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움찔!
“왜? 답답해. 불 켜줘.”
“잠옷 차림이 아닙니까?”
그의 말에 나는 내 옷을 내려다보았다. 물론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았다. 얇은 여름 잠옷은 가느다란 어깨끈에 의지한 채 몸에 걸치는 민소매였고 그 길이는 엉덩이를 조금 덮는 정도였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나를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턱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 순간 심장이 떨렸다. 이 강직한 기사님을 허물어 전부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당황하는 그의 얼굴이 몹시도 궁금해졌다. 나는 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재빨리 램프에 점등 레버를 돌렸다.
픽!
곧 파랗고 희미한 불빛이 우리 사이를 비추었다.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셨다. 하지만 눈꺼풀에 힘을 꼭 준 채로 실눈을 떠 그를 쳐다보았다.
파란 불빛에도 발갛게 변해 버린 얼굴로 그가 고개를 완전히 돌려 버렸다.
“난 괜찮은데.”
“그런 문제가 아니오라…….”
내가 키득거리며 아르를 놀리자 그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로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러고는 잠시 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눈동자를 어디에다 둘지 몰라 했다.
나는 그런 그의 얼굴 밑으로 바짝 내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 왜 찾아왔어?”
그는 주춤 뒤로 물러나는 듯하다가 자신의 턱밑에서 바짝 올려다보는 나를 어찌하지 못하고 마주 보았다. 그 자세로 눈을 맞추고 목덜미에 쥐가 날 것 같을 즈음이었다. 그가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였다.
“저하, 제가…….”
붉은 입술이 파르르 떨리었다. 한참을 주저하던 그가 가만히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제가 저하를 죽인 적이 있습니까?”
***
방으로 돌아오고 날이 밝을 때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생각에 잠겼다. 밤새 자기혐오가 밀려왔었다. 난 그동안 대체 뭘 한 거지?
그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열 살이었던 기사단 입단 시기를 일곱으로 앞당겼다고 했다. 그것도 일반 기사단의 입단 제한 연령 때문에 소문만 무성했던 임페리얼 섀도 나이트로 진로를 바꾸어서.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 아닌가. 그런 그조차도 바꾸지 못한 미래였다.
‘안일했어.’
아침을 먹으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미래를 바꾸려면 아르가 그러했듯 나도 쉬지 않고 무언가 해야만 한다.
나는 얼린 토마토 디저트 마지막 한 입까지 싹 비우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시녀들이 테이블을 치우는 동안 나는 책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화책. 아기자기하고 예쁘고 어린아이들 취향에 딱 맞는 것들뿐이다.
“유모.”
“왜요?”
“다른 귀족들은 언제부터 공부해?”
“보통 열 살 때부터 예법 수업을 먼저 시작해요. 보통 열한두 살 넘으면 사교계에 데뷔하니까요.”
나는 내가 본격적으로 귀족들의 사교 파티에 돌아다니며 활동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열셋 때부터였던가.
그러나 그때 이미 스물 미만 영애들 사이에서 열리는 사교계 파티는 민티아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것부터 막아야겠군.’
“잔느.”
“예. 저하.”
시녀장 잔느가 공손히 대답했다.
“나 공부하고 싶어.”
제왕학을 배우기 전의 필수 과목인 역사학은 내가 싫어해서 자주 땡땡이치던 과목이었다. 그 때문에 지난 삶에서 열일곱에서야 겨우 제왕학을 시작했다. 그걸 다시 시작해야지.
그러려면 어른들의 허락이 필요하다. 나는 아직 어린애니까. 하지만 할바마마는 그저 나를 예쁘다고만 하시니 할바마마께 가봐야 제대로 공부할 수 없을 거다. 그저 잘한다 잘한다만 해줄 무른 선생들을 붙여 줄 것이 뻔해.
“고모님께 가자. 예법을 배워야겠어. 그리고 다음 달까지 내 개인 서재를 만들어 줘. 서재에는 역사책을 채우고.”
내 1차 목표. 내년에 있을 민티아의 데뷔탕트는 황후의 생일파티, 거기에 나도 나간다!
