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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님이 두 번째 삶을 사는 방법-22화 (22/148)

22화

섀도 나이트에서 온 복귀 명령서를 손에 쥐고, 아르는 견습 기사들의 교육용 연무장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같은 방을 쓰는 견습 기사들에게는 잠이 잘 오지 않아서 검술 자세를 연습하러 나간다고 말했다.

혼자 수련하다 크게 다치는 것으로 처리한다고 했으니 그렇게 둘러대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저녁 어스름이 질 무렵,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몹시 적어 연무장 안은 조금 어둑했다. 안에는 견습 기사단의 기사단장님과 그를 데리러 나온 섀도 나이트 한 명이 함께 있었다.

‘결국에는 진짜로 돌아가는구나.’

손바닥에서 종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를 데리러 온 섀도 나이트의 기사가 붉은 액체가 든 병뚜껑을 열었다. 돼지 피였다. 비린내가 진동했다.

촤악!

다량의 피가 연무장에 흩뿌려졌다. 그가 병뚜껑을 다시 닫으며 기사단장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나머지는 맡기겠습니다. 그럼…… 가자.”

둘은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사람이 없는 곳으로 신속하게 이동했다. 어둠 속에 녹아들어 섀도 나이트의 본거지가 있는 황제의 궁으로 향했다.

그러나 못내 미련이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르는 자꾸만 견습 기사단 건물을 돌아보았다.

“왜 그러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대로 가면 앞으로 다시는 아멜리아 황손녀의 호위기사는 될 수 없겠지. 차라리 잘되었다. 이대로 그녀가 황제가 될 때까지 그는 자신의 일을 하면 된다.

그리고 지난 삶에서 영문도 모르고 시작했다 영문도 모르고 그만두어야 했던 황후의 뒷조사 임무를 다시 시작하면 된다. 이번에는 황제가 그런 명령을 내렸던 이유를 찾아내고 황제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해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황후의 뒷조사를 제대로 마치면 이번에야말로 황손께서는 무사히 제위에 오르실 거다. 그거면 된다.

그녀가 제위에 올라 임페리얼 섀도 나이트의 주인이 되었을 때는 다시 만날 수 있다. 임페리얼 섀도 나이트는 황제의 것이니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고 있던 때, 앞서가던 기사가 멈추었다.

“너 말이야. 방에 두고 온 게 있나?”

“예? 아, 아뇨. 아니, 아닙니다.”

“휴우…… 이런 정신상태로 섀도 나이트의 임무 수행은 무리다. 티 안 나게 정리하고 와라. 우리 기숙사 어딘지는 기억하지? 네 방은 105호니까 알아서 와. 나 먼저 간다. 난 너를 네 방 앞까지 데려다준 거다. 너는 그 이후에 스스로 몰래 나온 거고. 알겠나?”

“……?”

어, 그러니까 이건 시간을 좀 준다는 건가? 미처 물어볼 새도 없이. 그가 훌쩍 담을 넘어 사라졌다.

아르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섰다. 어떻게 할까. 그는 뒤를 돌아 견습 기사단 건물을 한번 보았다 다시 섀도 나이트의 숙소가 있는 황제의 궁을 쳐다보았다.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과 광활하고 심플한 두 건물 사이에 보랏빛 정원이 아름다운 라벤더궁이 보였다.

***

황후는 아침 일찍 얼굴 마사지를 받으며 시녀가 물어 온 정보를 들었다.

“이번 행사 때 뜬금없이 기사단의 검술 시합을 하겠다고 합니다. 다소 이례적인 일이어요. 견습 기사까지 전부 참가시키겠다고 하니.”

확실히 흔한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못 할 일은 또 아니었다. 황후는 더 이야기해 보라는 듯 가만히 눈동자를 움직여 시녀를 쳐다보았다.

“기사단의 소문에 의하면 황손녀의 호위기사를 뽑으시려는 것 같다고 합니다.”

거기까지 들은 황후는 손을 들어 올렸다. 마사지하던 시녀가 손을 멈추었다. 황후가 입 운동을 몇 번 하고는 물었다.

