘라입니다!”
그녀의 예법은 너무나 깔끔하고 완벽했다. 그 탓에 나도 모르게 아직 배우지도 않은 그러나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완벽한 예법으로 대응하고 말았다.
“반갑습니다, 백작 영애. 체르무트 제국의 아멜리아 플라티나 체르무트입니다.”
때마침 들어온 크로이젠 공작 부인이 놀란 눈을 하고는 인사했다.
“저하를 뵙습니다. 제국에 영광을! 둘 다 오랜만이에요. 예법을 처음 배우시는 거라고 들었는데 제가 잘못 안 건가요? 완벽하세요!”
공작 부인이 자신의 두 손을 맞잡고는 활짝 웃었다.
“가볍게 이거로 가려고 했는데…….”
공작 부인이 손에 들고 있던 아동용 예법서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알록달록하고 아기자기한 삽화가 포함된, 말 그대로 아동용 예법서였다. 그런데 어째 말끝이 심상치가 않습니다만?
싸늘한 예감은 현실로 다가왔다. 공작 부인은 우리의 예법 교실 한쪽에 마련된 책장으로 가더니 종류별로 꽂힌 예법서를 쭉 훑었다. 그러고는 하나 뽑았다. 갈색 벨벳 표지의 두꺼운 예법서는 흡사 사전을 연상케 했다.
“정식 기본서로 시작하죠!”
묵직한 소리와 함께 책상 위로 책이 올려졌다.
쿠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