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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24화 (24/148)

24화

그는 내 기습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아, 그, 그게……. 아니, 난 별로 그렇게 많이 나가 본 적은…….”

후후후. 걸렸다. 나는 황후를 향해 한 번 웃어 보이고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칫! 재미없어.”

그리고 유모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볼테르가 황후 몰래 무언가를 하고 있다. 황후에게도 숨긴 거라면 불 보듯 뻔하다, 어디서 사고나 치고 다니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정적인 나로서는 그걸 뒷조사할 수 있는 내 아군에게 일러바쳐야 인지상정!

나는 귀빈실 밖으로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기 위해 유모의 품에 안겼다.

“유모, 나 쉬.”

유모와 함께 황족 귀빈실에서 빠져나온 나는 적당히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가던 길을 바꿨다.

“앗! 화장실은 저기여요.”

유모가 다른 길로 빠지려는 나를 붙잡았다. 나는 그런 유모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손가락을 입술 앞에 가져다 댔다.

“쉿! 나도 알아. 외할아버님께 갈 거야.”

나는 귀족들이 몰려 있는 반대편 귀빈석으로 잰걸음을 놀렸다.

멀리서 세르피스 후작가의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곧바로 도도도도 뛰며 외할아버지인 세르피스 후작의 품에 폭 안겼다.

“할아버지이이!”

“어이구, 우리 애기!”

그리고 나는 내가 방금 본 볼테르의 가출 의심 정황에 대해 A부터 Z까지 상세하게 일러바쳤다. 외할아버님의 표정이 점차 심각하게 굳어졌다.

“흠…… 여염집 개구쟁이도 아니고 황자가 황후도 몰래 이유 없는 출궁이 잦다니.”

외할아버님의 옆에 서 있던 후작가의 기사가 조용히 물었다.

“사람을 풀어 조사할까요?”

“확실히 조사해 볼 가치가 있지. 그렇게 해라.”

***

아멜리아 황태손의 호위를 뽑기 위해 황궁 안은 연일 시끌벅적했다. 남녀노소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뜨거운 이슈였다.

하인들과 하녀들 사이에서는 각 조의 대진표가 공개되는 날이면 누가 우승을 할 것인가를 두고 도박까지 성행하고 있었다.

기사단이 난리가 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황태손의 호위라니 어지간히 지위가 공고한 기사가 아니라면 이는 엄청난 승진이 아닌가!

그 와중에도 황궁에서 유일하게 조용한 집단은 임페리얼 섀도 나이트뿐이었다.

아르는 황제의 명령대로 황후궁의 담을 넘어 곧장 황후궁 근위 기사단 기록 사무실에 잠입했다. 오늘 견습 기사부의 결승이 있는 날이라 황궁은 거의 비어 있어 잠입하기에 그나마 수월했다. 그것은 황제가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황후가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람 혹은 10~20년 사이에 주기적으로 만났던 적이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지 알아 오라.”

의아했다. 황제의 명령이 불확실한 것도 그렇고 조사해야 할 분량이 몹시도 방대했다.

‘와…… 이거 보다가 여차하면 도박하는 셈 치고 회귀를 한 번 더 해야지 다 볼 수 있으려나?’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는다.

연도별로 정리된 책장, 그 안에 월별로 나열된 책꽂이. 책꽂이 한 줄마다 파일 한 묶음씩이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다.

심지어 황궁의 출입 기록은 20년이 지나면 완전히 폐기된다. 황제는 그 전에 수상한 출입자를 찾으라고 했다.

까라면 까야 하는 직업이라고는 해도 육두문자가 목구멍 바로 밑까지 치고 올라왔다.

들킬까 봐 차마 소리는 내지 못하고 아르는 눈물을 목 뒤로 삼켰다. 동시에 오래전의 기억, 동시에 미래이기도 한 그 기억 속. 아르는 이 자료들을 어디까지 봤었는지 더듬더듬 머릿속을 되짚었다.

2월 28일. 그 파일 옆에 3월 1일 날짜의 파일이 나란히 꽂혀 있는 책장. 그러다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 해가 윤년…….’

하루가 없다. 4년에 한 번 있는 그 날짜가 비어 있다. 2월 29일.

***

나는 여기까지 온 김에 그대로 세르피스 후작가의 자리에 들러붙었다. 돌아가 봤자 키옌 황후와 볼테르의 면상이나 마주칠 게 뻔한데 뭐. 게다가 어린애가 자리 좀 오래 비웠다고 뭐라고 하겠어?

나는 외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방긋방긋 웃으며 재롱을 떨고 사촌들과 재잘재잘 떠들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준결승이 모두 끝나고 결승만 남겨 둔 채 잠시 휴식 시간이 시작되었다.

“저하, 이제 돌아가 보셔야지요. 폐하께서 걱정하십니다.”

“그치만 아까 사람을 보내서 저 여기에 있다고 전했잖아요.”

“시간이 늦었으니 가시지요. 유모, 저하를 뫼시게.”

계속 이곳에 남고 싶었지만 외할아버님은 단호하게 나를 무릎에서 내려놓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와서…….