“견습까지 포함해서?”

“확실하지 않지만, 내부에서 도는 소문에 의하면 그런 것 같습니다.”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 이전에 내 스케줄이 있나?”

“없으십니다.”

“음…… 황궁에 있는 모든 견습 기사 중 가장 실력이 좋은 녀석을 내 온실로 데려와. 단, 내 쪽에도, 에오넬과 아멜리아 쪽에도 연관이 없는 녀석으로.”

황후는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온실로 향했다.

견습 기사까지 황녀의 호위로 넣을 생각이라니 황제는 대체 무슨 계획을 하는 걸까. 손녀 사랑에 눈이 먼 황제가 무엇도 신경 쓰지 않고 무조건 실력 있는 호위기사를 붙여 주려는 걸까.

그 능구렁이가?

황후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어찌 보면 기회였다. 아멜리아의 호위로 실력만 보고 어린놈을 꽂아 넣는다면 다른 이가 손을 쓰기 전에 그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지.

적당히 황손녀의 정보를 캐내고 이용하다가 아멜리아가 적당히 자라면 염문설을 터뜨려서 꼬리도 자르고 황손녀의 명예도 실추시키는 거다.

황후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온실에 도착해 차를 마시고 있을 즈음, 아까 심부름을 보낸 시녀가 견습 기사 하나를 데리고 돌아왔다.

각진 또렷한 이목구비에 제법 큰 덩치, 첫인상부터 마음에 드는 놈이었다.

황후는 시녀가 어디선가 구해 와 함께 내민 견습 기사의 기사단 입단 서류를 훑었다. 지방 귀족 출신이었는데 황후도 아는 가문의 차남이었다.

그 아비가 황후의 세력에 들고 싶어 안간힘을 쓰는 남작이었는데 워낙 한미해서 기억도 못 하고 있다가 방금 서류를 보고 생각이 났다.

‘겨우 코딱지만 한 광산 하나 가지고 주제도 모르고 우리 가문과 거래를 하자고 비벼 대던 그놈의 아들이군.’

그는 후작과 키옌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이따금 자신의 광산에서 난 보석으로 만든 장신구를 몰래몰래 보내왔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인 후작은 그 패물들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키옌은 달랐다. 어차피 주는 선물인데 먹어 버리지 뭐. 그녀 기준으로 그까짓 장신구는 몇 푼 하지도 않는 거였다. 남작 기준으론 큰마음을 먹고 보낸 뇌물이었으나 그건 키옌이 알 바가 아니었다.

‘잘되었어. 내 세력에 들고 싶어 안달이었는데 내 입맛대로 부려 먹기 쉽겠네.’

황손의 호위로 자신의 세력을 집어넣을 수만 있다면 그 뒤는 모든 게 수월해진다. 황태자 부부를 죽였을 때처럼 적당한 때에 사고를 가장해서 죽이는 것쯤이야. 그렇다면 정말로 황실의 대가 끊기는 것이다.

키옌은 갑자기 가슴이 벅차올랐다.

‘물론 황제가 진실을 밝히기 전에 늙어 죽어 줘야겠지.’

설령 아멜리아를 죽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황손이 적당히 성장했을 때, 자극적인 염문설 하나 은근슬쩍 터뜨려 줄 수도 있고.

‘황제를 죽이지 못했다면 황손을 죽이면 돼.’

황후가 옆에 서 있던 시녀에게 손짓하자 그가 황후의 입술 앞에 자신의 귀를 가져다 댔다. 키옌은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오라버니에게 대진표를 만져 달라고 해서 저 녀석이 우승하도록 만들어라. 경쟁이 될 만한 다른 녀석들은 참가할 수 없도록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른 곳으로 빼돌려 두라고 해.”

“예. 폐하.”

황후의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살포시 휘었다.

***

몇 시간 전에 나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전해 들었다.