***
대략의 계획을 세운 나는 미친 듯이 자료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내게 예법을 가르쳐 줄 만한 귀부인 후보의 목록을 만들고 다방면으로 검토했다. 황립 아카데미의 역사학 교수들도 물색했다.
고모님은 할바마마와 달라서 고모님을 설득하려면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망의 그날이 다가왔다.
나는 비장미 넘치게 고모님의 수정궁으로 향했다.
“가자,”
수정궁은 자갈 정원이 아름다운 궁이었다. 하얀 돌이 호숫가의 파문을 그리듯 동그랗게 놓여 있고 인공적으로 만든 시냇물이 흐른다. 그런 정원의 한쪽에는 대리석 테이블과 도톰한 방석을 잔뜩 쌓은 대리석 의자가 놓여 있다.
그곳에서 고모님은 약속보다 일찍 나와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다.
“고모오오오!”
내가 달려가 고모님 옆에 엎어지듯 매달렸다.
“어서 오너라. 공부를 시작하고 싶다고?”
“네!”
고모님은 이미 내가 시녀들을 통해 보낸 서류를 확인했을 테지만, 내가 직접 부탁하러 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네가 말한 황립 아카데미의 디엘로니 교수는 내 역사학 스승님이기도 해. 믿을 만한 분이라 그분을 모셨어. 이번 주에 바로 시작하기로 했으니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된다. 아카데미 수업이 없는 매주 금요일 아침, 10시부터 12시까지 앞으로 역사학을 네게 가르치실 거란다.”
기쁨에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몹시 깐깐한 분이지만 그만큼 성품이 대쪽이다. 녹록지 않은 수업이 될 거다. 이어서 고모님이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법을 가르칠 귀부인 말이다. 목록에는 없는 분인데 내가 따로 알아보았다.”
“네? 누구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고모님께 보낸 후보 목록 이외의 인물이 떠오르질 않았다. 백작 작위에 볼테르 황자파가 아닌 귀족이면서 예법 선생 경력까지 있고 사교계에 영향력 있는 귀부인이 없었다.
애초에 그런 까다로운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귀부인은 흔치 않았다.
곧 고모님의 입에서 의외의 인물에 대한 답이 흘러나왔다.
“크로이젠 공작 부인.”
크로이젠 공작 부인? 공작가의 안살림 돌보기도 바빠 죽을 분이 대체 왜?
게다가 애초에 역대 황녀들의 예법 스승을 맡는 귀부인은 황족의 스승이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서 입궁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공작 부인씩이나 되는 인물이 대체 무슨 명예가 얼마나 더 아쉬워서 코흘리개 황손의 예법 스승 같은 고생스러운 짓을 사서 한단 말인가.
나야 공작 부인이 예법 스승이 되면 너무너무 고마운 것이지만.
내가 의아해하는 사이 고모님이 이어서 말했다.
“대신에…….”
“대신에?”
“함께 예법을 익힐 예동을 들일 것이다. 프리체 백작 영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래 나에게는 예동이 없었다. 황태손의 예동이 될 만한 공작이나 후작 가문의 영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있어 봤자 민티아 정도?
원래대로라면 황태손의 예동으로 백작 영애는 급이 되질 않지만, 예법 스승이 크로이젠 공작 부인이라면 말이 다르다. 그때는 프리체 백작 영애도 예동으로 충분하다. 프리체 백작가가 공작 부인의 친정이니까.
“좋아요!”
나는 고모님을 향해 방긋 웃었다.
나보다 두 살 위, 민티아와는 동갑내기인 그녀는 분명 사교계에서 내 좋은 친구가 되어 줄 터였다. 작위로는 후작 영애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황태손의 예동이라는 타이틀이라면 충분히 비벼 볼 만했다.
아마 크로이젠 공작 부인도 그걸 노린 것이겠지. 게다가 내가 장성하여 황제가 되었을 때, 공작 부인의 친정은 백작 가문 중 최초로 황제의 예동을 배출한 가문이 될 터였다.
나는 활짝 웃으며 외쳤다.
“친구 좋아요!”
***
내가 고모님의 양녀로 호적을 옮기게 되면서 법적으로 황태손이 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렇다고 내 생활이 바뀐 건 크게 없었다.