“오른쪽이었나?”

유모가 고개를 빼고 좌우를 살피다가 오른쪽 길로 향했다. 이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분명히 이 길을 따라 쭉 가다 나오는 모퉁이를 돌면 나와야 하는 길이 보이질 않는다. 이렇게 많이 걸었던가?

‘이 길 맞나?’

유모도 슬슬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우리 반대로 온 것 같죠?”

우리는 일단 가장 처음 나오는 모퉁이를 돌아 안쪽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서 관중석 한복판에 화려하게 치장된 로얄석 위치를 찾아보면 어느 방향인지 나오겠지.

“일단 안쪽에서 확인해 보자.”

그렇게 들어간 곳이…….

“어? 저하께서 어쩐 일이세요?”

왜? 어째서 이놈이 여기에 있는 거야!

로이드 폰 크로이젠이었다. 잠시 휴식 시간을 틈타 나오는 길이었던 모양이다.

“아…… 그러니까. 실례했습니다!”

나는 바로 백스탭을 밟았다. 하지만 로이드가 너무 자연스럽게 내 손목을 잡았다.

“답답하여 산책을 나오신 모양이군요. 로얄석까지 함께 걸으시겠습니까?”

아니, 난 누가 봐도 길을 잃은 공주님, 아니 황태손이잖아!

길을 잃었다는 표현을 내가 부끄럽지 않도록 완곡하게 돌려 말하는 솜씨하며, 데려다주겠다고 하는 대신 함께 산책하자는 말하며. 어디 하나 섬세하지 않은 구석이 없다.

나는 이놈이 지난 삶에서 벌인 일들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레지 않을 수 없는 배려였다.

그의 손에 잡힌 손목이 홧홧했다.

“아…… 고마워요.”

“저야말로 함께 산책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잡고 있던 내 손목을 놓는 듯싶더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손등을 내밀어 그 위에 내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내 옆에 서서 앞장서기 시작했다.

정말로 “앗!” 하는 사이에 에스코트를 받아 버리고 만 것이었다.

함께 걸으며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내게 자신의 취미인 미술과 최근 내 또래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놀이(그걸 그가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등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내 예법 스승이 되실 그의 어머니인 공작 부인의 이야기까지.

“요즘에는 공작저의 풍경을 그리고 있답니다.”

“정말요? 다음에 꼭 한번 보고 싶어요.”

“저하께 보여 드리기에는 아직 부끄러운 수준인걸요.”

나는 실례되지 않는 선에서 그와 적당하게 대화했고, 그 역시 내가 부담스럽지 않을 선에서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자리로 돌아왔을 때, 어느덧 호위기사 선발 대회는 모두 끝나 있었다.

***

대회가 끝나고 나는 할바마마와 황제의 집무실로 와서 함께 보드게임을 했다.

“나 끝. 할바마마 차례요!”

한참 할바마마와 노닥거리는데 마론 백작이 옆방, 할바마마의 개인 서재로 건너가더니 기사 한 명을 데리고 왔다.

“폐하, 보고입니다.”

나는 슬쩍 그쪽을 쳐다보았다. 복도에서 들어온 것도 아니고 황제의 서재에서 보고하러 나오는 기사라니 누가 보아도 수상했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나는 어디까지나 여덟 살이니까.

기사의 어깨에는 어느 기사단의 표식도 아닌 난생처음 보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저게 임페리얼 섀도 나이트?’

내가 그를 힐끔거리는 사이에 할바마마는 자신의 차례를 마치고 카드를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냐?”

“아르에게 맡겼던 일입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할바마마는 내 표정을 살폈다. 나는 그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척, 그리고 내 차례가 온 게임에 집중하여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척했다.

“황후궁의 3년 전, 2월 29일 출입 기록이 없답니다. 여기서 더 조사할까요?”

“그건 됐고. 볼테르가 요즘 어딜 나돌아 다니는 모양이야.”

“알겠습니다. 바로 조사하겠습니다.”

아주 짧은 보고를 마치고 그가 뒤돌아 나가자 할바마마는 자신의 카드 패가 보이도록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 이 할애비가 먼저 완성했단다.”

“져서 재미없어요. 안 할래요!”

“그래, 게임은 그럼 이만하자꾸나.”

대신 나는 어제 드디어 모두 끝이 났던 내 호위기사 선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제 궁으로 언제 새로운 호위기사들이 오나요?”

“이번 주 안으로 보내 주마.”

“명단을 미리 볼 수 있나요?”

내 질문에 할바마마는 책상 한쪽에 쌓아 둔 서류를 뒤적이더니 한 뭉치 꺼내서 내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서만 봐라.”

“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명단을 살폈다. 나는 바로 이번 대회의 견습 기사 부문 우승자 출신을 확인했다.

그는 이번 일에 대한 특전으로 조만간 이른 서임식을 할 예정이었다. 이름은 페일, 지방의 하급 귀족 출신이나 그가 황후파 귀족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우승하는 순간 미세하게 움찔거리던 키옌의 입꼬리가 떠올랐다.

‘이 녀석, 황후와 무슨 관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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