저녁 식사를 마칠 즈음, 좀처럼 놀라거나 호들갑을 떠는 법이 없는 잔느가 시녀들의 귓속말에 한참을 밖으로 나갔다 오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려 들어왔다. 잰걸음을 도도도도 놀리며 들어와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지난밤 아르가 크게 다쳐 다시는 검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정말로 다친 거냐는 내 질문에 잔느는 연무장에서 핏자국을 보았으며 기사단장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라고 했다.

대체 어쩌다 그런 것인지, 어디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지, 어디로 갔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지 속사포처럼 물어보았으나 잔느도 그것까지는 알아 오지 못했다고 했다.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울어 젖히다가는 급기야 저녁으로 먹은 것을 그대로 토해 냈다.

시녀들은 나를 따뜻한 물에 담가 목욕을 시켜 주었고 유모는 씻고 나온 나를 침대에 눕히고 등을 토닥였다. 나는 그녀가 꼭 여며 주는 이불을 돌돌 몸에 말고는 등을 돌렸다. 그리고 영혼 없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나 이제 잘래. 유모도 잘 자.”

“저하?”

유모는 등을 돌린 내 얼굴을 붙들고 고개를 돌리게 했다. 그러더니 내 이마에 짧게 버드 키스를 했다. 갑작스러운 애정 표현에 흠칫 몸이 굳었다.

“주무셔요. 사랑해요.”

“……나도.”

그녀가 불을 끄고 방 밖으로 나갔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이따금 창문 밖으로 여름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잠이 오질 않는다. 냉궁으로 산책을 나갈까?

그곳에 가면 그의 자취를 느낄 수 있을 것도 같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내게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정작 용서를 구해야 할 건 나였다.

나는 이불을 걷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 앞의 작은 탁자에는 유모가 놓고 나간 램프가 있다. 나는 그것을 들고 비밀 통로로 이어지는 거울로 향했다.

거울 밑에 손가락을 넣고 더듬어 버튼을 찾아 눌렀다.

달칵!

서늘한 바람이 문틈에서 불어 나왔다.

그 순간 누군가 나를 통로 안으로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좁은 벽에서 나를 구석으로 몰아 램프를 빼앗더니 입을 강하게 틀어막았다.

“아…… 읍!”

암살자? 황후가 보낸 건가?

방으로 통하는 거울 문이 닫히면서 잠금장치가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

“쉬-.”

빛 한 점 없는 칠흑 속에서 귓가에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잠시 후 내 입을 막고 있던 손이 조금씩 떨어졌다.

“저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이 목소리는……!

“아르? 크게 다쳤다며 어떻게 된 거야?”

“저도 모릅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거든요.”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두 시간 정도?”

“어제는?”

“어젯밤에도 여기 있었습니다.”

“밤새?”

그가 잠시 주저하다 대답했다.

“……예.”

“낮에는?”

“낮에는 임무 수행 중이었습니다.”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굴었다.

“혹시 나 때문이야?”

“……아뇨.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나는 스르륵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벽에 기댄 채 쪼그려 앉자 발끝이 맞은편 벽에 닿았다. 그만큼 통로는 몹시 좁았다.

아르는 내 옆의 벽에 기댄 채로 서 있다가 내가 쪼그려 앉자 한쪽 무릎을 꿇고 나를 쳐다본 채로 앉았다.

직접 닿지 않아도 그의 온기가 전해진다. 그렇게 한참을 기분 좋게 앉아 있다가 문득 몹시 사소하면서도 몹시 거슬리는 것이 떠올랐다.

“그런데 여기 왜 있었어?”

“…….”

“나 찾아온 거야?”

나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희미하게 그의 형체만 보일 뿐 표정은 조금도 읽을 수가 없었다.

“나 기다렸어? 내가 여기 올지 안 올지 어떻게 알고?”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답답해서 옆에 놓인 램프에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그의 손이 내 손목을 꾹 잡았다.

“불은 켜지 마십시오.”

그는 내가 램프를 가져갈 수 없도록 내 손목을 잡은 자신의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의 손과 맞닿은 피부에 찌릿한 정전기가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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