다만 호위를 더 뽑기 위해 할바마마께서 약속대로 기사단 행사를 크게 열었을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나이를 먹고 생활 반경이 넓어지면서 어차피 호위는 더 뽑아야 했었다.
사실 처음 계획은 ‘아르가 우승하면 명분이 좋으니 호위로 달라고 하고, 우승 못 하면 좋은 구경 했다 치고 넘어간다.’였다.
그런데 할바마마는 아주 본격적이었다. 아예 처음부터 대놓고 황태손의 호위기사를 뽑을 거라고 광고를 때려 버린 거였다.
오늘이 바로 그중 견습 기사부의 준결승과 결승이 있는 날이다.
행사장에 도착한 나는 곧장 할바마마께 눈웃음으로 재롱을 한번 부려 주고 귀빈석에 앉았다. 그런 나를 보고 할바마마가 유모를 부르더니 귓속말을 했다.
“멜리가 기운을 차려 다행이구나. 숨이 넘어가도록 울었다더니.”
귓속말이지만 다 들린다.
“첫날만 그러시더니 그 기사를 찾지는 않으십니다.”
유모가 할바마마께 귓속말로 고했다.
잠시 후, 키옌 황후와 볼테르 황자가 들어왔다. 황후는 자연스럽게 할바마마 옆에 앉았다. 그러자 할바마마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으로 황후와 볼테르, 왼쪽으로는 고모님과 내가 앉게 되었다.
황후가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황손의 호위를 뽑겠다고 연 자리인데, 황손이 이 자리에 드디어 나오는군요. 호호호!”
그녀가 웃으면서 나를 돌려 깠다. 이럴 때는 그냥 무시하는 게 답이라 나는 못 들은 척했다.
어차피 내가 황후와 싸워 봤자 이득을 보기 힘들다. 내 2회 차 인생의 햇수를 총 합해도 황후 나이를 못 이기거든. 고모 나이도 못 이기는데 뭘.
그러니 괜히 나서서 말실수하지 말고 황후는 고모님과 할아버님께 맡겨야지.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앞으로 달려나가 난간을 붙잡고 서서 손가락으로 한참 대련이 펼쳐지는 아랫동네를 가리켰다.
“우와! 할바마마! 저기, 저기!”
할바마마는 그런 내 머리를 토닥거리며 황후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황후도 참, 어린애가 뭘 알겠소.”
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 할바마마를 올려다보는 척하며 그 너머의 황후 표정을 살폈다. 그녀의 표정이 단박 구겨졌다.
“황자와 황녀의 호위를 뽑을 때도 이렇게 요란하지는 않았습니다.”
“꼭 황태손의 호위를 뽑기 위해서만은 아니오. 가끔 이런 특별한 승진 기회로 기사단의 사기를 올릴 필요도 있지.”
할바마마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잠자코 지켜보기만 하던 고모님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황자의 호위도 뽑도록 하는 건 어떻습니까? 황태손의 호위를 뽑겠다고 해버렸으니 우승자는 약속대로 멜리의 호위로 임명하고 준우승자를 황자의 호위로 임명하세요. 가뜩이나 황자가 요즘 궁 밖 출입이 잦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면 호위가 더 필요하지 않겠어요?”
우승자를 멜리에게 붙이고 준우승자를 볼테르에게 붙이자고 대놓고 말하다니 황후에게는 모욕이 따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다른 말이 황후의 귀에는 더 크게 들린 모양이다.
“무슨 말입니까, 에오넬 황녀? 우리 볼테르가 궁 밖 출입이 잦다니요?”
“그 나이 때 사내아이들의 호기심과 모험심이 다 그렇지요. 뭘 하러 나가는지 몰라도 어디 가서 엉뚱한 짓만 안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황후 마마 아들이니 황후 마마가 더 잘 알겠지만요.”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하며 고모님과 황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황후도 금시초문인 듯했다. 황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고개가 볼테르 쪽으로 움찔움찔 돌아가려는 것을 참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숙부를 향해 입꼬리를 올리며 눈웃음을 쳤다. 어린아이가 치는 애교 섞인 눈웃음처럼 보이도록 방긋.
그리고 결정타를 날렸다.
“삼촌! 궁 밖에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